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학문의 방법문제는 서구라파에서 발전해 온 학문의 전개과정과도 관계가 있고, 또 뭐라고 할까요, 인간의 자기이해라고 할까,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라 할까, 그런 것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보통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방법론 자체가 지닌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앞으로도 계속 토론해야 하는 주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에 남미 해방신학이나 북미 흑인신학에서는 성서해석학의 일대 전환을 시도했고 그 방법론적 특징의 하나는 컨텍스트(context)로부터 텍스트(text)로 해석해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방법의 해석학적 공헌과 또 그 문제점은 무엇인지, 여기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그 문제와 관련되는 건데, 주변 얘기를 좀하지요. 내가 독일에 있을 때 일찍이 퇴트(그리스도교 사회윤리학자)와 만났고 또 브라켈만(그리스도교 사회윤리학자)과도 만났습니다. 그후에 몰트만과도 서로 친하게 지냈어요. 몰트만은 조직신학자지요. 퇴트와 몰트만은 해석학적 입장이 아주 대조적이어서 툭하면서로 상대방을 비난했어요. 퇴트는 말하기를 자기가 '텍스트에서 컨텍스트로'라는 방법으로 해보려니까 컨텍스트에 비해서 텍스트가 너무 좁아서 안 되더라는 거예요. 그래 도저히 안 되겠어서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 오기 위해 전공을 성서학에서 사회윤리로 바꿨다는 거예요. 그는 보른캄 밑에서 「인자연구」(人子硏究)로 학위까지 받았는데, 그 책은 중요하게 평가되는 책입니다. 이렇게 당당한 신약성서학자였던 그가 해석학상의 애로 때문에 전공을 바꾸기까지 했단 말예요. 브라켈만의 생각도 퇴트와 같았어요. 그런데 몰트만은 말하기를, 퇴트와 브라켈만은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 온다고 말은 하지만 언제 그들이 텍스트로 돌아온 적이 있느냐, 와본 일이 없다고 해요. 컨텍스트에 머물고 말지 텍스트로 못 온다는 겁니다. 한편 퇴트는 몰트만을 평하여 "몰트만의 텍스트는 도그마입니다. 왜 그 조직신학의 도그마 계보 있잖아요. 그는 그 틀에 갇혀 있기 때문에 절대로 컨텍스트로 못 내려와요"라고 빈정댑니다. 얼마 전에 몰트만이 한국에 왔을 때도 그 말을 반복해요. 언제 그 사람이 텍스트로 올라와봤느냐고 마구 열을 내면서 그래요. 그래 내가 말해췄지요. "그 사람들은 너보고 너는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어서 컨텍스트(현장)에 절대로 못 내려온다고 그러더라. 실제로 나도 네게서 그걸 느낀다. 네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마치 발이 가려운데 구두 위를 긁는 것 같단 말이야."

이 싸움은 비단 해방신학이나 흑인신학의 문제만은 아니고, 벌써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문제예요. 고대에서 중세기까지는 소위 알레고리적 해석방법(Allegorical Interpretation)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 않아요? 알레고리적 방법은 일종의 상징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박해시대에는 참 유용한 해석방법이었어요. 그러나 이 방법은 나중에 교회가 교권을 장악하고 성서해석권을 독점했을 때에는 신부가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든간에 "이것은 알레고리적 해석이다. 영적 의미를 얘기한 것이다. 너는 그걸 모른다"고 하면서 평신도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이미 자신의 대답을 가지고 성서를 말하기 위해 상징언어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에 와서 '오직 성서만'(Sola Scriptura)이 강조되면서 누구나 글자를 읽을 줄 알면 성서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알레고리적 방법을 완전히 거부했어요. 문자만 해독하면 누구나 성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교권으로부터 해방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어요. 그는 누구나 성서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지 특정인이 해석권을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성서는 문자 자체가 자명적으로 알게 되어 있다" 고하는데 이게 사실인가하는 거예요. 그건 사실이 아니지요. 우리는 빈 마음으로 성서를 읽고 성서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생각 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구원론이면 구원론, 그리스도론이면 그리스도론의 대전제를 가지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성서를 해석하게 됩니다. 성서를 경전(經典)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내가 먼저 가지고 있는 교리적 전제가 경전의 역할을 하고 성서는 그것에 의해 취사선택되고 해석되는 것이 현실이지요. 여기서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라는 말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어요.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론은 성서 밖에서, 즉 교리라든가 교회 분위기에서 받은 것이니까 일단 성서와의 관계에서 보면 텍스트가 아닌 컨텍스트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 컨텍스트를 성서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끄집어낼 뿐인데, 그것을 성서의 말이라고 착각하여 텍스트라고 잘못 보는 거예요. 한걸음 더 나가서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 이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알레고리적 해석도 그랬고 루터도 그랬다. 그들도 교회라는 컨텍스트(소위 Sitz im Leben), 교리라는 컨텍스트에서 출발해서 그 눈을 가지고 성서 텍스트로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내가 말하는 그리스도론, 내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텍스트에서 받은 거다. 그러므로 텍스트에서 컨텍스트로 가는 거다." 이렇게 되면 이현령비현령식이 되어버려요.

어떤 사람들은 텍스트와 컨텍스트 문제와 관련하여 나와 서남동 목사의 차이를 말하기도 하더군요. 서 목사는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 가는 사람'이라면 나는 '텍스트에서 컨텍스트로 가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최근에 독일 신학자들이 민중신학에 대한 질문서를 보내 왔는데 거기에서도 서 목사와 나를 비교하면서 같은 얘기를 했더군요. 서 목사님이 살아 계실 때, 우리는 당분간 서로 차이를 말하지 말자고 약속했었지요. 지금은 우리가 차이점을 말하기보다는 일치점을 말해서 작은 힘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이제 와서는 좀더 일찍 서로의 차이를 토론해서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밝힐 것은 밝혀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절실해요.

송기득 교수가 최근 서남동 목사의 민중신학에 관한 글을 한신대학 학보에 썼더군요. 거기에 보니까, "민중신학의 대상은 예수가 아니라 민중이다"라는 말을 했더군요. 만일 서 목사가 그랬다면 이것은 나와 다른 점이지요. 송기득 교수는 전에서 목사와 나를 비교하여 말하기를, 두 분이 똑같이 민중신학을 하지만 나는 민중신학 즉 신학에 악센트가 있고, 서 목사는 민중신학 즉 민중에 악센트가 있다고 했어요. 언젠가 어느 모임에서 서 목사는 '우리'가 텍스트지 왜 성서가 텍스트냐, 즉 우리 자신이 텍스트이고 성서는 오히려 컨텍스트라 했어요. 이 점에 대한 나의 입장을 이제는 좀 얘기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지금 나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느냐 하면, 역사비판학적 전통을 지닌 서구의 신학을 전제로하고 작업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고 거기에서 튀어나오기 위해서라도 일단 성서에 집중하고 있어요. 서 목사는 애당초 성서가 아닌 다른 데서 출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 목사가 설화나 민담을 분석할 때 성서 텍스트와 무관하게 오로지 설화나 민담 그 자체만을 가지고 분석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성서는 한마디도 인용 안 해도 그의 시각은 이미 성서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어요. 즉, 민중을 보는 그의 눈의 밑바닥에는 성서 텍스트가 깔려 있고 그것이 작용을 하고 있어요. 반대로 서 목사 자신도 안병무가 성서를 보는 것이 우리의 컨텍스트하고 유리된 것이라고는 보지 않아요. 내가 성서를 읽을 때에도 어디까지나 우리의 컨텍스트가 먼저이고 그 눈으로 텍스트를 보고 있다는 거지요. 이걸 서 목사는 알고 있었어요. 물음이 대답을 결정하는 것이라 할 때, 묻는 자의 입장이 성서를 읽는 눈을 제약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민중신학에서 중요하게 얘기하는 것은, "이건 책상에서 나온 신학이 아니다. 현장에서 나온 신학이다"라는 것이에요. 이걸 전제한다면 나의 신학에 대해서 '텍스트에서 컨텍스트로'라는 말을 써도 무방하겠지요. 설사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라는 입장을 취한다 해도, "컨텍스트가 왜 그렇게 보였느냐?" 하고 물어볼 때는 난 텍스트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내 결론은 컨텍스트와 텍스트를 둘로 갈라놓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어떻게 컨텍스트와 텍스트를 갈라놓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 속해 있으면 역사를 객관화할 수 없듯이, 내가 나의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를 읽을 때에도 컨텍스트나 텍스트를 객관화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 양자를 분리시켜놓고 서로 대립시키는 것, 그리고 그 별개의 둘을 제3의 어떤 것에 의해 다리를 놓아 접촉시키겠다는 사고는 불트만에게서 볼 수 있어요. 그가 쓴 논문집―『접촉과 모순』(Anknüpfung und Widerspruch)―에서 그는 "다른 것과 성서 사이에 마찰되는 것이 없는가 또는 서로 연계되고 접촉되는 것이 없는가?"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이런 질문 자체를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 자신의 경험에서 보면 텍스트와 컨텍스트는 분리되지 않아요. 그 양자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입니다. 그 둘을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은 억지고 인위적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래서 나는 컨텍스트와 텍스트를 갈라놓는 주객도식(主客圖式)에는 반대합니다.

언젠가 스위스의 신학자 부리(Buri)가 한국에 와서 나를 찾아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어요. 그는 자기가 한국이나 일본을 왜 돌아다니느냐 하면 서구에서는 주객도식을 극복할 길이 없어서 동양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왔다는 거예요.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줬습니다.

"우리는 주체, 객체가 너희같이 그렇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서양의 영향을 받은 후부터 그렇게 되었지 그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학'(學)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객관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동양은 그런 것 모른다. 우리는 텍스트, 컨텍스트의 구별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나'와 '너'는 엄격히 구별되어 있지 않다. '나 '와 '너'보다는 '우리'가 더 중요하다. 우리의 가족제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우리에게는 '우리'가 중요하다. 일상 언어에서도 주체나 객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동사가 중요하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저 '사랑해'라고 말한다. 그러면 알아듣는다. '나는 이 집에서 나와서 나의 집으로 간다.' 독일어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우리는 그저 '갑니다' 하면 된다. 우리는 주어와 목적어를 분명히 밝히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의 영향을 받고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컨텍스트와 텍스트를 둘로 갈라놓고 '어디에서, 어디로'라는 것을 고민하는 것은 서구인의 고민이지 우리의 고민은 아니다."

▶ 선생님께서는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분리시키는 입장을 주객도식이라고 비판하시면서 동양인의 사유방식과 대비시키셨는데,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성서 그 자체가 순수하게 텍스트가 아니라 컨텍스트와 텍스트가 미분화된 상태랄까, 혼융일체(混融一體)로 하나가 된 상태랄까 그런 것이 아닐까요? 예컨대 예수의 행태 그 자체도 상황과 말씀이 구분되지 않고, 선생님 자신의 용어로 말한다면 '사건' 그 자체이지 말씀 따로 상황 따로가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또 구약성서를 보더라도 역사와 계약법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 그 자체만 두고 보더라도 '컨텍스트와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텍스트'를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그걸 구분하는 것 자체가 텍스트 자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라는 방법은 새롭게 주목하고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텍스트에서 컨텍스트로'라는 입장이 소위 정통적인 것으로 고수되어오다가 근세에 와서 근대적 학문의 도움을 받아 컨텍스트에 눈을 뜨게 되고 성서 텍스트 자체에도 컨텍스트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지요. 여기서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의 방법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성서해석 방법에 대해 일종의 우상파괴적인 역할을 한 셈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그 방법이 성서를 새롭게 읽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의 경우를 보면 아직도 '텍스트에서 컨텍스트로'라는 것이 정통으로서 권위를 갖고 주장되고 있지 않습니까? 선생님,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한국 교회에서는 아직도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는 성서해석의 새로운 눈이고, 이것은 또한 계몽적이고 우상파괴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아직도 많이 강조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한 가지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서구 신학에서도 텍스트와 컨텍스트 문제를 이미 말했다고는 하지만, 서구 신학에서 말하는 컨텍스트와 제3세계에서 말하는 컨텍스트는 성격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우에는 그저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라고 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 컨텍스트의 성격이 무엇이냐?' '그것이 누구의 삶의 장이냐?' '예수가 어느 장에서 살았느냐?' '사건이 어느 장에서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컨텍스트에서 텍스트로'라는 방법은 과거 서구 신학에서 이미 다뤄졌다던 것과는 별도로 우리로서는 우리의 교회상황에서 새삼스럽게 제기해야 할 과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요. 제3세계 성서해석 방법은 서구 신학자들의 논의와는 질적으로 다롭니다. 따라서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의 성서해석 방법은 서구 신학의 '텍스트―컨텍스트' 도식에 다 수용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지요.

민중신학이 '책상' 위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는 말은 그 출발 동기가 '현장'이라는 말입니다. 그 현장은 종교적인 현장도 아니고 교회 안도 아닙니다.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컨텍스트는 민중의 생활현장입니다. 전에 신학사상 심포지엄에서 정진홍 교수가 민중신학은 파토스(pathos)가 강하다고 했는데, 그건 당연합니다. 민중신학은 파토스입니다. 결코 객관적인 학문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투쟁입니다. 역사현장에서 무엇을 극복하자는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파토스적인 성격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요.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컨텍스트하고 서구 신학에서 전에도 텍스트, 컨텍스트란 말을 썼다고 하는 것하고는 내용이 달라요. 그리고 또 서남동 목사님은 두 이야기의 합류라는 언어를 쓰면서 한국 역사의 민중전통과 성서의 민중전통의 만남을 말하는데, 나는 민중사건을 새삼스럽게 텍스트로 끌어오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미 그 안에 성서의 사실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걸 증언하면 되지 구태여 텍스트와 만나게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