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한국 교회에서 성서를 어떻게 읽고 이해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오래 전에 썼던 「한국교회의 예수이해」라는 글에서 살펴본 적이 있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한국 교회에는 '성서'에 앞서서 '교리'가 전제되어 있어요. 구체적으로 말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있는 교리를 전제하고 이 교리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성서를 읽는 자세지요. 그러니까 텍스트(text)는 신앙고백서이고 성서 자체는 레퍼렌츠(Referenz)인 셈이지요. 이럴 때 성서는 이미 아는 것을 재확인하는 도구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래서 놀라울 정도로 교리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절대 군림하고 성서마저도 거기에 종속되어버렸어요. 그 결과로 어떤 위험이 있느냐 하면, '성서만'을 강조하면서도 실은 성서의 권위를 빌려 어떤 특정한 교리를 정당화할 수 있게 '성서'를 한갓 편리한 도구로 이용하는 거지요.

그래서 나는 '여기에 바로 여러 종파가 난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재해 있구나!' 하는 판단을 내렸어요. 일단 어떤 교리체계에만 승복하면 거기에 맞도록 성서를 얼마든지 이리저리 뜯어맞출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되면, 놀랍게도 성서지상주의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성서는 버림받고 무시당하고 맙니다.

흔히 말하는 '보수'(保守)라는 것은 정통성을 지키자는 것인데, 여기서 '정통을 보수한다'는 것은 '우리 편 교리가 이겼다'는 말이 고, '이긴 것을 끝끝내 지키겠다'는 정열, 고집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서 읽는 태도에서 특징적인 것은 소위 독경(讀經)의 방식입니다.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암송하는 겁니다. 유교나 불교에서처럼 해석하는 자의 주체의식이 전혀 없이, "백 번만 읽어라. 그러면 저절로 깨찬다"(讀書百遍, 意自通)는 식이지요. 나도 어렸을 때 논어를 무조건 읽고 외우도록 강요받았어요. 계속 반복해서 읽으면 깨달음이나 구원이 온다는 생각인데, 깨달음보다는 독경 행위 그 자체가 오히려 더 중요시됩니다. 그 전통이 한국인의 성서 읽는 태도에 상당히 영향을 끼쳐왔어요. 그래서 성서는 '무조건 읽어야 한다', '비판 없이 읽어야 한다', '읽으면 은혜로운 거다' 이런 생각이 지배해왔어요.

한국 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초기 선교사들의 가르침에서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국에 처음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은 주로 근본주의자들이었고, 그들은 물론 당시에 역사비판학 같은 성서해석학을 아직 소화도 못했겠지만, 그들이 무엇보다 먼저 생각한 것은 선교전략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예민하게 관심한 것은 '어떻게 하면 국가권력과 충돌하지 않고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느냐'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의 대전제는 정교분리(政敎分離)였지요. 구한말 때부터 나라에 충성하고 무조건 권력에 복종하라고 가르쳤고, 신앙은 정치나 사회문제 일반에는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되도록 간단하게 간추려 교리화해서 가르쳤고, 또 그런 교리에 맞게 성서를 풀이했어요. 이것은 교리의 재확인이지 성서해석은 사실상 금기시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31봉기에서 드러났습니다. 성서에 대한 교리적 암송에는 승복했어도 가령 정교분리나, 사회문제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에는 내심으로 승복하지 않았다는 것이 노출된 거지요.

다음으로 한국 교회의 성서이해에 크게 영향을 준 것으로 부흥운동을 들 수 있습니다. 31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한국 교회는 내면적, 영적 운동의 방향으로 깊이 빠져들어갔는데, 전국적으로 사경회(査經會)운동이 크게 일어나서 어디서나 '성서!' '성서!' 하고 있었지만 부흥사들의 설교내용을 들어보면 성서는 거의 아무 역할도 안했어요. 나도 그런 집회에 많이 참석해봐서 기억을 하고 있는데, 부흥사들은 몇 가지 교리적 골격만을 놓고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 소리를 하고 쇼맨십(showmanship)을 발휘했어요. 내용으로는 거의 유교적 윤리를 반복했고, 이때의 '파토스'(pathos)는 샤머니즘적인 것이었어요. 거기서 이원론이 물론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정교 분리를 말하거나 굴욕적인 윤리를 말하거나 간에 다 그 바탕에는 이원론이 깔려 있었어요.

한국 교회의 성서이해를 지배한 것으로는 소위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Verbal Inspiratio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서는 일자일획이 다 하느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니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축자영감설은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과도 직결되는데, 이것은 한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가톨릭 교회에서 시작된 것으로, 지도층이 지니고 있는 무서운 교권의 방망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였죠. 교회를 대표한 법황은 성서해석권을 독점하고 일반에게는 성서해석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교회지도층은 성서를 해석할 때 성서 자체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됐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물론 성서의 권위를 지키자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성서해석자의 권위를 지키자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영감(靈感)이란 말은 성서해석권을 가진 사람이 그 영감에 의해서 해석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석하든 거기에 따라야하고, 거기엔 아무런 비판도 허락되지 않았어요. 어쨌든 한국에서는 성서무오설을 진일보시켜서 축자영감설에까지 나갔어요. 성서에 씌어 있는 것은 일점일획까지 성령의 지시로 된 것이니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은 교파마다 제 나름의 교리를 앞세워 거기에 맞추어 성서를 제멋대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성서에 대한 무지(無知)가 한국 교회를 지배했습니다. 예컨대 한국 교회는 성서의 기준을 바울로에게 두고 바울로가 쓴 갈라디아서, 로마서를 성서의 골격으로 삼아 공관복음서마저 그 눈을 통해 읽으라고 했어요. 그리고 교리적으로 형성된 그리스도론을 복음서를 통해 재확인했을 뿐 그 이상 더 깊이 들어가려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공관서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봐도 문제가 생기죠. 공관서를 비교해보면 서로 맞지 않는 점이 쉽게 눈에 띄는데, 이것을 들추어내면 심각한 문제가 생기니까 아예 뚜껑을 덮어두어야 하고, 그래서 특별히 축자영감설을 더 강조하게 되었지요.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오경에 특히 문제가 많은데, 자료설(資料說, 모세의 저작으로 알려진 오경은 사실은 모세가 쓴 책이 아니라 P, E, J, D 등 여러 전승(傳承)의 문서들을 후대에 편집한 것이며 그 각 문서에는 서로 다른 내용과 사상이 담겨 있다는 학설)을 인정하면 안 되니까 축자영감설을 내세웠죠. 여기서 거듭 강조해야 할 것은 축자영감설 자체가 해석자의 해석권을 지키지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가톨릭에서는 법황이 해석권을 가졌다면, 개신교에서는 교파마다 교단에서 만든 교리가 해석권을 가진 셈이죠. 또 교파가 갈라져 분파가 생기면 그 분파의 교조가 만들어낸 교리가 법황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장로교가 교권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 비로소 반기를 든 것이 장공(長空) 김재준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특별히 새로운 것을 본 것은 아니고 교권에 대해 좀 자유로워지니까 다른 것이 눈에 띄었던 것입니다. 가령 한경직, 송창근 같은 분들도 김재준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가서 공부했는데, 갔다 와서 주류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벌써 교권의 포로가 돼버렸고, 주류에는 못 들어가고 주변에서 돌았던 김재준 목사는 자유로운 입장에서 바른말을 할 수 있었지요. 사람이란 다 한계를 지닌 존재라서 그가 놓여 있는 처지에 따라 보는 눈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김재준 목사는 유학에서 돌아와 상업학교 교목으로 잠깐 있다가 간도로 거의 쫓겨가다시피 했어요. 그러니까 교권에서 푸대접 받고 그야말로 변두리로 밀려난 것이지요. 이것이 그로 하여금 바른말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재준 목사는 '성서해석의 자유'를 부르짖었다기보다는 '학문의 자유'를 부르짖었는데, 이것은 바로 교권으로부터의 자유물 주장한 겁니다. 모세오경이 모세에 의해 씌어지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지요. 모세오경에 모세가 죽었다는 얘기, 장례지내는 얘기까지 다 나오는데 그걸 모세가 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거든요. 그 정도는 누구라도 말할 수 있었는데 감히 어느 누구도 아무 말 못했어요. 왜? 몰라서가 아니라 주류에서 떠나면 안 되기 때문이었지요.

▶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시대까지는 '교권'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물리적인 힘으로서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장로교의 경우처럼 개교회가 어느 정도 자치적인 독립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해석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종래의 성서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다만 교권 때문만이 아닌 어떤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역시 교권 때문입니다. 교권에 눌려 있었기에 교권이 가르치는 교리를 넘어서 성서 자체를 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성서는 남의 얘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이기 때문에 해석하는 우리의 선 자리에 진실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성서를 읽기 전에 교리를 믿고 읽으라"는 교권에 눌려서 아무리 성서를 읽어도 교리만을 찾아 내게 됐고, 그런 의미에서 대답은 이미 얻었으나 성서를 읽는 것은 교리를 재확인하는 이상의 의미가 없었습니다.

'교리'란 성서에서 추려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추려내는 입장은 그 시대의 것이며 여러 다른 동기가 얽혀 있습니다. 우리가 왜 그런 교리에 예속돼야 합니까? 성서는 주로 이야기로 꾸며져 있으며 그 성립과정은 천 년이 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교조화하여 영구한 교본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교권을 넘어서 성서를 직접 마주했다면 그 내용이 교리와 얼마나 다른지는 벌써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 무엇보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서 속의 민중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까닭은 성서의 중심이 민중사건이었고 우리의 선 자리가 민중의 현장이었으니까요!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