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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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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 선생님께서 민중의 생활현장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 자체를 그리스도 사건으로 보시는 그 점이 아주 새롭고 급진적인 관점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그러므로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혹은 사건과 전승자가 분리되지 않는 것이군요.

그래요. 분리가 안 된다는 얘기예요. 예를 들어 마르코복음이 유다 전쟁 전에 쓰인 것이냐, 후에 쓰인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나는 오클로스의 등장이 유다 전쟁이 이미 일어나 팔레스틴 민중들이 이방으로 배회하는 현장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어요. 따라서 예수의 민중의 현장과 복음서를 쓰고 있는 사람의 현장이 유리가 안 됐다는 거지요. 즉 마르코는 지금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울면서 쓰고 있는데 그것이 동시에 예수의 이야기다 그거예요. 그 현장이 아니었으면 예수에 대해서 그렇게 못 썼을 것이다 그거지요. 마르코 자신의 현장이 예수의 현장을 똑바로 보게 했던 겁니다. 우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오늘의 현장이 텍스트의 그 현장을 보게 만든 겁니다. 이것 없으면 저것이 안 보이는 거지요.

▶ 그럼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요? 예수의 현장과 오늘 민중의 현장을 일치시킨다는…….

나는 '일치시킨다'는 그런 말조차 쓰고 싶지 않아요.나는 민중신학을 하면서 주로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지만, 어떤 사건을 보고 있으면 새삼스럽게 성서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사건에 대해 생각을 하고 그걸 글로 쓰면 그게 바로 예수사건에 대한 글이 돼요. 그 사건과 예수를 연결시키자, 접합시키자는 의식이 그 당장에는 없어요. 나중에 학문적으로 작업을 하게 될 때는 그 둘을 이론적으로 만나게 할 수밖에 없겠지만요.

▶ '민중사건의 얘기가 바로 예수의 얘기다'라는 입장에 서면 성서의 '정경성'(正經性)이라는 것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요?

'성서만이 캐논(canon)인가' 하는 문제이지요? 전에 서남동 목사가 한창 라디칼해졌을 때 강조했던 것이 바로 그 문제였어요. "경전화된 것이 문제라고, 왜 성서만이 캐논이겠느냐?" 이걸 문제삼았거든요. 그분은 제가 밤낮 성서로 돌아간다고 불만이 있었지요. 그 분은 성서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도 막 하거든요. 그와 비교하면 나는 성서주의자, 캐논주의자처럼 보이기 쉽지요. 이 문제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을 말해보죠. '소위 캐논이라는 것, 지금 가지고 있는 신구 약성서 66권, 이것만이 진리냐? 이것만이 진리의 기준이냐?' 우선 내용은 제쳐두고 외형적 권위문제만 하더라도 역사비판학적 분석을 하다보면 권위가 다 깨지지 않아요? 다음에는 내적 권위가 문제가 되는데요. 성서 66권의 정경성은 교권을 인정할 때는 성립되지만, 나는 교권을 인정 안 하기 때문에 캐논이라는 것 자체를 인정 안 해요. 캐논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캐논이 된 것이 아니라 교권에 의해서 한계가 그어져서 66권만이 캐논이 된 거예요. 캐논이 현재의 형태로 결정되기까지는 오랜 과정을 거쳤지요. 결정타를 가한 것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였습니다. 교황 다마수스(Damasus I)에 의해서 27권 외에는 가하지도 감하지도 못하게 금이 그어진 것이지요. 예를 들면 시리아 교회는 아직도 22권만을 정경으로하고 있고, 에집트 교회는 38권이던가요?신약성서 27권을 정경으로 한 것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 국한된 얘기란 말이지요. 그렇게 결정되기까지 히브리서 같은 것은 밤낮 수난당했고, 야고보서의 정경성이 계속 문제시됐으며, 묵시록도 그랬고, 요한 2, 3서도 계속 말썽이었지요. 그 밖에도 베드로후서, 디도서, 필레몬서 등등…… 하여간 복잡한 과정을 거치다가 교권에 의해서 종지부가 찍혔지만. 나중에 루터가 교권에 도전하면서 다시 요한묵시록을 빼버렸죠. 야고보서는 그대로 두 긴했으나 내용상으로 봐서는 성서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리스도인들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캐논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이와 같은 거예요.

서남동 목사와 나의 경우는 교권이라는 걸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캐논이라는 개념을 인정 안 해요. 내게는 성서의 외적 권위는 중요하지 않아요. 단, 성서라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인정해줄 게 있는데 그 자체가 내용상으로 중요하든 아니든 캐논이라는 것이 성립돼서 그것을 중심으로 전개된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걸 존중해야지요. 그 역사를 무(無)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캐논의 외적 권위를 깨는 데는 역사비판학이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에요. 그러나 역사비판학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성서 자체의 본래의 뜻이 은폐되거나 왜곡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민중신학은 그것까지를 하고 있어요. 민중신학은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읽죠. 이 말은 성서에 의해서 성서를 비판한다는 루터의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성서의 본질은 성서의 민중사건에 있어요. 그것이 하나의 맥을 이루어 신구약성서를 관통하고 있어요. 바로 이 맥에서 성서를 봤을 때 이제까지 각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가려졌던 것들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죠. 서양 사람들이 아직도 못 보고 있는 이것, 성서의 민중적 본질이 한국의 민중신학에서는 밝게 보인다는 말이에요. 이것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에요. 나는 민중신학이 한국의 신학이 됐다는 건 하느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자주드는데, 그건 민중의 관점이 어쩌면 그렇게도 성서와 잘 맞아떨어지는지 놀랍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우리가 한국의 민중현장에서 얻은 선물이지요. 이것 가지고 보면 성서가 확 뚫린단 말이에요. 성서와 우리 현장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헐리고 눈 앞이 활짝 열리는 느낌이 든단 말예요. 아직도 나 자신의 현실과 성서의 민중현실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그래서 내겐 아픔이 있지만 그러나 이제는 예전에 아깝던 것이 깨져나가도 하나도 무서운 생각이 안 들게 되었어요.

▶ 정경문제와 관련해서 이런 질문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서남동 목사님께서는 '전거(典據)로서의 성서'라는 말씀을 하셨는 데, 그 문제에 대한 선생님의 입장과 어떤 점이 다른지요?

네, 그건 말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어요. 서남동 목사님이 '전거로서의 성서'를 말할 때 그분에게는 전거로서 들 수 있는 것이 성서 뿐이라는 뜻이 아니지요. 성서와 함께 한국민중사, 교회사 이런 것들도 그분은 전거로 취급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의 '전거'는 성서뿐이에요. 나는 어느 경우에나 성서의 동의를 꼭 구해요. 이것이 나의 입장이에요. 내가 한국 역사를 읽거나, 민중의 사건을 보거나, 한국 교회사를 볼 때 그 전거는 성서예요. 그래서 나는 민중론을 하지 않고 민중신학을 하는 사람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민중에 대해서 다른 방법으로 연구하거나 사색을 전개하는 데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아니에요. 민중신학이 아닌 민중론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그런 작업은 가능하고, 나도 그런 사람들과 같이 민중론을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신학자로서의 나는 성서의 전거에 의해서 신학적 공헌을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있지요. 그러나 가령 어떤 민중사실이 전거와 맞지 않을 경우 다른 전거에 의해 설명하려고 할지 몰라요. 그때는 나는 민중신학자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론자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에요. 내가 민중신학자인 것은 한국사이든, 교회사이든 성서를 전거로 해서 반성(reflection) 해서 동의하기 때문이에요. 그런 점에서 나와 서남동 목사의 차이는 분명해요.

▶ 그러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신학의 분과는 다양해서 가령 조직신학적으로 민중문제에 접근하거나 교회사적으로 접근하거나하는 접근방식이 얼마든지 가능한데요, 그럴 경우 그것은 민중신학이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조직신학을 하든, 교회사를 하든 그것이 신학인 한에서는 성서에서 새로운 눈이 떠져서 볼 때만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해요. 나는 조직신학하는 분이나 교회사하는 분을 볼 때마다, 저렇게 서구 사람들처럼 보아서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에요. 성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데…… 성서의 민중전승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 이런 극단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령 라틴아메리카의 세군도(J.L. Segundo) 같은 사람이 한 얘기인데요. 그는 "계시는 절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계시는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현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절대적 계시의 원천인 성서를 위해서는 그 양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면서 그 가교 역할을 해주는 것이 '이데올로기'라고 했어요. 이데올로기라는 수단이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구체적인 현실을 조명할 수 있고 현실의 정치적, 사회적 경험들을 반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런 주장에 대해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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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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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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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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