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복음의 수난사에서 최후의 만찬장에서의 예수의 말을 빼면 예수의 수난의 의미를 암시하는 데가 한 구절도 없다. 그것이 만일 인류를 위한 수난임을 나타내려고 했다면 게쎄마니 이야기에서부터 운명하는 최후까지를 그렇게 서술할 수 있을까? 그것을 목적을 가진 죽음이라 보았다면 어떻게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절망적 비명으로 끝맺을 수 있을까! 그리스도론의 시각에서 그런 죽음은 도저히 허락되지 않기에 후에 성립된 복음서는 그것을 보완하려고 노력했는데, 그중 요한복음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 30)라고 한 말이 가장 '우리를 위하는 죽음'에 상응하는 말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마르코복음에서 왜 그리고 어떻게 이 같은 절망적인 수난사를 서술하게 되었나하는 질문으로 돌아가 물어보아야 한다.
사실이 그랬으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러면 이사야서나 또 케리그마에서 말하는 그 죽음의 의미는 어떻게 인식되었을까? 그것은 저들이 예수의 수난, 그의 죽음에서 자신들의 수난, 죽음을 인식할 때였을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의 예수의 수난에서 '우리'의 수난을 본 것이다. 예수의 수난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민중이 예수의 처형 후에도 계속 수난의 길을 걸은 것을 잘 안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저들이 박해가 무서워서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여러 곳에 암시된다(사도 1, 12~13; 8, 1). 처음부터 박해가 시작된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고난의 연속사처럼 고난으로 점철된다. 바울로의 생애도 그렇다. 마르코복음이 성립될 무렵은 유다 전쟁이 일어나서 팔레스틴의 이스라엘인들은 죽지 않으면 삶의 보장 없이 이방 땅에서 배회하는 버림받은 자들의 처지에 있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초인적인 힘을 보유한 채 수난을 당했다거나 그의 수난의 과정에 하느님의 직접적인 지원이 있었다면(루가에서처럼) 저들이 예수와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러한 특수한 존재의 수난이 수난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은 어떤 사람들이 강변하듯이 찬송을 부른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그러면 그것은 이미 수난이 아니라 연극이 되고 만다. 또 수난을 모르는 자, 아픔을 모르는 자가 저들의 아픔을 알 수 있을까? 없다면 연대의식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아니, 예수는 '우리'와 꼭 같은 조건 아래에서 수난당했다. 우리가 당하고 있고 당해야 하는 그런 수난을! 이런 인식은 바로 저들로 하여금 그의 수난이 바로 우리의 수난, 그의 죽음이 바로 우리의 죽음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했다. 이것은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수난당했다"는 인식의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 부재적 암흑 속에서의 예수의 수난을 이야기하면서 저들은 자신들을 이야기 한 것이다. 자신들이 그러한 적나라한 현실에서 헤매기에 누구보다도 예수의 수난과 그 죽음을 그렇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저들이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초석이 된 것이다.
불트만은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은 두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이야기의 양면이라고 했으며, 부활은 바로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십자가 없이 부활은 불가능하며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빼고 부활사건이 성격화될 수 없다. 그러나 십자가 인식이 바로 부활이라는 결론에 머문다면 그것은 관념론에 귀착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사건은 결국 '십자가의 말씀'으로 귀착되고 말 것이다.
바울로도 "십자가 말씀"이라는 말을 쓴다(고전 1, 18).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그의 고난에 참여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필립 3, 10~11). 그것은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지 단순히 그런 사실을 아는 것 따위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 부활사건은 그 이상의 것을 말한다.
마르코에는 그렇게 처형된 예수는 그의 시체를 안치한 무덤에 있지 않았다고 하며, 그 대신 한 청년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자렛 예수는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를 뵐 것이라고 전하라는 사신에 접할 뿐이다. 민중의 현장 갈릴래아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의 일은 그 자체로 전개될 '이제 일어날 일'처럼 열어놓고 있다. 갈릴래아 민중에게 무엇이 일어났나? 다른 복음서는 현시한 예수를 잠깐 등장시키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절망에 빠진 예수의 민중이 집결했고 저들이 '일어났다'(έγείρω)는 사실, 그러므로 예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고, 저들은 세계로 진출할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 청년은 예수가 다시 살아나서 갈릴래아로 먼저 갔다고 했는데 다시 살아났다고 번역된 '에게이로'는 '일어난다' '궐기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에서 일어난 예수처럼, 절망 속에서도 예수의 죽음에서 연대의식을 발견한 그들은 예수와 더불어 일어나 전진하게 되었으며, 바로 그렇게 일어선 저들은 "예수는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났다"고 증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일어남(부활)은 어디까지나 그의 수난의 반열에 참여하는 자들에게만 현실이 된 것이지 구경꾼에게도 인식될 수 있는 그런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난"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만 인식 되었을 뿐 그를 처형한 빌라도나 가야파는 경험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