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고난의 종'의 상(像)이 메시아라는 주장이 용인되겠어요? 실상 그런 메시아상이 유다교에서는 별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민중들이 바로 이 고난의 종의 상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와 같은 사건인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신학 이전에 예수의 삶과 죽임당함이 그런 눈을 뜨게 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수난이 수난의 종을 연상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난의 종의 상이 먼저 있어서 예수의 수난을 그것에 맞추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역광적(逆光的)인 셈입니다.
예수의 수난사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은 그레꼬 로마 세계의 영웅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또 천하를 심판할 유다적 메시아도 그런 죽음을 당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법적, 제의적인 의미에서 해석해버릴 수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묵시문학에서 중요한 것을 받아왔습니다. 그것은 종말론인데 예수의 십자가사건을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고 설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묵시문학에서 이어받은 종말론을 원용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묵시문학적 메시아상이 다시요청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상(像)이 나자렛 예수의 생애에 전혀 맞지 않으니까 다시 오실 이에게서 그런 기대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묵시문학적인 메시아상이 단편적으로 나오지만 이것이 주된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는 그레꼬 로마 사회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형성된 것인데 반하여 민중전승은 유다교적 메시아상에도 맞지 않고, 그레꼬로마 사회의 신인(神人)사상에도맞지 않고, 법ᆞ제의적인 세계관이나 역사관의 틀에도 맞지 않는 예수상으로서 사실에 가장 가깝게 전달되었다고 봅니다.
▶ 선생님, 고난이 이스라엘 역사와 구약성서의 가장 깊은 저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와 고난의 종을 직결시키신 것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민중이 고난을 통해서 자신들도 구원받고 다른 사람들도 구원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민중이 끝까지 고난만 당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다음 단계에 가서 얘기하기로하고, 그보다 전에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난받는 종'은 계속 수난당하되 어처구니없이 멸시와 천대를 받는 이스라엘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계속 두들겨 얻어맞기만 하는 위치에서 어떻게든 제힘을 기르거나, 초인적인 메시아가 나타나서 복수해줄 것을 염원하는 일반성을 뛰어넘어서 그렇게 수난당하고 있는 자신들이 세상을 위한 메시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인식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사적으로 보면 왕자(王者)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민중들이 예수의 어처구니없는 패배인 그 처형이 온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깨달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그런 인식으로 '부활'하게 됐습니다. 여기에 예수와 예수의 민중 사이의 연속성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큰 사건이요 연속적 운동입니다.
마르크시스트인 마코비치(M. Machoveć)도 말했지만 만일 예수의 민중이 복수의 저항을 했거나 젤롯당과 함께 행동했더라면 예수 사건은 단절되었을 것입니다. 까닭은 현실적으로 로마제국을 당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도 있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세계를 악에서 구원하는 길이 아니라 복수에서 복수로의 악순환만 계속하게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이센(G. Theissen)이 원수사랑의 계명 연구에서 그 당시 원수 사랑하는 경우를 파고들었는데, 그것은 예외 없이 '왕적 존재'가 왕자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포용' 또는 '관대함'을 나타낸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당시의 언어로 하면 왕답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얻어맞는 우리가 너희보다 높은 차원에 '있어야 한다' '있다'라는 자의식(自意識)의 행동화지요.
이것은 예수의 수난이해와 맥을 같이하는 결론입니다. 그보다 더 차원이 높지요. 즉, 내가 얻어맞고 죽임을 당하여 너의 죄와 악마저도 소멸함으로써 악의 악순환을 단절하겠다는 '왕적 메시아'가 참메시아의 모습입니다. 예수의 민중도 박해를 받으면서 스스로 예수의 메시아 운동의 일원으로 자부함으로써 자신들도 그 나약함에서 구원 받고 남도 구원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이스라엘의 고난과 예수의 수난, 그리고 그의 민중의 수난에 연속성이 있어요. 즉, 권력적인 강자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민중적 메시아입니다. 김용복씨가 말하는 권력적 지배의 메시아니즘이 아니라 평화와 코이노니아 등으로 이룩하는 메시아적 통치라는 것이 이런 면에서 상통한다고 봅니다. 고난받는 민중이 세계를 위해 고난당한다고 생각함으로써 복수의 악순환을 끊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 메시아 통치가 이루어지고 그런 의미에서 고난받는 민중이 메시아입니다.
▶ 이제 성서, 특히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와 민중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그리스도 칭호나 메시아 자의식 문제와 관련 해서 그리스도의 활동과 수난이 어떻게 집단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쓴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란 논문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어요. 먼저 예수 자신이 메시아 의식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하면 좋겠어요. 예수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메시아 칭호가 있어요.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인자, 다윗의 자손, 주님 등인데 이 가운데 예수가 자신에 대해 '인자'라고 한 것은 결코 다니엘서적인 메시아나 그외의 어떤 메시아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수가 자신을 인자라고 부른 것은 에제키엘서에서처럼 그저 '사람'이라는 겸손한 의미, 불트만이 말하듯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겸손한 칭호에 불과합니다. 거꾸로 만일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다면 참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의 행위를 보아서 그가 재래적인 의미의 메시아, 이미 형성된 개념으로서의 메시아라는 표상 속에 자기를 맞추려고 한 분은 절대로 아니라고 봅니다. 실제로 복음서에 서술된 예수의 생애는 당시의 어떤 메시아상에도 맞지 않습니다.
마르코복음의 그리스도론을 브레데(W. Wrede)는 이른바 '메시아의 비밀'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감추었다고 볼 것이 아니라 예수의 행태가 도저히 기존 메시아상에 맞지 않으니까 그것을 변호하기 위해 만든 것일 겁니다. 예수는 이른바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을, 예수를 낮게 평가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니! 그보다 오히려 그런 틀에 자신을 가두기에는 너무나 생동적이고 차원이 높다고 봐야 하겠지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꼭 예수가 자신에게만 적용한 것이 아니라 '참사람' 전체를 그렇게 본 것이지요. 무엇보다 예수는 하느님을 사람들의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서구의 논자들은 예수가 '나의 아버지'라는 말을 일반 사람들에게 사용할 때는 복수로 썼다고 주장 하나 이는 억지일 뿐입니다. 주기도문의 아버지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는 다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마태 5, 9 등 참조). 아무튼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으로 기적을 행했다고는 보지 않아요. 예수사건의 전승자들이 예수의 기적행위에서 그의 초능력을 시위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는 메시아라고 하는 결론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수난사는 어떤 각도에서 보아 초인적인 의미의 하느님의 아들, '전능한 이의 아들'이라는 생각에 맞출 수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