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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수난은 갈릴래아에서의 그의 민중운동과 때어서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넷째 마당 '갈릴래아로'에서 예수의 공생애 출발의 계기가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었을 때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거기에 이미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각오가 반영되어 있는데, 그것은 갈릴래아 예수에게서 일어날 민중운동을 전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갈릴래아 민중의 처지는 다음과 같은 네 겹의 억압 밑에 있었다. 첫째는 점령세력인 로마제국의 군사적 횡포와 경제적 착취, 둘째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폭정, 셋째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지방 사람들의 차별주의, 특히 성전제도에 의한 경제적 압박 그리고 도시의 부재지주들에 의한 토지독점과 그에 따른 노동력 착취이다.16)'예수의 시대상' '체제와의 충돌' 마당을 참조. 이러한 큰 요인들이 구조적으로 갈릴래아의 민중들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은 철저히 절망하여 체념 속에서 죽어가거나 아니면 목숨을 내걸고 봉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마당에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하는 것은 이미 다섯째 마당 '하느님 나라'에서 언급했지만,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혁명의 때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전제에서 저들에게는 도탄에서 구해줄 메시아 대망이 충일해 있었음에 틀림없다. 예수에게 표정을 보여달라는 요구는(마르 8, 11) 반드시 적대자의 악의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라 예수를 메시아로 추앙하는 민중의 열기를 반영하고 있으며,17)여기서 말하는 '표정'(σημείον)은 힘(δυναμις)의 과시와는 다르다. 그것은 종말성의 표정으로서(마르 13, 413, 22) 우주적 변이나 하늘로부터 직접 나타난다. 루가 21, 1125 등도 참조. 이러한 표상은 특히 묵시문학에 자주 나타난다(마르 13, 24~25; 묵시 12, 1~315, 1). 그러므로 이것은 민중이 예수에게서 결정적인 종말사건을 기대하였음을 시사한다(J. Gnilka, Mk, I, S. 306f./ 한역본 389면 이하.).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병자들의 절규는(마르 11, 47) 예수에 대한 유다적 메시아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옥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이 그의 제자를 통해 예수가 오실 그이(ό έρχόμενος, 마태 11, 2)냐고 물은 것은 그에 대한 민중의 메시아적 기대를 재확인하려는 것이며, 예루살렘 입성 때 민중의 환호는(마르 11, 10) 민중의 메시아 대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위에서 예거한 것들의 역사성은 이론의 여지가 있으나 그런 것들은 당시 민중들이 예수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 것이라는 점에서 만큼은 그 역사적 가치가 존중되어야 한다.18)R. A. Horsley, "Popular Messianic Movements around the Time of Jesus", CBQ, 46, 1984, p. 458f./ 한국신학연구소 편역, 『예수시대의 민중운동』, 한국신학연구소, 1990, 96~131면. 그들의 메시아 열망은 예수에게만 집중됐던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나타나는 이른바 메시아 운동가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표출되었다.19)넷째 마당 칼릴래아로를 참조.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굶주리고 생활에 지쳤으며 또 현실을 중오하며 그것에서 해방되려고 몸부림치던 민중들은 예수를 수난으로 몰아가는 충분한 압력이 되고 남았을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염원이 구체화되어 행동대로 출현한 것이 젤롯당이다. 젤롯당의 거점은 갈릴래아였기 때문에 비록 복음서에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하더라도 예수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은 이미 지적했다.

여기서 젤롯당운동을 다시 회상할 필요가 있다. 젤롯당에 대해서는 그 시기와 한계에 구구한 견해가 있다. 주전 66년 유다 전쟁을 일으킨 때에 국한하려는 견해, 그중에서도 예루살렘 사제가 중심이 된 운동과는 대조적으로 갈릴래아를 거점으로 하면서 예루살렘에 진입 한 시카리운동과도 구분하려는 견해 등이 있으나20)M. Smith, "Zealots and Sicarii. Their Origin and Relation", HThR, 64, 1971; S. Zeitlin, "Zealots and Sicarii", TBL, 81, 1962. 그것은 불투명한 요세푸스의 용어 사용에 지나치게 의존한 데서 온 결과이다.21)M. Hengel, Die Zeloten, S. 412. 여기서 주목할 것은 어느 한 시기에 국한된 운동이 아니라 종교적민족적 저항을 폭력에 호소한 운동의 맥에서 그 운동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폭력에 의한 봉기가 본격화된 것은 로마의 시리아 주재 총독인 퀴리노(Quirinius)가 세금징수를 위해 유다 지방 호구조사를 실시할 때였다(주후 6년). 이때 선두에 나선 자가 갈릴래아 유다(Judas)이다. 요세푸스는 유다가 이때 사두가이, 바리사이 그리고 에쎄네파와 나란히 제4철학파22)'제4철학파'는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창시했다고 하는데, 이 철학파가 강조한 것은 하느님의 '배타적 주권'과 '이스라엘의 자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신인협력'이었다. 제4철학파의 주장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M. Hengel, Die Zeloten, S. 77~150; R. A. Horsley, "The Sicarii. Ancient Jewish Terrorists", The Journal of Religion, 59, 1979, p. 442f./ 한역본 『예수시대의 민중운동』, 132~168면). 요세푸스는 시카리가 제4철학파와 사상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리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Jos., Bell., 2, 253).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운동의 맥은 훨씬 이전으로 소급된다. 이미 대로마 저항 민중운동이 계속되어 왔는데, 그것이 상당한 수준으로 조직화된 것은 하스몬 왕가의 낙조기에 접어들어 안티파터가 로마의 세력을 등에 업고 유다 지방의 집정관이 되고, 그의 아들들을 유다와 갈릴래아 지방의 군사령관으로 군림시킨 주전 7년 이후부터이다. 유다 민중은 이두메계인 이들이 이스라엘민에게 군림하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중운동의 측면에서 보지 않고 정복자에 대한 지지자로서 간접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에 요세푸스의 기록에서는 그 맥락을 밝혀내기가 어렵다.

민중운동은 이미 친로마파인 예루살렘의 어용사가의 눈에는 무시된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저항이 얼마나 치열했는가하는 것은 당시 민중의 대표인 히스키아가 예루살렘 지배층에 잘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젊은 헤로데가 이 민중의 게릴라부대를 토벌했다는 사실만 전하면서 그때 수많은 사람들을 생포하여 재판도 없이 처형했는데 그중에 에제키아도 포함되었다고 한다.23)둘째 마당 '예수의 시대상'을 참조. 이에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의원들이 아직 명맥만 유지하는 히르카누스 2세에게 헤로데의 만행을 꾸짖어 재판에 회부할 것을 강요했으나 오히려 헤로데가 군사를 이끌고 진입하여 시위함으로써 겁에 질려 산헤드린 의원들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저항운동이 얼마나 큰 파문을 일으켰는가를 입증한다. 요세푸스는 에제키아를 '비적 두목'이라고 함으로써 그 봉기정신을 말살하려고 한다.24)Jos., Bell., 1, 204. 그러나 유다가 바로 그의 아들이며 젤롯당을 그의 후손들이 지휘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표현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때 팔레스틴에서 탈출해야 했던 헤로데가 로마에서 왕권을 수임 받고 다시 진입하자 갈릴래아 지방에 대한 소탕부터 시작했다는(주전 39~38년) 것은 민중저항운동이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그 어느 곳보다 강력한 세력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많은 살육을 감행했으나 알벨라(Arbela) 동굴을 요새로 한 이른바 강도들은 소탕할 수 없었다고 한다.25)Jos., Bell., 1, 304. 사실상 헤로데 1세 이후 알려진 저항은 이것뿐이다. 헤로데의 잔인성과 교활한 정치력은 겉으로 보기에 저항운동을 둔화시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갈릴래아의 '강도'들은 그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헤로데가 죽자(주전 4년) 저항운동은 곧 표면화되었다. 이에 헤로데의 뒤를 이은 아르켈라오가 소탕전을 벌여 3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결정타를 주지 못하므로 시리아 주재 로마총독 바루스(Varus)가 지원군을 끌고와 살육했다. 요세푸스는 그가 2천 명이나 십자가에 처형했다고 전한다.26)Jos., Bell., 2, 73ff. 그러나 그것으로 민중저항운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위에서 본 바대로 히스키아의 아들 유다, 노예 출신 시몬, 목동 출신 아트롱게스 등등의 지휘 아래 민중운동이 계속되다가 모두 장엄한 최후를 마쳤다.27)넷째 마당 '갈릴래아로'를 참조.

그중 유다는 '갈릴래아인'이라는 칭호가 말해주듯 갈릴래아에서 계속 세력을 규합했으며, 마침내 주후 6년의 호구조사를 계기로 표면에 나섰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에제키아를 단순히 '비적의 두목'이라 한 데 비해 유다가 조직한 젤롯당은 제4철학파라 하고 그는 철인(σοφισστής)이라고 한다.28)Jos., Bell., 2, 118433. 이로써 유다에 의해 시작된 젤롯당은 단순한 무장폭도가 아닌, 이념으로 무장한 저항단체임을 시사한다. 그것은 그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므나헴(Menahem)에게도 같은 칭호를 쓴 데서 확실해진다.29)Jos., Bell., 2, 445.

유다는 바리사이 좌파인 사독(Zaduk)과 더불어 궐기했다.30)Jos., Ant., 18, 9. 바리사이 좌파는 바리사이파 가운데 급진적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갈릴래아 사람 유다의 사상에 가까운 주장을 폈다. 그레츠는 샴마이파가 유다에 의해 창건된 젤롯당과 유사한 경향을 띠고 있었다고 추측한다(H. Graetz, Geschichte der Juden, Leipzig, 1905, Bd. ID, S. 256f). 그는 궐기할 때 "로마에 세금을 내고 하느님 외의 어떤 죽어 없어질 것을 주권으로 인정하는 것을 용납하는 것은 치욕"31)Jos., Bell., 7, 253~256; Ant., 18, 3~1023~25.이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이것은 하시딤 이래의 뚜렷한 신조로서 하느님 외의 어떤 주권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그 바탕에는 민족주의가 깔려 있는 것이다.32)하느님의 절대주권과 이스라엘의 독립은 이들에게는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었다. 이 같은 입장은 헤로데 가에 대한 저항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유다의 그 다음 활동이나 최후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의 언급을 통해 갈릴래아 유다가 죽으니 따르던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말았다고 전해지는데(사도 5, 37),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자들이 다 흩어졌다는 것은 올바른 보도가 아니다. 비록 헤로데왕 당시에 그의 잔인하고 교활한 통치 아래 큰 봉기는 없었으나 계속 저항운동이 끊이지 않았으며, 갈릴래아 일대는 저항자들의 웅거지였다. 그러한 저력이 있었기에 헤로데왕 사후에 재빨리 봉기할 수 있었으며, 특히 유다의 정신은 그의 자손에게 계승되어 총독 알렉산더(Tib. Alexander, 주후 45~48년) 때에 그의 두 아들 야곱과 시몬이 봉기부대의 지휘자로서 처형되었으며,33)Jos., Ant., 20, 102. 그의 자손인 므나헴이 유다 전쟁 발발시에 지휘자로서 예루살렘까지 진격했다.34)Jos., Bell., 2, 433ff.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저 유명한 마사다 요새에서 그의 동료 전원과 장렬하게 집단자살함으로써 그의 절개를 과시한 엘르아잘(Eleazar, 주후 71년)도 유다의 손자였는데35)Jos., Bell., 7, 253.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그 운동이 줄곧 계속되었다는 것과 유다 전쟁을 일으킨 주력부대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긴 투쟁사의 계보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젤롯당의 결사적 투쟁은 당시 갈릴래아 민중의 열망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지적한 대로 저들의 일차저인 적은 로마제국이다. 그것은 로마제국이 하느님의 주권을 침범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는 로마제국 자체보다는 예루살렘에서 군림하는 배신자들인 상류층에 집중되었다.36)로마에 협력하고 대중착취에 앞장섰던 이들 상류층에 대한 공격은 시카리의 암살전술로 나타났다. 시카리에 의해 암살된 사람들 가운데는 대사제 요나단도 있었다(Jos., Bell., 2, 256). 그런데 봉기가 진행되면서 시카리의 활동범위는 예루살렘을 넘어서 지방까지 확대되었다. 그들은 지방의 토지에서 유다의 귀족들을 몰아냈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했다(Jos., Bell., 7, 254). 저들은 바로 로마의 세력을 등에 업고 하느님의 주권 수립운동을 무력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전체를 부패하게 만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운동이 예수의 운동에 어떤 형태로든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 영향을 빼고는 예수의 수난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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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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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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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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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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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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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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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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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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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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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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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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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의 종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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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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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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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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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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