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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발견하기까지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 안 선생님께서는 성서해석에서 매우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셨고 특별히 1970년대에 '민중신학'을 제창하셔서 제3세계는 물론 서구 신학자들로부터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흔히 이야기되듯이, 어떤 사람의 사상이라는 것이 그의 삶과 결부된 것이라 할 때, 선생님의 독특한 신학사상은 어떠한 삶과 연관 되고 있는 것인가하는 궁금증을 품게 됩니다. 선생님은 어린 시절을 간도 땅에서 보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시절의 이야기로부터 실마리를 좀 풀어주시지요.

내가 태어난 곳은 평안남도 신안주였어요. 만 한 살도 채 안 됐을 때 우리 부모님이 간도로 이주를 했고 그래서 간도가 나의 실질적인 고향이 돼버렸지요. 우리 집안은 그리스도교와는 인연이 없었고, 내가 어린 시절에 푹 젖어 있었던 것은 철저한 유교적 분위기였습니다. 아버지는 한학자에다 한의사이셨어요. 나는 네 살 때부터 한문공부를 강요받았고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부면서 공자와 맹자가 모두 우리 조선사람인 줄로 알 정도였습니다.

지금 회상해보면, 간도는 나의 삶의 본향이었어요. 거기서 내 잔뼈가 굵어진 것만큼이나 나의 정서와 사상의 기본 바탕이 형성된 것 같아요.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낮에는 일본군 천하이고 밤에는 우리 독립군 천하인 그런 분위기에서, 아마 다섯 살 때부터 김일성 장군 전설을 들으면서 자랐지요. 축지법을 쓰고 일본군의 습격을 당하면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달아난다는 얘기 등등. 내 나이 5, 6 세 때 이미 그는 신화적 존재였고, '김일성' 하면 어린 가슴에 깊이 새겨졌던 이름이었지요. 나는 현재의 김일성을 의심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나와 불과 열 살 남짓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 녹두장군 노래도 늘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특별히 민족의식 때문에 간도로 간 것은 아니었고 국내에서 생활이 어려우니까 한의사가 되어가지고 간도로 건너간 것입니다. 그 유명한 간도 명동에서 한 20리 떨어진 딸라즈(大立子)란 읍이 있는데 거기서 한 5리 들어가면 들미동이라는 마을이 있어요. 우리 가족은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그곳에 소학교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학교의 이사장 격이었습니다.

당시는 공산당과 독립군이 합작을 해서 반일투쟁을 하던 때였는데, 우리 게릴라부대와 전투를 해서 죽어 돌아오는 일본군을 자주 봤습니다. 그때는 좌익이 참 많았지요. 그들은 표지로 팔뚝 위에 빨간 띠를 두르고 다녔는데, 그 배우지도 못한 무식한 농민의 아들들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겠다고 열심히들 다니는 것을 보면 그렇게 장해 보일 수가 없었어요. 그들에게서 노래도 배웠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으로는, "독수리 같은 일본 군대 발톱 밑에 든 우리 민족……" 이런 노래가 있었어요. 멋모르고 따라 부르곤 했지요. 이따금씩 밤중에 내가 잠에서 깨면 건넌방에서 두런두런 사람들 소리가 나곤 했어요.

한번은 내가 눈을 떠보니 어떤 낯 모르는 사람들이 와 있고 어머니가 그분들을 깍듯이 대접하고는, 마련해뒀던 물건을 그들에게 주는 것을 목격했어요. 후에 물어보니까 그게 내복이었다고 해요. 무식한 나의 어머니가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게지요. 또 한번은 밤중에 남루한 군복을 입고 총을 가진 젊은이가 두 사람 왔는데, 나를 안아 무릎 위에 앉히고는, "아, 고 녀석 잘도 생겼다. 이담에 커서 독립군이 되어라" 그러던 것이 기억나요. 어머니가 밥을 지어주니까 어찌나 달게 먹던지, 그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장해 보였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제국주의, 자본주의,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개인주의…… 이런 언어들, 무슨 '적'(的)자가 붙은 말들을 늘 듣고 자랐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랐어도 그런 언어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그런 것에 젖어 있었더랬습니다.

일본 경찰의 감시와 박해가 심해지자 그들의 모습이 마을에서 사라지면서, 소위 '삐라'—지금의 유인물—가 마을의 집집마다 나타났습니다. 종이에 등사한 것을 똘똘 말아 끝을 뾰족하게 해가지고 창호지 문에 콕 찔러놓고 가곤 했어요. 새벽에 어른들이 먼저 발견해서 조심스럽게 펴보시곤 했는데, 내가 보려고 하면 너는 볼 것 없다고 하셨지만, 호기심에 몰래 뽑아보곤 했어요. 그때의 삐라라는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보다도 등사잉크가 종이 주변에 새까맣게 묻어 있던 것이 아주 생생한데, 등사기가 나빠서 그랬던가 봐요.

▶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겠지요?

그렇지요. 그건 사회주의자들이 한 짓이지요. 사상전(思想戰)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한걸음 앞섰지요. 그리고 나는 당시 민족의 지도자로서는 '김일성'이라는 이름밖에는 못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사회주의자가 더 강했던 것 같아요.

소학교 4학년 때 교장을 상대로 '스트라이크'를 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한국인 교장이었는데 술이나 처먹고 다니고 수업도 게을리 하고 해서 방학 중에 교장축출 모의를 했지요. 대표가 세 사람 뽑혔는데 내가 제일 어린 나이로 그 셋 중에 끼여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 아버지가 이사장이니까 나를 내세웠던 것인지도 몰라요. 개학을 하자마자 교장이 먼저 정보를 입수해서 제일 먼저 나부터 불러 매질을 했어요. 나는 겁이 나면서도 "나쁜 건 나쁜 겁니다!"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교장에게 대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학부형들이 소집되고, 교장은 피고로 몰리고, 우리들은 21개조의 비행(非行)을 들어 교장을 성토했어요. 우리 셋은 끝까지 굽히지 않고 우리의 주장을 내세웠지요. 일주일 후에 경찰서장이 우리 셋을 불러 담판하겠다고 오라는 통지를 보냈을 때, 나는 이젠 죽었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결국 나는 4학년 때 학교를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 쓰라린 경험 하나가 있었습니다. 전에 어딘가에 쓴 적이 있습니다만, 마을에 공산당들이 와서 인민재판을 했는데 텁석부리 영감이라고 내가 좋아하던 영감이 공산당을 욕했다는 죄목으로 맞아 죽었습니다. 내가 좋아했던 영감이었는데 죽이는 방법이 하도 잔인했기에 그후로 공산당에 대한 내 감정이 나빠졌습니다.

▶ 어린 시절에 그리스도인이 되셨다고 들었는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신 것은 언제쯤이었습니까?

학교를 퇴학 맞고 석 달쯤 되었을 때 인구가 3천 명 쯤 되는 소읍에 사는 친척집에 가 있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어요. 그전에 나는 십자가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마음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명동에서 조금 올라가면 가톨릭촌(村)이 있었습니다. 거기 언덕에 십자가가 있는 것을 보고 동네 아이에게 저 것이 뭐냐고 물었더니, "누가 우리 대신 죽었다"는 대답이었어요. 우리 대신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에 이상한 충격을 받았었어요. 그런데 그 소읍에 갔을 때 거기도 십자가가 서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 이 동네에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신 죽은 사람이 있구나!' 그래서 자진해서 그곳을 찾아갔지요. 그때부터 나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란 참 무서운 곳이더군요. 소학교에서 받았던 일본식 교육으로 인해 죽었던 민족의식이 소생한 곳이 교회였으니까요. 새벽기도회 때는 꼭 독립을 위해 기도했고, 성서해석을 할 때도 조국의 독립을 영원하고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쪽으로하고 있었어요. 예를 들면, 사도행전에, "하느님이여,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가 바로 이때입니까?"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하느님이여, 조선이 회복될 때가 바로 이때입니까?" 이렇게 해석을 하는 거예요. 교회에 열심히 출석을 하면서 민족의식이 되살아났고, '우리 민족이 정말로 왜놈들한테 나라를 빼앗겼구나'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집안에 첩을 두고 있었고 술을 심하게 마셨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반발에서도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에 내게 제일 지긋지긋한 것이 첩과 술이었고, 아마도 내가 교회에 다니게 된 첫째 이유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첩도 술도 안한다는 데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말 중에는 합당한 말도 있었어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이놈아, 예수를 믿다니, 예수를 배워 예수처럼 된다면 몰라도 예수를 믿다니. 우리 동양에도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예수를 믿어? 믿는다는 게 뭐냐?" 이런 말씀, 또는 "우리 조상 대대로 전래해 온 우리 것을 버리고 서양 종교를 믿다니" 같은 말씀은 후에 곰곰 생각해보니 '그것 참 합리적으로 생각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당시에는 아버지의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한 집에 두 여자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용납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더욱 확고해졌고, 그래서 6학년말에 집안에 불화가 생긴 것을 계기로 어머니에게, "어머니, 우리 이렇게 더럽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저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벌어서 어머니 모시고 살겠습니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갑시다"라고 권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와 갈라져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과 함께 세 식구가 따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교회의 영향이 없었던들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소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에 가지 않고 점원생활을 하면서 어머님을 돕고 교회에 더욱 열심히 다녔어요. 어머니는 못 배운 분이셨지만 보통 분이 아니셨습니다. 내가 벌어다 드린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일 년분을 꼬박꼬박 모아두셨다가 그 돈으로 나를 중학교에 진학시키셨습니다.

당시에 간도 용정에는 여섯 개의 학교가 있었는데 독립군계통의 학교 하나와 좌익계열의 학교 하나, 그리고 미션계 학교 하나 이렇게 세 개만이 사립학교였어요. 나는 당연히 미션계 학교인 은진중학교를 택했습니다. 대성중학교와 동훈중학교에서는 625 전까지 이북에서 굉장히 활발하게 활약하던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은진중학교에서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리고 광명중학교라는 데서는 친일파들이 났는데, 그들 중에는 만주군에 들어갔다가 일본사관학교를 거쳐 나중에 정계(政界)로 나갔던 정일권, 강문봉 등등이 있었습니다.

▶ 윤동주 시인은 어느 학교였나요?

윤동주는 은진중학교였지요. 내가 은진중학교를 선택했을 때 거기 가면 장래가 없다고 선생님도 말리고 주위에서 말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나는 결심을 굳히고 거기를 갔습니다. 그 학교에 강원룡, 문동환이 함께 다녔어요. 김재준 목사는 그 당시 그 학교의 교사이셨고요.

원래는 일본말로만 수업을 해야 하는데 우리 역사를 몰래 가르치는 선생이 있었습니다. 은진중학교에 종교부라는 것이 있어서 일요일이면 다섯 동네를 선정해서 그리스도교 전도 절반, 문맹퇴치 등 계몽운동 절반, 때로는 마을에 주재해 살면서 야학도 하였습니다. 당시 간도에는 그런 운동이 굉장했어요. 나는 2학년 때 교회의 여자 야학교에서 가르쳤고, 3학년 때에는 십 리쯤 떨어진 어느 교회에 가서 전도사 겸 선생 겸 야학을 하면서 그 동네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회라는 것을 기반으로 민족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2학년 때의 일로 기억나는데 한번은 내가 아이들에게 쪽지를 돌려서 우리나라 태극기와 독립노래를 알려줄테니 등교 한 시간 전에 학교에 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학급 전원이 거의 다 모였습니다. 나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는 애국가를 칠판에 적어놓고 노래를 가르쳐주고 태극기 그리는 법도 가르쳤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모두 어린 학생들이었지만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는 매우 감동적인 분위기였어요. 내가 그 노래를 어디서 배웠는지는 확실히 기억 안 나나 필시 교회에서 받은 영향이었을 것입니다.

▶ 당시에는 별로 의식하지 못하셨지만,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경험이 선생님의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사상에 강한 민족적 성격을 부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교회의 영향도 있었고 우리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지요. 간도는 나의 민족적 감정과 사상 형성에 결정적으로 중요해요. 간도에서는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에서 '모세' 연극을 했어요. "오, 이스라엘 민족의 태양이여!" 하면서 절규에 가깝게 민족의 영도자인 모세를 찬양했고, 또 조국을 찾기 위해 싸웠던 에스더를 연극화하기도 했어요. 크리스마스 때마다 구약성서 중에서 민족해방의 주제를 끄집어내어 연극을 했고 민족해방투쟁의 영도자인 모세 연극을 하면서 민족적 소망을 거기에 표현했지요.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민족주의와 그리스도교는 결코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한국 교회는 그 성립부터 민족적 그리스도교였고 애국적 그리스도교였습니다. 한국 그리스도교를 볼 때는 그런 시각으로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바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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