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이미 앞마당에서 수난사를 어떻게 서술했는지 보았는데, 그것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성격화할 수 있다. 그를 처형하기까지의 재판과정이 철저히 불의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학계에서 그것은 로마권력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되도록이면 예수 처형의 책임을 로마에 돌리려고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로마는 예수에 대해 무죄하다고 변호하는 입장이었음을 나타내려 했다고 본다. 그럴 가능성은 물론 있다. 그러나 무죄하다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로마법으로 처형한 로마제국은 무슨 꼴이 되었는가? 로마는 유다 민족지도층에게 질질 끌려 자기의 법을 유린할 수밖에 없는 약자였는가? 아니면 그 재판정은 법이나 정의 따위는 설 자리가 없는 그런 곳인가? 유다 종교귀족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유 역시 불투명하다. 저들이 정말 종교수호자들인가? 예수가 성전을 모독했으며, 그것은 바로 신을 모독한 것이기 때문에 처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는가? 그렇다면 저들의 입장에서 저들의 방법으로 그를 처단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이다. 민중을 동원하여 투석으로 처단할 수도 있는 그들이었으니 말이다.32)스데파노의 경우가 그렇다(사도 7, 57). 그러나 저들은 로마제국의 힘에 의존했으며, 그러기 위해서 반민족적 거짓증거도 서슴지 않았다. 원래 저들이 예수 처형의 주동자였는데 산헤드린의 권력을 의식한 전승자들이 그 궁극적 책임을 로마에 전가한 것일까? 그러나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자나 듣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재판과정이 부정과 불의로 진행되며 모순으로 차 있는 것을 모를 까닭이 없다. 그 재판과정에서는 그 죄에 대한 규명을 끝끝내하지 못한 채 유다 종교귀족들의 강요에 의해서 로마의 법에 의한 죄명을 씌워 처형한다. 한마디로 더러운 야합에 의한 재판이다. 로마제국과 유다 상류층이 야합하여 일으키는 불의한 현실이 극적으로 압축되어 있다.

이런 현장에서 예수는 의롭게 당하기만 한다. 그는 자기 민족에게 철저히 외면당한다. 그뿐만 아니라 소수의 그의 제자들에게까지 배반과 배신으로 버림을 받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마저 그를 버렸다는 사실이다. 수난사의 전승자는 예수가 마치 하느님에 의해 처형되는 것처럼 서술한다.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투에서부터 십자가상의 절규에 이르기까지 유다세력이나 로마세력은 안중에도 없고 하느님과만 대결하는 예수를 그린다. 예수가 재판정에서 끝내 침묵했다는 것은 전체 맥락에서 보아 진실일 것이다.33)예수가 한 말을 분석하여 그것이 그리스도론적 케리그마임을 규명하겠다. 그것은 그가 저들을 상대로 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표시이다. 이러한 예수의 행태에 대한 서술과 철저한 신 부재적 암흑이 지배하는 전체 맥락은 잘 맞물리고 있다.

그는 재판과정과 십자가상에서 철저히 모독을 당한다. 왕도 아닌데 가짜 왕관과 왕복을 입히고 그 앞에 절을 하며 희롱하고, 얼굴에 침을 뱉고 때리며 채찍질을 하는 등 최대의 모욕을 당하는 그를 그대로 노출한다(마르 15, 517~19). 이런 마당에 그 예수는 아무런 저항도 않는다. 유신론자들이 막연히 기대한 신의 간섭은 물론 없었고, 예수 자신의 행태나 말에서도 도도하고 신념에 찬 모습은 전혀 표출되지 않는다. 오히려 메시아사상에 젖은 유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거나 신적 영웅숭배에 젖은 헬레니스트들의 눈으로 보거나 그는 철저히 비겁한 자로밖에 부각되지 않는다. 철저하게 버림받고 철저하게 무능한 예수, 이상과 같은 마르코의 예수의 수난에 대한 서술은 예수의 첫 민중들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가령 마태오에는 예수가 필요하다면 "아버지께 구하여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마태 26, 53)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예수는 무능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서였다는 변명을 하고 있다. 특히 루가는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외로운 고투의 장에 천사가 와서 수종했으며(루가 22, 43), 예수의 체포현장에서 한 제자가 적대자의 귀를 자른 것을 곧 낫게 함으로써(루가 22, 51) 그의 초능력을 과시하며, 함께 처형되는 강도에게 낙원에서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있다(루가 23, 43). 나아가 그가 죽은 다음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된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마르코의 전승을 그의 운명 이전으로 끌어올림으로써(루가 23, 45) 예수는 하느님에게 버림을 받았거나 약자가 아니었음을 변호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그런 것들은 모두 마르코의 철저성을 완화 내지 왜곡한 후대에 의한 첨가 또는 수정 부분들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맥락은 세 복음서 전체가 마르코의 그것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서술이 가능했는가? 이미 예수는 그리스도로 승격된 지 오랜 마당에 그리고 갈릴래아에서의 초인적인 그의 행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전승자 또는 편집자가 이렇게 너무도 비종교적인 적나라한 현실을 그대로 노출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하나의 설명은 저 유명한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의 사상이 그것을 뒷받침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되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
멸시를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이사 53, 2~3).

이상은 멸시당하는 예수의 모습에 잘 부합하는데, 바로 이 고난의 종이 매를 맞고 찔리고 으스러뜨림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다고 하며, 그래도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도살장으로 향하는 양처럼 끌려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반역죄로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 신세를 걱정해주는 사람 하나 없었고, 인간사회에서 끊기고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했다고 한다(53, 4 이하 참조). 이쯤 하면 예수의 수난 서술이 고난의 종의 형상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난의 과정이 흡사하기 때문에 그 역사성을 부정하고 이 고난의 종의 형상을 예수의 수난의 서술에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34)불트만은 마르 15, 27의 보도가 이사 35, 12부터 엮어낸 것이라면서, 이런 노력은 구약예언의 증명이라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R. Bultmann,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S. 304/ 한역본 355면).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측면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 하나는 이 고난의 종의 형상이 가공적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단의 고난사를 서술했다는 것인데, 그런 경우에 예수의 수난사 자체도 역사적으로 비슷한 상황과 과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사이의 공통점을 전제한 서술일 수 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예수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사를 나타내는 고난의 종의 형상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자신에게서 바로 이 민족사를 구현하기로 결단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그는 이스라엘 집단의 수난사의 화신으로 그 수난의 역사를 끝장내려고 했다는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데 고난의 종에 대한 서술에는 그에 대한 고백이 뒤따른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이사 53, 5~10).

이상에서 고난에 대한 소극적인 시각에서 적극적인 이해로 급전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그 고난이 죄의 대가라거나 약하기 때문이라는 등의 소극적 이해에서 '우리'를 위해 고난의 짐을 대신 졌다는 적극적 인식이다. 너의 고난을 구경꾼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로 인식하는 것은 참여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큰 전환이다. 이것은 고난하는 너와 나의 연대성의 탄생이다.

예수의 민중들이 예수의 죽음을 구경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패배요 약함이었다. 그러므로 실망하고 체념하여 도망한다. 그러나 그의 고난에서 자신들의 고난을 보았고, 그의 죽음에서 자신들의 죽음을 보는 순간 바로 예수와의 새로운 연대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때 그의 죽음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위해' 또는 '우리를 대신해서'자신을 내던진 행위라는 인식으로 바뀔 수 있다. 이런 인식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린 그가 누구냐는 물음으로 진전되어 예수는 메시아라는 그리스도론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35)바울로의 십자가 이해(Hans Weber, Das Kreuz Jesu bei Paulus, Ein Versuch, uber den Geschichtsbezug des christlichen Glaubens nachzudenken, Göttingen, 1981, S. 189).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