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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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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 선생님, 이제는 시사성이 있는 문제로 화제를 바꿔볼까요. 요즘 '한국 신학은 삼민(三民)이념을 신학화해야 한다'는 제안이 그리스도교 청년운동 일각에서 나왔더군요. 이 경우 삼민이라면 민족민중민주입니다. 민족의 자주와 민중의 주체가 보장된 민주주의의 실현이 이른바 삼민이념의 골자라 하겠는데, 평소에 '민족적 민중' '민중적 민족'을 말씀해오신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제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삼민'이라고 세 가지를 내세운 것은 현장에서 싸우면서 이걸 말하다 보니까 저게 모자라고, 저걸 말하면 또 다른 것이 모자라고 해서 결국 민족민중민주 세 가지를 함께 말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돼요. 그러나 나는 '민중'을 바로 말하기만 하면 다른 두 가지는 그 속에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중'이라고 말할 때 그 안에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설움이 다 담겨 있는 것이고, '민중적'이라고 할 때 민중을 주인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당연해요. 민주주의는 민중이 주인이 될 때 참된 의미에서 민주주의지요. 나는 '삼민'은 전략적인 의미에서 잠정적으로 필요할지는 몰라도 '민중'이라는 한마디 말 속에 그 세 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삼민 가지고 새삼스럽게 신학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아요.

민중은 한국적인 것이에요. 서구 사람들이 '우리도 민중이다', 그런 소리 함부로 못합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민중적 민족이라고 할 때는, 식민지 치하에서 설움 받고 외세에 의해 수탈당하고 국내 지배층에 의해 억눌리고 빼앗기는 우리 역사 속에서의 민중이자 민족인 그들을 말하는데, 이렇게 보면 '민중'이란 말로 그 모두가 다 포괄됐다고 봅니다.

▶ '삼민'이라는 것이 세 가지를 병렬적으로 나열함으로 해서 문제의 핵심을 흐리게 하는 약점이 있다고 하겠는데,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민중을 철저하게 파악하게 되면, 즉 민중의 입장에서 철저히 서게 되면 여타의 과제는 자연히 그 속에 다 있다는 말씀이라고 이해됩니다. 그 점은 동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국의 민중을 구체적인 역사적 실체로서 파악하고자할 때는 외세의 지배수탈을 받아 온 '민족'이라는 또 하나의 범주를 통하지 않고는 민중의 바른 실체가 붙잡히지 않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내가 그 문제를 맨 처음 표현한 것이 1975년에 했던 '민중민족교회'라는 강연에서였죠. 그강연의 요지는, "우리 역사에서 '민족'은 있었어도 '민중'은 없었다. 그러나 정말 실재하는 것은 민중이고 민족이란 대외관계에서 형성된 상대적 개념에 불과하다. 그런데 언제나 내세운 것은 민족이고 민족의 실체인 민중은 언제나 민족을 위하느니 나라를 위하느니 하는 미명 아래 억압과 수탈을 당하는 체로 방치되어왔다. 그런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제는 민족이라는 구호 밑에 깔린 민중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대체로 이런 것이었어요. 우리가 지금 민중이라는 것을 주장할 때,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라면 남북동서 구별 없이 산업사회이기만 하면 어디에나 있어요. 그러나 민중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민중'이라 할 때 세계의 민중 뭐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린 지금 한국의 민중을 얘기해요. 그러니까 지금 새삼스럽게 '민족'이란 말을 쓰지 않으면 민중의 실체가 파악 안 되지 않느냐, 그렇게는 생각 안 해요.

▶ 허울뿐인 민족주의가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자주 이용되어왔고, '민족'이란 이름 밑에 억압과 수탈을 직접 당하고 있는 민중이 은폐되어 온 데 대한 고발이라는 의미에서 선생님의 논지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1970년대와는 달리 최근에 와서는 외세로부터의 자주라는 의미에서 참된 의미의 민족주의가 강조되고 있고, 외세로부터의 자주가 실현되지 않는 한 민중이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하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고 보여요. 민중적 과제는 민족적 과제와 중첩되어 있고 양자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같은 말입니다. 외세에 의한 수탈도 당하는 건 민중이지, 상층부가 당하는 것은 아니지요. 민중이 주인만 되면 그런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거지요. 나는 그 점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아요.

▶ 최근에 그리스도교 청년학생들 가운데서는 현실안식의 도구로서 사회과학을 수용하는 문제,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폭력의 사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등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요. 폭력의 문제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좀 들려주시지요.

나는 '원칙적으로'라는 한정사를 붙여서 말한다면 '비폭력'이 옳다고 봐요. 그런데 폭력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보고 비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본다, 이런 경계선을 아무리 설정해봐야 그것이 현실 속에서는 무의미할 수 있어요. 원칙적으로 방향설정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어도 구체적인 상황에서 행동에 직면해서는 폭력이냐, 바폭력이냐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무력해질 때가 있다고 봐요. 폭력, 비폭력은 형이상학적으로 고정된 것도 아니고, 내가 혼자서 주관적으로 선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상대방이 존재하는 관계에서, 그때의 상황과 상대방의 행동방식에 대응하여 규정되는 상황적 개념이 아닐까 생각해요. 가령 우리가 어떤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해 전략을 세운다고 가정할 때, 반드시 그리스도교적인 전략이 따로 있고 비그리스도교적인 전략이 따로 있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목적과 수단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은 원칙으로는 옳은 얘기지요. 그러나 폭력이건 바폭력이건 어느 한쪽에 고정되는 것은 성서적인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들은 흔히 '폭력 =비(非)성서, 비폭력 =성서'라고 생각합니다만, 분명한 건 비폭력도 성서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편에서 전쟁을 하는 신으로 묘사되고 있어요. 교회사의 전통에서도 '거룩한 전쟁'이라고 해서 신앙의 이름아래 무수한 전쟁을 치렀지요. 이렇게 말할 때 사람들은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을 근거로 들어서 비폭력을 주장하곤하는데, 거기서도 폭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문제예요.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말한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인데, 이것은 단순히 '싸움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평화를 깨뜨리고 저해하는 세력들과의 대결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나간다고 하는 지극히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원래 폭력이란 언어는 강자의 것입니다. 약자는 폭력이란 언어를 몰라요. 역사적으로도 언제나 강자가 폭력을 썼고, 그러면서도 약자에게는 폭력을 금기(禁忌)로 알도록 해 왔지요. 약자의 경우, 정당방위라는 말을 쓸 것까지도 없어요. 당하다, 당하다 어쩔 수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나오는 것이 약자의 폭력이라면 폭력이지요. 그러나 그 경우는 폭력이란 이름이 맞지 않아요.

나는 폭력문제에서 두 가지 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주 냉철하게 생각해서 폭력적 수단을 쓰는 것이 '효과가 있느냐', 즉 '승산이 있느냐' 하는 전략적인 면이 한 가지이고, 또 하나는 도덕적인 면,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고 봐요. 전략으로 말할 때는 과학적으로 따져봐야지요. 가령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퇴트(Tödt)라는 내 친구 신학자가 있는데 그가 1960년대의 유럽의 학생운동(Student Power Movement)을 평가정리하는 논문에서, 그 당시 폭력을 쓰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했다면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텐데 폭력을 썼기 때문에 관료적인 체제가 더 강력해져서 얻을 수 있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하는 분석을 해서 상당한 호응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목적이 도덕적일 때, 전략적으로 봐서 어떠한 수단이 더 효과적이고, 승산이 있는 수단이냐를 따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나는 아직 한국에 폭력의 문제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는 생각 안 해요.

▶ 분단극복과 통일을 지향하면서 신학이 담지해야 할 과제라고나 할까요, 그런 것에 대해 선생님께서 평소에 생각하신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왜 없겠습니까? 밤낮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지요. 민중신학이란 것도 분단상황이 아니었으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한국신학연구소를 만들 때, 그 첫번째 설립목적이 '분단극복의 과제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하는 문제의식에 있었어요. 그때는 신학이 이데올로기 문제에 무관심했고, 그래서 우선 그 문제에 국한했지요.

얼마 전에 한국기독교장로회교단의 '평화와 통일 위원회'에서 모임을 열었을 때 가보니까 통일원 사람이 와서 '북한의 사정'이라는 발제를 하는데, 북한은 절대로 자기네의 이데올로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도 양보 안한다고 전제를 해요. 그래서 내가, "그러면 어떻게할 건가?" 하고 물었더니, "양쪽을 서로 인정하면서 통일 헌법을 만들고 서서히 서로 접근한다" 그런 소리를 하고 있어요. 절대로 양보 안한다면서 통일헌법을 어떻게 만든다는 건지, 그거 우스운 얘기 아닙니까? 저쪽은 '공산주의 고수하겠다' 하고 이쪽은 '자본주의 양보 안 하겠다' 하고, 그러면서 어떻게 접근이 될 수 있겠어요? 접근을 하려면 서로 양보를 해서 제 3의 길을 찾아야지요.

우리가 '민중'을 말하는 것도 분단시대를 사는 민족적 영원이 그런 언어로 표현됐다고 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분단상황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까? 거기에서 민중신학이 나은 것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본주의체제를 승인하지도 않아요.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뭔가?' 하는 것을 찾는 과정에서 '민중'이라는 말이 떠오른 것입니다. 자본주의체제 아래 눌리고 빼앗긴 민중의 힘을 살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이름 아래 일부 엘리트들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민중의 힘이 되살아나서, 즉 남북 민중의 힘이 하나로 규합 될 때, 이 민중이 주체가 되어서 민족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모든 염원이 한데 응결되어 표출된 언어가 '민중'입니다. 나는 실제로 이것 아니고서는 민족통일민족해방의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두 체제 사이에 나는 엄밀하게 민중의 자리가 있다고 믿어요.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세력이 들어와도 거기에 흡수되어 자기의 생각을 바꾸지 않은 '층'이 있습니다. 외부문화의 영향을 안 받았으면 안 받은 만큼 순수한 층이지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받은 만큼 바깥물이 들었는데 그것은 이북이나 이남이나 마찬가지예요. 나는 공산세력도 있고, 자본주의세력도 있고 그리고 그 두 세력 외에 우리 민족의 정말 주체세력이 있다는 전제 밑에서 '민중'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민중을 우리가 규명해보자는 것이지요. 민중은 민중신학이 발견한 언어가 아니고, 또 우연히 나은 것도 아니고, 한국의 분단상황에서 특수한 의미를 가지고 성립된 언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민중신학도 민족통일을 지향하기 위해서 탄생한 신학이고, 이 신학의 종당의 목적도 민족통일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말씀을 듣는 중에 시간이 어지간히 흘렀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앞으로의 삶의 과제로 생각하고 계신 것을 좀 소개해 주십시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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