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얘기를 오늘의 시점으로 끌고 오기로 하지요. 선생님의 신학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이른바 '민중신학'으로 일대 전환을 했다고 일반적으로 얘기를 합니다. 그러한 신학적 전환은 선생님의 사상 발전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질적인 변화를 한 것인지, 어느 쪽으로 보는 것이 옳을까요?
민중신학이 탄생한 것은 물론 유신체제하에서였고, 민중신학을 말하려고 하면 유신체제하에서의 한국 민중의 상황을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그렇지만 '민중'에 대한 가슴에 사무친 생각은 일제시대로, 저 간도에서의 체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제시대 간도 땅에서의 한국인의 삶―그것은 나의 어머니의 삶이라는 상징을 통해 내 가슴에 아프게 박여 있어요―은 전형적인 민중의 삶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뼈에 사무치게 내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민중'이었습니다. 이들이 왜 이다지도 못살아야 하나? 왜 이렇게 눌리고 빼앗겨야만 되나? 간도 땅에서 유배생활 같은 것을 하면서 보호받지 못하고 철저히 버려진 채 찢어지게 가난하고 힘없이 사는 우리 민족에 대한 울분이 어린 가슴에 철천지한으로 응어리져 있었어요. 그 당시 간도는 마치 예수 당시 팔레스틴의 갈릴래아 같은 이방인의 땅, 민중의 현장이었지요. 민중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러한 뿌리를 가진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신학적으로 개화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 간도에서 넘어오신 것은 해방 직후였습니까? 그 무렵의 이야기를 좀…….
간도에서 좌익과 충돌이 생겨 도망하다시피 넘어온 것이 1946년이었어요. 해방 직전에 나는 일본놈의 눈초리를 피해 간도 어느 시골에 피신해 있었는데, 그러면서 그 마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가 해방이 되자 표면에 나와서 어린 나이였지만 마을 자치위원장도 되고, 소학교를 접수해서 이사장직도 맡고 그랬어요. 당시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소련군이 진주하자 해방군이 왔다고 모두들 플래카드를 만들어 들고 나가서 영접을 했는데, 그놈들이 닥치는대로 부녀자를 강간하는 것을 보고는, 결국 해방이 돼도 힘없는 민족은 여전히 당할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현실에 절망을 느끼며 간도를 떠나 두만강을 울면서 건너왔습니다. 그리고 정처도 없이 다만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왔지요. 이북 땅을 거쳐오면서 겪은 일들도 일이었지만, 간신히 서울에 당도하여 '이제는 살았다' 했는데 미국 군인들이 한국 사람을 개돼지 취급을 하는 데는 그 치욕을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끝끝내 우리는 짓밟히는 민족이구나!' 하는 어린 시절로부터의 울분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셨지요? 어떤 계기로 사회학에서 신학으로 전환하시게 되셨는지요?
나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신학을 할 생각은 없었고, 우리 민족의 가난이 뼈에 사무쳐 경제학을 할까 하다가 좀더 포괄적인 학문을 해보자고 해서 사회학을 택했었지요. 사회학을 택하게 된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교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 뭔가 사회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뭐 정치적인 의미는 아니었고, 새로운 공동체 형성을 꿈꾸었지요. 그런 꿈을 가지고 서울대학 재학 시절에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모여서 '일신회'(一信會)라는 친목회를 만들어 "우린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하면서 열심히 모였고 졸업한 후에도 모였는데, 그러다가 6ᆞ25가 터졌지요. 피란 갔을 때 '아무래도 정신차려야겠다. 현재의 교회로는 안 되겠다. 뭔가 새로운 운동의 모태가 될 수 있는 공동체를 시작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래서 동란으로 인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일신회 회원들을 내가 돌아다니며 설득해 모아서, 전주에 거점을 두기로하고 되도록 자주 모이게 되었습니다.
▶ 그때 무슨 잡지를 내셨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요?
예, 『야성』(野聲)이라는 잡지였습니다. '들의 소리'라는 뜻이지요. 내가 발행인이 되고 일신회의 열한 명이 필진이 되었는데, 그중에 신학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창간호에 '고난의 의미'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는데 그것이 나의 첫 글이었습니다. 고고(呱呱)의 소리를 지른 셈이었지요. 피란 시절이어서 전주에는 인쇄소가 없었어요. 그래서 잡지의 인쇄는 부산에까지 내려가서 해야만 했는데, 돈이 없어서 12호까지 내다 끊어졌습니다.
▶ 그 잡지에 실린 선생님 글의 주된 논지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내 주장은 단순했어요. 예수 팔아 밥 먹는 것은 옳지 않다. 직업적인 목사 두지 말고 평신도 교회를 해야 한다. 부분적인 관계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입체적 공동체라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런 것이었습니다.
▶ 직업적인 목회자가 없는 평신도들만으로 된 교회란 말이지요? 그건 알겠는데 입체적 공동체라면?
그때 모였던 친구들이 각각 일하는 분야가 달랐고 직업도 다양했지요. 이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수도사처럼 생활하면서 공부도 하고 사람들과도 만나 여러 분야, 여러 각도에서 카운슬링을 하자는 의미에서 입체적 공동체라는 말을 썼던 것입니다. 그때 남산 아래 '향린원'이라고 일제시대에 요정을 하던 적산가옥이 있었는데 누가 그것을 내게 좋은 뜻에 쓰라고 줘서 내 손으로 못 박고 수리를 해서 공동체의 거처를 마련했었지요. 결혼 안 한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이란 것이 얼마나 집요한 '에고이즘'(egoism)의 단위인지 공동체가 되지를 않아요. 처음에는 공동체 식구들끼리 예배하는 공동체였던 것이 차츰 결혼해서 가족관계가 생기고하니까 외부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서 결국 교회로 발전했어요. 그것이 지금의 향린교회의 전신이지요. 공동체의 본모습을 지키려고 싸우고 싸우다 안 돼서 나는 설움을 느끼고 절망하다시피 해서, 교회로부터의 탈출뿐 아니라 '사회'라는 생각 자체로부터도 탈출하겠다고 작심하고 '실존주의자'로 선언을 했습니다. 『야성』에 썼지만, "나는 홀로 내 길을 가련다"고 선언하고 떠난 게 독일 유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