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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 이제 끝으로민중신학의 시각에서 성서의 핵심과 그 맥을 짚어 주시지요.

성서의 핵심은 '해방사건'이라고 봅니다. 그 동안 민중신학에서 가장 많이 언급했던 성서구절들이 바로 그 해방사건의 맥에 속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맨 처음부터 가장 우리의 주의를 끌었던 것은 루가복음 4장 18~19절입니다. 마르코는 예수의 선포의 핵심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1, 15)로 보았는데 루가는 바로 해방을 뜻한다고 본 것입니다. 18절의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눌린 자를 놓아주고"에서는 둘 다 aphesis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그것은 aphiemi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종을 '해방한다', 빚을 '면제해준다', 죄를 '사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결국 해방한다는 뜻이지요. 19절에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희년제도를 말한다는 것이 정론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바로 '해방의 해'라고 풀이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희년은 포로를 석방하고 종 된 자를 해방하고 뺏은 토지를 돌려줌으로써 잘못된 관계에서 풀려나는 해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다 알다시피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사실상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석방되어 잃었던 자기 땅으로 돌아와 새 나라를 세우는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서구절을 계속 반복했고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는 현장에서 인권투쟁의 깃발처럼 내세웠습니다.

이것을 핵으로하니까 자동적으로 성서의 출발은 엑소더스(Exodus)에 두게 됐습니다(그것이 해방신학에서도 채용되고 있다는 것은 후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엑소더스는 '히브리의 해방운동'이었다는 지식을 얻어냄으로써 그 의미는 더욱 중요하게 됐습니다. 히브리는 한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억눌린 계층의 이름이라고 보았을 때, 그 탈출의 뜻은 더욱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착취와 권력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사건이 바로 엑소더스입니다.

다음에 중요한 것은 가나안 종족동맹의 성격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의 해방사건의 다른 차원인데, 가나안 군주들에게 예속된 농노들 이 투쟁을 통해서 자율적 공동체를 수립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바로 절대권을 행사하는 군주들에 항거하여 연합전선을 폄으로써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군주를 거부한 공동체라는 것이 그 특성이었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바로 '야훼만'의 신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고대 이스라엘의 종족동맹체가 200년 동안 지속됐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의 본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고대 이스라엘이 변절됩니다. 그렇게 한 장본인은 바로 다윗입니다. 사울이 첫 왕이라고 하나 그는 아직 절대군주가 아니고 다윗에 와서 절대군주국의 기틀이 잡혔습니다. 그는 고대 이스라엘 전통의 적(敵)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합쳐버렸는데 유다는 원래 고대 부족동맹에 속하지 않던 나라입니다. 다윗은 이들을 합해 큰 이스라엘국을 형성했고,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위해 여부스족의 도성안 예루살렘을 빼앗아 사령(私領)으로하고 거기에 궁성을 세우고 그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해방의 상징인 법궤를 뺏어다 거기에 안치함으로써 야훼신을 일정한 장소와 한 왕권에 메인 이데올로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것이 그의 불륜의 아들 솔로몬에 와서 극에 이르는데 그는 '성전'을 궁성에 예속된 궁전 '채플'(chapel) 식으로 짓고 야훼를 거기에 감금한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종교귀족으로 사제계층이 등장합니다. 이 다윗왕조 기간에 다윗왕가의 어용 사가들에 의해 이스라엘의 전승자료가 크게 오염됐습니다. 다윗의 미화, 그와 야훼와의 계약, 나아가 마침내 메시아 사상도 이 다윗 가(家)와 예루살렘과 직결되기까지 했는데, 한마디로 반(反)민중적 폭거가 진행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까지 영향을 끼쳐 예수와 다윗 혈통을 이어보려고 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민중신학은 성서 안에 있는 이 복병과의 싸움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같은 싸움과 함께 바로 그러한 장에서 투쟁한 예언자들이 히브리의 맥을 이었다고 봅니다. 그 예언자들 중에는 왕권을 옹호하는 이도 있었고 전적으로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했던 것은, 저들이 이스라엘의 본뜻을 말할 때는 언제나 고대 이스라엘을 말했고 따라서 하느님의 주권 확립이라는 것을 일관해서 주장한 사실입니다. 저들은 불의한 권력과 싸우고 가난한 자에 대한 착취세력을 심판했습니다. 이들의 손에 의해서 다듬어진 법전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는 바로 다윗왕조 이래의 문제들을 역광적(逆光的)으로 해석한 고대의 민담(民譯)이라고 봅니다.

다음으로 민중신학은 성서에는 포함되지 않은 구약과 신약의 중간사(中間史)에 관심해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사를 분명히 알아야하고, 그 시대로부터 예수를 조명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이었습니다. '예수의 시대사'라는 강의도 계속했는데 그 노력의 특징은 정치사회경제사적 관심이 농후했다는 점입니다. 이를 통하여 갈릴래아라는 지방에 대한 관심과 예루살렘의 반민중성의 적발이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신약에서 특히 마르코복음서의 비중을 재확인한 것은 민중신학이 도달한 필연이라고 봅니다. 마르코복음서는 맨 처음 쓰인 '복음서'라는 의미에서도 그 중요성이 있지만 그 성격이 너무도 민중적이라는 데 그 핵심적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못 해석된 바울로 신학에 가려진 이 복음서의 발견은 특히 나에게는 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발견은 한편으로는 서구성서학의 시각을 거부하는 발판이 되었고, 더 중요하게는 오늘의 민중 사건을 성서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마르코복음서의 맨 서두에 나오는 말인 '복음의 시작'이란 말부터 새로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은 개념이 아니라, 이제부터 서술되는 예수사건―나는 이것을 예수와 더불어 일어난 일체의 민중사건으로 이해합니다―전체가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주목을 끈 다음 구절은 1장 14절이었습니다. 서구성서학자들은 1장 15절을 예수설교의 요약이라고 해서 중요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14절은 '편집구'로 처리하고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바로 이 14절이 눈에 박혔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상황의 집약적 표시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가 갈릴래아로 가서……." 이 표현이 왜 그토록 전광처럼 내게 비쳤나?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상황이 한 일입니다. 그때 유신체제 아래 체포바람이 일어났습니다. 성서를 읽으면 이 현재의 사건들이 성서를 읽는 나의 눈을 밝게 해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체포와 우리 현장에서 일어나는 체포투옥이 만난 것입니다. 동시에 '이 마당에 우리가 갈 길은 어딘가? 그것은 체포의 현장인 갈릴래아로 가는 길뿐이 아닌가?'라는 강박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때인데 "예수가 갈릴래아로 갔다"는 성서구절은 우리에게 결정적인 시사를 던져준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바로 세례자 요한을 체포한 장본인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지배하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 그리로 들어갔다는 것의 의미와, 그런 배경에서 볼 때 "때가 찼다.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선언의 의미가 얼마나 달라지던지! 이런 인식은 "서구의 '양식사'와 '편집사'적 성서해석 방법이 우리를 색맹으로 만들었구나!" 하는 탄식을 금치 못하게 했습니다. 이른바 '말씀의 신학'을 견지하는 저들이 예수사건 한 마당 한 마당을 분석하는데 '아포프테그마'라는 희랍문학의 장르를 전용하여, 그 각 마당마다 일어난 사건은 그 안에 담긴 한마디 말을 구현하기 위한 틀(Rahmen)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그 말로 안내하는 교량 이상의 의미를 주지 않았습니다. 가령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잘라 먹었더니 적대자들이 안식일법을 위반한다고 항의했다는 서술이 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의 선언이 나옵니다. 이 예수의 말씀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배고파 밀이삭을 잘라 먹어야 하는 그런 배경에서 볼 때 그 뜻은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배고프므로 죄인 취급당하는 자들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선언이기도 하고, 인간을 죄인으로 전락시키고 혹사하는 악한 세력에 대한 저항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체포한 지배자의 영역에 들어가서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선언한 것은 선전포고와 다름없습니다.

이같은 인식은 서구 해석학과의 결별의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복음서를 봤을 때 크게 부각된 것이 바로 오클로스(ochlos)입니다. 예수는 허공을 향해 설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민중 안에서, 민중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복음서는 '그리스도론'의 전개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민중운동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민중은 주객관계가 아니라 함께 사건을 일으키는 '우리'입니다. 그 우리는 평탄한 무대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비리에 저항하는 거덜난 민중들의 분노가 끓는 가마처럼 우글거리는 현장이었습니다. 많은 분노한 민중들이 산속 동굴 등에 거점을 마련하고 삶 아니면 죽음이라는 결단으로 일대 결전을 준비하는 분위기, 어쩌면 동리마다 몇 가구 또는 몇몇 청년들이 가담하여 당국의 사찰 대상이 되어 있고 거리로 정처 없이 다니는 사람들이 심문의 대상이 되는 그런 장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마당에서 그는 민중(그 민중은 굶주린 민중)들과 더불어 몰려다닙니다. 혹자는 그때를 예수와 민중의 '밀월시대'라고 하나 결코 '장미침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민중이 예수와 더불어 최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진해 들어갑니다. 거기서 예수가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예수 개인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사건입니다. 그 사건에 가담하지 않으면 그 사건의 의미를 모릅니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신학'을 핵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그 십자가의 정치적 성격과 그 민중사건성을 정확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건의 현재성이 드러나게 되고 우리도 거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부활경험'은 예수의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인식되지 못한 사건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사건의 현재화를 경험하게 하는 인식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도 이런 민중의 십자가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사건에 참여한 자만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사건으로 본다는 것은 성서를 보는 또 하나의 다른 눈입니다. 우리는 이 눈으로 바울로도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필립비서에서 바울로가 말한 '복음의 전진'이란 인식에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로가 현재 투옥되어 있다는 사실과 투옥된 현장에 산다는 것이 마주침으로써 일어난 정광(正光)에 비치어 발견된 것입니다. 이 발견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사건이 '복음의 전진'을 초래한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는 '말씀의 신학'이 아니라 '사건의 신학'을 말합니다.

말씀이 있기 전에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헤겔이 말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같습니다. 사건은 낮에 일어나고 밤에 부엉이는 그 사건이 일어난 장을 인지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사건을 재빨리 이른바 '말씀'으로 전환시키는가! 그것은 사건에 솜이불을 덮어 씌우자는 것입니다.

바울로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된 것도 사건입니다. 아니 바울로의 생애는 사전투성이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 바울로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서 제외하는가! 왜 바울로가 투옥되어 이른바 옥중서신을 썼는데, 투옥된 이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것일까? 우리는 그런 경험을 했고 또 하고 있습니다. 뻔히 알고 있고 또 경험한 사건을 발표할 자유가 없습니다. 결국 이것은 유언비어의 형태로 전달됩니다. 바울로의 말에는 거의 정치적 발언이 없다고 하나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주목하고 그의 신학의 중심을 '십자가'라고 집약한 이유를 임숙하게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정치범의 사형틀로서 예수를 처형하기에 이른 정치적 사건을 잘 반영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계속 관심사가 된 것은 '도대체 현존의 그리스도는 어디서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론은, '예수는 민중의 고난 속에 현존한다'는 인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같은 인식에 따라서 무엇보다도 마태오복음 25장에 있는 최후심판의 비유와 히브리서 13장 12~13절이 크게 부각됐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성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갑시다."

성문 밖에서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 이것은 감옥에 갇혀 온갖 모욕과 고통을 견디는 가운데 만났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바울로를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옥에 갇히고 매맞고, 수많은 고난의 도전을 받고,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기고(10, 32~34), 조롱당하고 채찍으로 맞고, 결박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또 돌에 맞고, 톱으로 켜이고, 시험을 당하고, 칼에 찔려서 죽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방황했으며,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11, 36 이하). 이것이 바울로가 선 현장이었고 이러한 현장에 있었기에 현존의 그리스도에 대한 저같은 엄청난 인식도 가능했다고 봅니다.

끝으로 그러면 성서를 보는 열쇠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민중 편에서!'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을 '당하는 자'의 편에서 보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주류를 이루는 커다란 맥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이 당하고 있는 자의 해방'이 성서의 핵심 되는 목적이라고 보는데, 참해석은 이런 해방사건에 참여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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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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