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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민중운동

다음은 민중운동의 또 하나의 다른 측면으로서 예수를 따르던 자들에 대한 보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것으로 부각된다. 예수가 그들을 부른 장면들은 극히 민담적인 서술이어서 그 계기를 잘 알 수 없다. 어쩌면 저들은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메시아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요한복음은 저들의 일부가 세례자 요한파에 속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고 이미 저들이 사전에 내통하고 있었다는 인상도 주는데(요한 1, 35~51), 그것이 역사적 현실의 반영일 수도 있다. 혹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저들 중의 일부는 젤롯당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이들에게는 일정한 메시아상이 있었으며, 바로 그 상을 예수에게서 찾으려고 했으리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예수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뛰어넘기 어려운 담이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유다적 메시아상을 가지고 예수를 그러한 이로 기대했다.37)S. G. F. Brandon, a.a.O., S. 349. 그것은 심판자로 모든 불의를 제거하고 하느님의 주권을 즉시 실현하는 힘과 승리의 상이다. 복음서에서는 저들의 맹목성과 무지에 대한 예수의 비판과 책망을 도처에서 볼 수 있는데,38)마르 8, 319, 59, 3310, 35. 전승모체의 편향적 비판이 이것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가장 극적인 것은, 예수의 수난에 대해 예수운동 안에서 야기된 견해 차이의 반영일 수 있으나, 예수의 제자들의 메시아관과 예수의 수난의 현실이 서로 상충됨을 드러낸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예루살렘 도상에서 일어난 제자들의 자리다툼 이야기(마르 10, 35~45)와 저들의 배신과 절망(마르 14, 66 이하), 도피(마르 14, 51~52)는 서로 맞물려 있는 것 같다.

이에 비해서 이미 '예수와 여인' 마당에서 충분히 살펴 본대로 저 일단의 여인들만이 그의 처형의 현장을 지킨다. 그 현장에 이르기까지 이 여인들만은 저 남성들(제자들)처럼 어떤 전이해(前理解)를 가지고 예수를 오해하거나 어떤 사적인 욕심 따위를 보인 흔적이 전혀 없다. 저들은 그의 수난의 당위성을 가장 잘 알았던 이들로 나타 날 뿐이다. 저들이 유일한 목격자들인 것이다. 저들은 예수를 통한 새 세계를 기대하고 있는 민중의 대표성을 지닌다. 그러면 저들이 공통적으로 예수에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이상에 나타난 예수의 민중들의 성분을 추적하는 데 예수의 적대자들의 시각이 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저들이 왜 예수를 죽이려고 했는지에 대한 대답과도 관계가 있다. 위에서 본 대로 마르코복음서는 예수를 죽이려는 적대자들의 음모가 거듭되었음을 보도한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준 경우(3, 6),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분노한 경우(12, 12), 그리고 성전숙청행위(11, 18) 등에 의한 살해음모가 그것이다. 이 셋은 모두 마태오와 루가에도 그대로 전승 된다. 이에 대해 요한은 예수가 라자로를 살려 일으킨 사건 때문에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고 전한다.39)열째 마당 '체제와의 충돌'을 참조.

그러면 이러한 일련의 행위 자체 때문에 그를 처치하려고 한 것인가?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는 것 때문에 바리사이파와 헤로데당이 야합할 이유가 없으며, 유다인의 죄악을 비유로 반영했다고 죽일 음모까지 꾸민다는 것은 예언자들의 비판정신에 훈련된 저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성전숙청도 그 행위 자체만으로 그를 죽이려고까지 한 계기가 될 수 없다. 까닭은 그것은 정당한 비판행위이며, 더군다나 예언자의 말을 원용하는 행위가 아닌가!10)마르 11, 17에서 예수가 한 말로 인용된 성구는 이사 56, 1b와 이사 7, 11을 결합한 것이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살려 일으켰다는 자체도 죽일 이유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런 일련의 사건마다 꼭 언급되고 있는 사실, 즉 민중의 동태다. 저들은 예수를 죽이려 했으나 민중이 무서워 그 집행을 유예한 것으로 되어 있다(마르 11, 1811, 3212, 12 등). 중요한 것은 저들이 민중을 무서워했다는 사실, 곧 그것은 예수가 민중과 밀착했다는 사실의 반영도 되지만 예수의 행위 자체가 민중의 소요 또는 봉기를 유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의 적대자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바리사이파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을 보자.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남의 어깨에 메게 하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마태 23, 4a). "그들은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루가 20, 47). 이 비판에 예수의 민중운동의 면모가 반영되어 있다. 민중은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피억압자들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들을 억압착취하는 저들의 죄상을 지적공격하는 예수는 저들이 자신들이 포함된 지배체제를 민중과 더불어 전복하려는 자로 간주하기에 충분하다. 요한복음은 적대자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이유를 그들의 말로 이렇게 표현한다.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요한 11, 48). 이것은 그가 반로마 투쟁을 해서 민중을 규합선동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41)바레트는 요한 11, 48을 유다 전쟁이 반영된 일종의 사후예언으로 본다(C. K. Barre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London, 1977, 해당부분 참조/ 『요한복음 11』[국제성서주석 32. 1], 한국신학연구소, 1984). 그러나 이 구절이 예수활동의 역사적 핵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자료인 루가에서 예수의 적대자들은 빌라도에게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 국가를 전복시키고 카이사르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루가 23, 2)42)우리말 번역에서 "우리 국가를 전복시키고"(새번역 70년도판)를 "우리 백성을 그릇되게 하여"(새번역 81년도판)로 고쳤는데, KJV에는 "They began to accuse him, saying we found this fellow perverting the nation"으로 되어 있다. 헬라어 διαστρέφειν은 '뒤집어엎다, 역행한다, 반대한다, 저항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W. Bauer,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 Berlin/ New York, 1971, 해당부분 참조).라고 고발하였고, 그 다음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사람은 갈릴래아 온 땅에서 가르치며 백성을 선동하고 있습니다"(5절)라고 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한 것을 재확인하고 있다. 마르코나 마태오에는 예수에 대한 고소 내용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와 꼭같은 것은 그의 죄명을 '유다인의 왕'43)'유다인의 왕'은 유다교의 메시아 칭호이다. 예수시대에 유다교의 메시아사상은 종교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었고 양자는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젤롯당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참칭하면서 '유다인의 왕'을 자처했는데, 이 역시 정치적 함축을 띠고 있었다. 그닐카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긍정도 부정도 아니라고 해석하면서 이 말의 종교적 의미만을 부각시키는데, 이에는 동의할 수 없다(J. Gnilka, Mk, II, S. 300 / 한역본 396면 참조).이라고 했다는 점이다(마르 15, 2; 마태 27, 11). 이점은 예수 자신이 긍정한 것으로 전한다(루가 23, 3). 그렇다면 그의 민중소요는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이 뚜렷하다.

물론 여기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유다 지도자들은 원래 예수의 정치성에 대한 반대보다는 그를 자신들과의 이해관계, 가령 성전의 권위를 무너뜨림으로써 성전종교의 뿌리를 흔들어 놓을 뿐 아니라 성전 중심의 경제질서를 파괴한 것 때문이었는데44)경제질서의 붕괴 때문일 수도 있다(J. Blinzler, Der Prozess Jesu, 1960, S. 57.) 로마와의 야합을 위해서 민중봉기 소요를 전면에 내세웠을 수 있다. 그러나 민중봉기에 대한 공포 없이 예수를 위험분자로 볼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러면 이것은 그것에 대한 저들의 오해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예수 자신의 행태에 기인한 것인가? 로마제국이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했으며, 그 죄명을 유다인의 왕이라 한 것은 그가 정치범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며(마르 15, 26),45)빌라도는 예수에게 죄가 없다고 거듭 밝히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로마제국하에서 그리스도교가 타협적으로 서술한 랏일 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를 젤롯당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두 사람과 함께 처형(마르 15, 27)46)E. Lohmeyer, Das Evangelium nach Markus, Göttingen, 1967, S. 343; S. G. F. Brandon, a.a.O., S. 356; R. Pesch, a.a.O., II, S. 487. 반면에 볼트만은 그렇게 볼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뤼르만도 27절이 후대의 필사자가 이사 53, 12를 끌어들인 것으로 보아 그 역사성을 부정한다(Dieter Lührmann, a.a.O., S. 261). 그러나 그닐카는 이를 보도하는 마르 15, 26~27을 기본전승에 속하는 자료로 보며 이 강도들(λησται)이 젤롯당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J. Gnilka, Markus, II, S. 318/ 한역본 421면).한 것은 저들의 처형이 오해에 기인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우리는 '예수와 민중' 마당에서 갈릴래아 민중과 예수의 관계를 세밀히 검토했다. 그가 얼마나 민중과 밀착되었는가는 거기서도 충분히 입증되었는데 그것의 민중운동으로서의 방향은 분명히 노출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운동의 은폐성이다.

예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비밀을 지키라고 요구한 것에 대해 주목한 사람은 브레데(W. Wrede)이다. 그에 의하면 귀신추방사건 다음에 세 번, 그외의 기적행위 다음에 네 번,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 다음에 한 번, 남몰래 잠행한 행위 두 번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브레데는 이것을 마르코에 의해 설정된 메시아의 비밀이라고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어떠한 역사적 근거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태초에 도그마가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처럼 역사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삶의 현실에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런 견해는 서구 성서학에서 당연시되어 왔는데, 복음서에 서술된 예수의 삶의 비밀성은 결코 메시아 비밀이라는 도그마로 포괄할 수 없다. 그가 지적한 메시아 비밀은 예수의 민중운동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오히려 역사적 사실을 상상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당시에 메시아운동 자체는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큰 위협이었다. 젤롯당이 활발히 활동하는 상황에서 민중과 더불어 한 예수의 행태가 로마에 불안감을 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예수가 치유행위를 하고 그것을 비밀에 부칠 것을 요구한 것이 메시아 비밀을 지키기 위한 것인가? 유다교에서는 병을 치유하는 메시아상이 없으며,47)병 고치는 일은 라삐들에게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J. Klausner, a.a.O., S. 362f.). 그러나 병을 고치니까 그 사람이 메시아임을 입증했다는 사고는 없다. 불트만도 예수의 기적사화를 구약이나 유다교의 메시아상에서 찾지 못하고 오히려 헬레니즘 영역에서 병행자료들을 찾는다(R. Bultmann,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S. 247ff./한역본 287면 이하). 병을 치유할 수 있으면 곧 메시아라는 인식도 없었다. 오히려 예수의 이러한 행태를 통해서 일어나는 예수를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이 더 불안의 이유가 될 것이다. 사실상 예수가 자기 행위를 감춘 경우가 많이 보도되어 있는데, 어떤 시각에서 보거나 메시아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직 단 한 번 침묵의 명령을 메시아성과 연계시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당신은 메시아입니다"(마르 8, 29)라고 고백한 것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명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실은 베드로 고백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그 뒤에 예수 자신의 수난예고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48)실제로 베드로의 고백과 베드로의 책망(마르 8, 33)을 직접 연결시키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견해도 있다(E. Wendling, Die Entstehung des Markusevangelium, Tübingen, 1908, S. 115ff. 참조). 이를 전제할 때, 마르 8, 30의 침묵명령을 수난예고에 대한 보도(마르 8, 31~32)와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설령 그것이 메시아 비밀을 지키려 한 것이라 해도 메시아라는 사실 자체를 감추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운동으로서의 메시아운동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때 그 운동의 비밀을 지키려는 이유가 더 자연스럽게 납득된다.

예수는가끔씩 자기의 행방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려고 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그가 띠로 지방에 갔을 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려 했다든지(마르 7, 24), 갈릴래아로 들어갈 때 마치 잠입해 들어가듯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9, 30) 등이 그런 것들인데, 이는 운동의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서술이다.

왜 예수는 자주 광야에서 민중을 만난 것일까?(마르 6, 358, 4)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는 그 일행과 더불어 낮에는 군중 사이에서 토론하고 행동하나 저녁때가 되면 으레 성밖 미지의 어떤 곳으로 나갔다고 한다.49)예레미아스는 유월철에 예루살렘이 내방자들로 포화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바깥에서 숙영하면서 유월절 식사를 하는 것이 통례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운동의 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평면적 관찰이다(J. Jeremias, Die Abendmahlsworte Jesu, Göttingen, 1967, S. 37). 이것은 그들만이 아는 비밀장소로 은신했다고 상상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최후의 만찬 이야기(마르 14, 12 이하)도 민중운동의 차원에서 볼 때 비로소 충분히 납득될 수 있는 비밀스러운 행위이다. 바로 그의 행위 자체가 민중운동이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가려졌다고 보는 것이 메시아 비밀이라는가설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마침내 제자들이 도망하고, 수제자로 알려진 베드로마저 그를 부인하고, 그의 제자의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배신했다는 등의 단편적인 전승들도, 예수운동을 특수한 종교영역에 국한시켜 볼 때는 그런 것을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으로 성립된 부수적인 것으로 가볍게 제거해버릴 수 있으나, 운동의 차원에서 보면 역사의 현장에서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일련의 비밀스러운 행동이 전재될 때 비로소 그가 수난당하고 처형된 이유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자신은 결코 오해를 받아서 처형된 것이 아니며, 그가 당한 수난은 그의 행태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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