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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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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 서구 그리스도론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그리스도의 현실적인 삶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내세웠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죄론적(贖罪論的)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 또는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의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존의 속죄론적 이해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우선 예수와 그리스도의 관계문제인데, 그리스도론에서는 예수의 생애 즉 그의 행태와 말씀이 거의 다 빠져 있습니다. 불트만이 말한 대로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설교했는데, 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설교했습니다. 설교의 내용이 달라진 것입니다. 예수의 사건 가운데 유일하게 십자가의 죽음이 그리스도론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를 '속죄의 사건'으로 단정하는데, 이렇게 단정하는 배후에는 역시 그레꼬 로마의 사고도식―반드시 그레꼬 로마에만 국한되지 않지만― 즉 소위 법적(法的), 제의적(祭儀的, juristisch-kultisch) 사고가 깔려 있어요. 죄를 지으면 꼭 벌을 받아야 한다, 누가 대신으로라도 꼭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법적인 사고의 근저를 이루지만 제사종교에서도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벌을 어떻게 주느냐 하는 것과 관련해서 생명을 상징하는 피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비단 그레꼬 로마 사회의 현상일 뿐 아니라 일반적인 종교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법적이고 제의적인 사고가 그리스도론에서 절대 중요한 작용을 하는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이런 틀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냐?'라는 물음을 제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의 하느님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어요. 이 하느님도 죄지은 사람은 꼭 벌을 준다는 겁니다. 피 흘린 사람은 꼭 피를 흘려야 하며, 남을 죽인 사람은 꼭 죽어야 된다, 특히 구약에서는 하느님이 이렇게 복수의 신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그래서 블로흐(E. Bloch)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교의 신은 피에 굶주린 신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 대신에 누구라도 피를 흘려야 된다는 도그마가 예수의 십자가 해석의 핵심을 이루고 있어요.

이같은 법적, 제의적 사고가 예수의 생에 들어맞느냐? 예수는 그런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법적, 제의적 사고도식 이 기존질서를 지탱해가는 골격이 되고 있었어요.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사고가 그리스도론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다교 성전의 제의적 사고를 그대로 예수의 죽음과 연결지어 십자가의 죽음을 속죄제물로 이해했어요. 이런 이해는 어느 한 측면을 설명해줄 수는 있어도 도저히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어요. 기존의 그리스도론이 이런 이해를 그대로 밀고 나갔고, 이것을 기준으로 삼다시피 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 "법적, 제의적 신관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그대로 인정되고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후에 다시 얘기되겠지만 예수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신, 그런 원리는 부정됩니다. 그것이 부정된다면 예수의 입장에서 십자가사건도 다른 시각에서 이해돼야하고 그리스도론도 아주 달라져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리스도론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은 유다 전통의 메시아 사상입니다. 예수의 삶을 보고 예수가 메시아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메시아상에다가 예수를 맞췄던 것입니다. 그 당시 여러 가지 메시아 표상들이 있었지만 어느 것도 예수의 생애에 맞지 않습니다. '메시아'란 말은 '기름 붓는다'는 말이고 이것을 희랍어로 바꾸어서 '그리스도'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희랍인들에게는 '기름 붓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니까 '그리스도'가 결국에는 예수의 고유명사가 되고 말았어요. 만약에 메시아상을 그대로 살렸더라면 지금 같은 그리스도론이 성립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예수의 고유명사가 됨으로써 대혼란이 일어났어요. 유다의 메시아상은 모두 유다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유다 민족의 구원을 일차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권력과 분리된 메시아상이 없어요. 따라서 메시아상은 힘을 가진 자, 심판자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생존한 예수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유다교의 메시아적 요소를 장차 올 그리스도에게 맞춰버렸어요. 그리고 이미 말한 대로 예수의 존재는 그레꼬 로마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십자가는 법적, 제의적 개념으로 설명을 했어요.

오래 전에 브리운(H. Braun)이 신약의 여러 문제에 대해 강연하는 가운데 신약 전체에서 그리스도론은 절대로 동일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소동을 일으켰지만 그건 사실입니다. 신약의 그리스도론은 일관성이 없어요. 유다교적이고 그레꼬 로마적인 잡다한 개념을 가지고 예수를 설명하고자 했지만, 예수의 생애에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기존의 그리스도론적인 설명에 따르면 예수의 수난에서 하느님은 법적, 제의적인 법칙에 얽매인 신이지, 은혜의 신도 아니고 자유의 신도 아니게 됩니다.

부활에 대한 이해는 예수의 수난사와 죽음을 이해하는 데에 따라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부활은 '예수가 너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믿으면 네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실증해주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부활과 십자가는 한 사건의 양면이므로, 십자가를 다르게 해석하면 부활사건도 다르게 해석되겠지요.

▶ 선생님께서는 법적, 제의적 사고를 부정적으로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겠습니까? 법적, 제의적 사고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사고로 그치지 않고 역사적 현실을 지시하는 것으로서 그 나름의 타당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공동체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하고 질서를 위해서는 강제력이 수반된다는 것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인데 이것은 민중에게도 역시 타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질문은 개신교의 소위 복음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론으로 설명하면서도 유다교적인 속죄사상응보사상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극복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대신 희생양이 되어 모든 인류를 무조건적으로 값 없이 용서해준다는 주장, 다시 말해서 예수의 죽음을 형식적으로는 속죄론으로 설명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인과응보적인 사고를 극복했으며 그 죽음에서 하느님의 값 없는 자유로운 은혜를 본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우선 법적, 제의적 현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삶이 모두 설명된다면 신도, 은총도, 아니 그리스도도 필요없게 됩니다. 법적, 제의적인 사고가 기존질서를 유지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교권마저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역할이 '이런 질서를 재확인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런 것에 묶여 있는 인간을 해방하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속죄론에 관한 소위 복음주의적인 설명도 자가당착적인 면이 있어요. 하느님이 죄를 지은 사람을 벌주는 대신에 예수를 죽였다고 하는가 하면 예수가 하느님을 대신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되면 하느님도 이 법 속에 꼼짝 못하고 매여 있어요. 다른 사람 대신에 아들이라도 죽여야 하는 그런 하느님은 예수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런 하느님은 교리에 젖은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겐 설득력이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악의 구별문제입니다. 즉 '죄'를 어떻게, 누가 규정하느냐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제의적이거나 법적이거나 간에 죄를 규정하는 데 따라 벌의 양상도 달라질 텐데 죄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을 어긴 행위라고 한다면 그게 무엇일까? 제의적 죄는 제사의 규정을 어기는 것이 죄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기준은 성전 따위의 규정일 것이고, 그것에 관련된 죄는 사제계층이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법적인 것은 사회질서를 혼란케 하는 것을 죄로 볼 터인데 그 사회질서는 누가 누구를 위해 만든 것일까? 사회질서는 강자, 즉 집권계층에 의해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태반인데, 이 경우 법적인 죄의 규명은 집권자 계층이 할 것이고 또 그 벌은 결국 집권자를 위해 주는 것이 됩니다. 그중에는 명백한 죄가 있습니다. 가령 '살인'이 죄라고 할 때 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피지배자들의 개인적 관계에서의 살인은 처벌이 되나, 지배자들이 약탈을 위해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살인'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습니다.

▶ 속죄론을 토대로 설교를 하려면 참 힘이 들어요. 그런데도 도덕적인 죄를 지었을 때 마음이 몹시 괴롭다가도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가셨으니 용서받았다는 위안이 밑바닥에 깔려 있거든요.

도덕적, 윤리적인 죄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것을 푸는 데에는 죄인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한 열쇠입니다. 법적이고 제의적인 현실이 인간을 전적으로 저주하는 데 대해서 예수는 저항하고 나섰지요. 기존의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이런 저항을 보려고 하지 않아요. 기존의 그리스도론은 그런 현실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복종이지요.

▶ 이제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론을 다뤄야 하겠는데 먼저 그리스도 사건과 구약성서의 관계를 묻고 싶습니다.

불트만은 구약을 2차적 자료로만 취급했습니다. 나도 그 영향을 한동안 받아왔는데, 민중신학적인 사고를 하면서 구약이 부각되었고 구약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성서 전체를 화산의 맥으로, 예수사건은 이 화산의 맥이 폭발된 정점이라고 보고 싶어요. 구약과 신약 전체를 한 광맥이라고 보면 가장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고난'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을 이루는 출애굽 사건에 비추어보면 성서의 고난은 구조적인 권력에 의한 고난입니다. 출애굽에서 보면 에집트의 파라오는 한 개인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상징이지요. 그 밑에서 신음하고 있던 히브리가 탈출해나은 사건인 출애굽에서 시작해서 계속 권력에 의한 고난사가 빚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같은 자연적인 고통이 아니라 정치적인 고통입니다. 이 정치적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지상과제로 되어 있어요. 여기서 해방되기 위한 싸움이 계속 단편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구약 자체에서도 법전(法典)들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상당히 문제삼고 있어요. 십계명은 법전들을 집약한 것인데 이것도 역시 권력에 의해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계명이라고 봐요. 신의 이름을 빌려서까지 절대권을 행사하는 것을 못하게 하려는 것, 그런 권력 밑에 눌려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십계명의 속 정신이라고 봅니다. 저들이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실현하려고 했던 것은 권력이 지배하지 않는 공동생활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실현되지 않고 권력체제인 다윗왕조가 수립되어 많은 고통이 생겼습니다. 여기에 저항한 것이 예언자들입니다. 그후 계속해서 외세인 대제국들에 의해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외세에 아부하여 청부 받은 계층에 의해서 민중은 이중적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로마제국 밑에서 예수가 탄생했습니다. 로마제국과 예수의 관계는 에집트제국과 히브리, 거대한 다윗왕조와 거기에 억눌린 가난한 백성들과의 관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권력에 의해 일어난 고난의 문제 앞에 예수가 서 있어요. 여기서도 고난을 일으킨 주동세력은 국가권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국가권력 앞에서 예수가 어떻게 했느냐 하는 물음에서 그리스도론을 풀어가야 된다고 봅니다.

구체적인 메시아상은 주로 묵시문학 이후에 형성된 표상에 있지만 메시아상이 구약성서에 없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권력 밀에서 억눌려 고난받는 민중이 그들을 구원해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박해받는 사람들에게는 메시아상이 없을 수 없다고 봐요. 모세를 메시아로 보는 파들이 있었고 그때그때의 예언자 또는 다윗마저도 메시아로 보는 파들이 있었어요. 여러 가지 메시아관이 있었는데 대개 권력 앞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그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똑같이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힘에 눌려 고통당하는 자가 그보다 더 힘센 자에 의해 해방되고 싶은 것은 당연하고, 그런 이가 바로 '메시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에 한 예의의 메시아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2이사야(이사 40~55장)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의 상(像)이지요. 외세에 짓밟히기만 한 유다인에게 복수심이 끓고 있었을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심판이라는 사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종말사상은 메시아 사상과 병존하는데 그 종말은 적들의 종말이지, 이스라엘의 종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심판당하는 종말이 옴으로써 선택된 참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중심이 된 새 세계가 온다고 믿었지요.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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