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교도 인간의 이해(理解)를 희생의 제물로 요구하는 것을 거부한다. 언어화된 것은 이해를 전제한다. 그러나 신비주의라면 이같은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된다. 자기 안에서 도취하는 것을 구태여 설명하라고 강요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으니까! 그리스도교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것이 언어화된 이상 누구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와 기독교는 일단 구별된다. 기독교는 예수를 전제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예수를 배제한다. 기독교는 예수의 필연은 아니다. 만일 예수의 사건이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가지 않고 인도를 거쳐 동양 땅에서 형성되었더라면 전혀 다른 모습을 지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랫동안 미국을 통해서 들어온 기독교의 모습, 기독교와 예수를 일치시키고 그 교설이 예수의 뜻을 가장 대표적으로 풀이했다는 전제를 맹목적으로 추종해왔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사건과 성서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에 이르렀다. 이같은 우리의 자세는 우리의 역사적 상황이 우리를 강요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출현한 것이 민중신학이다.
20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기독교는 무수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형성되어왔다. 로마의 콘스탄티노플 대제에 의한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는 갈릴래아 예수의 종교를 완전히 둔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기독교는 모든 학문의 여왕의 자리에 군림하고, 이에 걸맞은 최대한의 장식을 해왔다. 그것을 위해 서구의 모든 사상이나 문화가 주저없이 이용되었다. 결국 기독교와 기독교문화는 서로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서구문화와 기독교의 혼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기독교는 교리적 틀을 견고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세분화하는 일을 거듭했을 뿐만 아니라 각 분야마다 응분의 무장을 했다.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변증론이라는 것이 고유한 분야로 발달되었다. 그러나 그 골격을 대별하면 다음 일곱 가지이다. 기독교의 원천으로서의 성서론, 그리스도론, 신론, 교회론, 죄론, 성령론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론이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주제들로 골격을 삼고 있으며,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도 그리스도교의 핵심에 접근하려면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채와 같이 되어버린 이 주제들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주제들은 성서 내용에서 발원된 것들 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의 교권수호를 위한 싸움에서 형성되었다. 성서 자체에는 그보다는 더 중요한 주제들이 있는 것이다.
서구적 사상 형성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이란 다음 세 가지, 즉 이원론(二元論), 주객도식(主客圖式) 그리고 인격(人格)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리스도교의 원류인 헤브라이즘과는 상관없고, 헬레니즘의 소산이다. 그리스도교가 그레꼬 로마의 문화권과 더불어 자기방어를 하는 과정에서 헬레니즘적 사고의 틀에 자신을 짜맞춘 것이다.
철저한 이원론은 헬라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알렉산더의 세계 정복전선에서 중동의 고대종교사상과 만나 생겨나는 제3의 문화현상이다. 영원한 평행선을 긋는 양극적인 이원론으로 성서의 주제들을 설명하는 것은 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 세계와 영원한 평행선을 긋는 신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모든 것을 주객 관계에서 보는 것은 관극(觀劇)을 즐기는 희랍적 유산이다.
현실적으로 주는 자와 받는 자, 당하는 자와 구경하는 자가 어떻게 엄격히 구분되는가! 그것을 구분하면 어느 하나만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소외된다. 인격(persona)이란 말은 성서에도 없고 동양에서도 본래 없는 개념이다. '페르조나'란 본래 '가면'이라는 뜻으로 무대에서 나온 개념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피안(彼岸)과 차안(此岸), 성(聖)과 속(俗)으로 세계를 이원화하며 역사와 자연을 갈라놓는다.
이런 마당에서, 한국의 험악한 정치현실이 지성인들로 하여금 민중을 만나게 했다. 자기 게토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신학계에서도 민중을 만나는 통로가 뚫리게 되었고, 적지 않은 신학자들에게도 자기 주제가 되었다.
이 민중을 만남으로써 이원론, 또는 주객 사이의 담을 헐고 다시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신과 인간, 성과 속 그리고 인격이란 이름 밑에 모난 돌처럼 고립된 인간과 인간의 합류를 가능하게 했다. 이 대화는 이러한 사건의 체험을 보고한 것이다.
1992년 가을
안병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