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체적으로 성서구절을 예로 들면서 민중신학적 조명을 가하니까 선생님의 신학 하시는 독특한 방법이 더욱 선명해지는군요. 한 가지만 더 말씀해주시지요. 선생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성문 밖' 얘기가 있죠?
성서를 보는 나의 시각은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등을 종교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아요. 예수사건, 메시아 사건은 그리스도교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성서학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정치하는 사람, 경제학하는 사람과는 달리 어떤 사건을 성서에 근거 해서 보는 것뿐입니다.
나는 민중의 사건을 거대한 하나의 화산맥(火山脈)에 비유하지요. 하나의 화산맥이 여러 시대를 두고 흘러오면서 각각의 역사적 상황에서 분출하는 것으로 보고 있어요. '그 화산맥이 예수시대에 거대한 활화산으로 터진 사건이 바로 예수사건이다.' 이렇게 보고 있고, 그 화산맥이 지금 이 시대에도 면면히 역사의 지각 밑을 흘러가고 있다고 봐요. 그래서 오늘 한국에서 일어나는 민중사건들도 단절된 독립적 사건들이 아니라, 2천 년 전의 예수사건과 맥을 같이하는 사건들이라고 보고 있어요. 이것이 중요한 건데, 내가 추구하는 건 현존(現存)의 그리스도, 즉 '그가 오늘 이 시대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데 있어요. "그가 오늘 여기에 민중사건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까 2천년 전의 예수를 추구하는 것이나 교리상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은 난센스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그리스도가—나의 언어로는 오늘의 예수사건이—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체제 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기존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거기로부터 소외당하고 버림받고 쫓겨난 '성문 밖'—예수는 예루살렘의 성문 밖에서 처형당해 죽었지요—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주님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으니 우리도 성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히브 13, 12~13)라고 했는데, 이 말은 참으로 심오하고 아름다워요. 거기에서 이름을 따와서 '성문밖교회'라는 노동자 교회가 섰지요. 나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나 그 얘기는 내가 일찍부터 했던 것이지요. '성문 밖'이란 소외당한 사람들의 거주지역인데 거기에서 그리스도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한국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거나 안 부르거나 간에 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싸움이 성서학을 하는 내 눈에는, 정치학자나 경제학자의 눈과는 달리, 예수사건이 줄기차게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똑똑히 보여요.
▶ 선생님, 사실 저는 '성문밖교회'라는 이름에서 '성문 밖'이라는 말과 '교회'라는 말은 서로 부딪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요. '성문 밖'이 소외된 지역, 이른바 주변부라 한다면 '교회'는 그렇지 않거든요. 대부분의 교회는 실제로 성문 안에 위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시교회든 시골교회든 그 주소가 어디이든간에 교회는 본질에서 체제내적인 것, 즉 성문 안에 속한 것으로 보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성문밖교회'라는 것은 역시 썩 잘 어울리는 명칭은 아닌 것 같아요. 물론 현실적으로 문밖 교회가 존재하고 또 '성문 밖'을 지향하려고 무척이나 애쓰고 있는 작은 공동체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지금 명백하게 거대한 성(城)이 아닙니까?
나는 언젠가 독일에 가면 서구신학자들에게 '당신들이 신학을 왜 하오?' 이것부터 물으려고 해요. '지금 있는 기존의 것(status quo)을 보존하자는 것이지, 그 밖에 뭐 있소?' 하고요. 기존교회가 있고 재산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그리스도교가 유지되지, 그것 없으면 유지될 이유가 없어요. 교회의 체제가 굳어져서, 거기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민중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교회는 기득권을 지키려하고, 그래서 '성문 밖'으로부터 '성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해요. 한국의 교회들을 예로 들어도, 이 교회에 창기가 들어갈 수 있소, 거지가 들어갈 수 있소?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 즉 '오클로스'를 구성했던 사람들의 신분은 하나도 이 교회에 들어갈 수 없게 구조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체제로 굳어서 하나의 질서를 만들어놓지 않았소? 그래서 교회가 철저한 이기주의 집단이고, 현대의 사교장이 되어버리지 않았소? 이웃을 위한 장소이기보다는 자기보존과 확대를 위한 장소로 되어버렸어요.
그러나 '교회'(ecclesia)란 언어는 본래 아주 소박한 것이었어요. '에클레시아'란 단순히 회중이 모인 것을 뜻하는 그리스말입니다. 성역화된 교회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예요. 요즘 한국에도 소위 민중현장교회—우린 '바닥공동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만—가 노동자 거주지역, 도시빈민 지역에 생기고 있지요. 교회란 이름은 빌렸으되 이곳에는 아무 형식 없이, 전제조건 없이 문자 그대로 '아무나 나와도 좋소!' 하는 원리가 살아 있어요. 그야말로 '에클레시아'가 민중현장에, 성문 밖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민중의 고뇌를 같이 하고, 민중과 함께 살고, 함께 싸우고,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공동체, 그것이 참된 의미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지요. 그것이 민중의 교회이구요. 기존의 교회들은 이 민중의 교회를 지향해야 하고, 우선 당장은 그렇게 체질개선은 못하더라도 적어도 민중교회를 지원하는 일부터라도 시작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