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삶을 어떻게 성격화할 것인가? 그가 죽임당한 것을 '대속'이라는 개념으로만 해석해버리는 것은 너무도 단순화한 도그마입니다. 적어도 예수 자신은 '죄'라는 것에 중심을 두지 않았어요. 그래서 예수에게는 이른바 죄인이 없어요. 도대체 '죄'를 누가 규정합니까? 기존질서가, 엄밀히 말하면 지배층이 설정한 그물에 걸리면 죄인이지요. 예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보지 않고 그런 손아귀에서 해방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비판의 대상은 죄인을 비판하는 바로 저들이었습니다.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죄를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자꾸 강조하다 보면 결국 약자만 당하게 돼요. 법적, 제의적 체제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자들 밑에 깔려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예수의 주변에 몰려들었어요. 이들에게 예수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고 선언했어요. "너희는 하느님의 아들, 딸이다." 이것을 저들에게 의식화시키려 한 게 아니라 저들을 이렇게 보았다는 말입니다. 죄인으로 보지 않고 글자 그대로 사람으로 보고 그들과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일부러 계획을 세워서 구제사업을 하거나, 나는 메시아니까 저들을 구원하겠다는 입장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있으면서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나눠주는 게 예수의 모습입니다. 물론 예수는 자신의 의식까지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시대의 법적, 제의적 질서에서 보면 죄인들이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보잘것없는 그런 무리들과 아무런 전제 없이, 마치 이태백이 물을 못 보고 달만 향해 가다가 빠져죽은 것처럼 그 민중 속에 들어가서 어울리며 나누다가 법적, 제의적 그물에 걸려 사람 취급 못 받는 저들에게, 즉 체제에 억눌린 가난한 그들에게 "너희가 사실상 주인이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것이다. 너희야말로 참하느님의 아들, 딸이다"라고 말해주었어요. 이것은 의식화가 아니라 정말 그 자신이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단지 그들 편에 선 것만이 아니라 이들에게서만 구원(하느님 나라)이 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가진 자들을 향해서도 자꾸 저들을 주목하라고 한 것은 가진 자들도 저들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구원의 길은 이들을 통해서만 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결국 예수 자신도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다가 그들을 통하지 않고는 인류 전체의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결국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는데, 이 십자가의 죽음은 민중의 고난의 극치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한 개인(individium)의 죽음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지배자들에게 눌려 죽는 민중의 죽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죽이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로 인식할 때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 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잘못하면 추상적으로 될 수도 있겠지만,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의 말은 권력을 쓰는 자는 권력으로 망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권력에 의해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보다 더 강한 권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해결의 길이 있는데 수난당하는 민중이 체념이나 패배의식으로 주저앉아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수난을 당함으로써 마침내 권력의 횡포를 종식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식을 가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얻어맞은 자신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의식을 가진 무리가 바로 다름 아닌 예수의 민중이었습니다. 세상을 대신해서 얻어맞고 죽어가는 민중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옵니다.
▶ 선생님, 그렇다면 그것은 의식의 차원에서 해방이지, 실제 고난 받는 삶 자체의 해방은 아니지 않습니까?
공자는 요순시대를 이상(理想)으로 했어요. 그 이유는 요순이 정치를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만큼 권력을 덜 썼다는 얘기지요. 권력에 의해 질서를 정연하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독재가 요청됩니다. 유토피아 사상의 잘못은 독재를 수반한다는 겁니다. 다스린다, 지배한다, 통치한다는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해왔으니까 이것을 제거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없어요. 어쨌든 공자는 부강한 국가를 생각지 않고 덕으로 다스리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생각했어요.
그런데 노자와 장자, 특히 장자는 요순마저 비판합니다. 요순의 그것도 사람을 다스리는 수법이니까, 인위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 저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을 지닌 것 자체가 돼먹지 않았다는 겁니다. 애당초 누가 누구를 위한다는 것은 소위 엘리트 의식이거나 지배자 의식이에요. 인간은 권력은 물론이고 어떤 영향을 끼쳐서 세상이 잘되기를 바라는 생각에서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위(無爲)인데, 무위까지도 의식화되면 해를 끼친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생각해보세요. 의식적으로만 달라지지 현실은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절대로 그렇게 보지 않아요.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수난을 당하다보면 결국 권력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말아요. 권력이 무력화되고 무의미해져요. 권력이 설 자리가 없어지면 세상이 달라지는 거죠. 칼을 든 권력을 칼을 들고 없애겠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생각이었는데, 이제 말한 경우는 칼을 무시해버리는 거예요. 무시함으로써 칼을 무력화(無力化)한다는 말입니다.
보통 우리는 이것을 이상적인 환상으로 간주해버리고 마는데 이게 바로 우리의 한계지요. 경제원리에 비추어보더라도 자기 생활수준을 스스로 낮추는 것은 불가능하다든지, 힘 가진 놈이 스스로 힘을 포기하는 일은 없다는 게 흔히 하는 생각이지요. 인도의 간디는 그 길을 가장 가까이 실현한 인물입니다. 그는 바늘 하나 갖지 않고 100만 영국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 비노바는 정치적 해방, 즉 외세의 권력은 추방했으나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을 보고 무엇보다 토지를 민중에게 분배해야 할 것을 결심하고 그것을 위한 행각에 나섰습니다. 그는 전국을 누비면서 토지 못 가진 사람들을 조사하고 지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줄 것을 호소하고 다닙니다. 그 때 공산당들이 "법을 제정하고 토지개혁을 하면 하루아침에 될 일을 왜 그렇게 어리석은 수고를 하느냐?"고 비난했을 때 그는 "폭력으로 사회변혁을 시도하는 것은 참혁명이 아니며, 그런 혁명에서 좋은 시대는 안 온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믿는다. 그 고갈된 마음을 두드려 즐거이 자기 것을 나누어줄 때 그것이 진실한 나눔이요, 그렇게 될 때 새 세상이 온다"고 응수했습니다. 물(物)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물(物)에 '나누어줌'이 수반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자발적 나눔에 호소합니다. 그러나 나는 무위를 말하지 않아요. 수난은 무력해서 그리고 비겁해서 당하는 수모만이 아닙니다. 진정한 수난은 '아닌 것은 아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하는 자에게 옵니다. 불의에 대한 저항은 권리요 의무입니다. 이런 저항은 결국 불의(不義)를 종식시키라는 신념을 포기할 수 없게 합니다. 예수의 수난이 바로 후자의 경우가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믿음을 견지하기 어려워요. 집권자가 스스로 권력을 내놓는 법이 있느냐, 빼앗는 길밖에 더 있느냐 하는 생각에 머물고 말지요. 나도 거기에 머물러 있어요. 그런데 예수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폭력에 호소하지 않았고, 그 대신에 자신을 나누어주고, 그런 세상을 내다봤습니다. 예수의 민중은 이렇게 믿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결코 우리는 밤낮 이렇게 그냥 당하고 그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만 믿고 살자는 것은 아니었어요. 세상의 변혁을 전제했어요. 그렇기에 예수의 민중은 예수의 죽음이 비참한 패배라고 보지 않았어요. 그들은 "예수는 전세계를 위해서 죽었다. 세계를 변혁시킨다. 하느님의 종말사건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종말사건은 세상의 완전변혁입니다. 그때부터 예수의 민중들은 결코 무기를 들지 않았고, 어떤 형태의 권력집단을 형성해서 세상을 정복하여 복수한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어요. 적어도 예수의 민중은 그랬습니다. 그들에게도 또 권력의지가 침투되긴 했으나 그래도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기 전까지는 스스로 약자들임을 자인하면서도 세상을 개혁할 전선에 보냄받았다는 의식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것은 커다란 평화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이 서서히 세계를 바꿔 로마제국의 종식을 고하는 데까지 갔어요. 현실은 아직 그렇지 않지만 예수의 민중은 예수가 이미 종말을 가져왔다고 믿은 거예요. 예수 자신도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어요. 현실적으로는 폭력이 횡행하고 로마제국이 엄존하는데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했어요. 거짓말을 한 게 아니고 정말 그런 확신을 지녔던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은 가난한 자가 부자 된다는 말이 아니라, 가난한 자가 새 질서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너희가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 세상을 변혁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이 신념이 부활경험인데―무기를 손에 들지 않고, 권력체제를 모방하지 않고 끝끝내 섬기는 자의 자세를 지니는 그런 공동체를 형성하여 로마를 굴복시킨 것입니다.
▶ '나누어준다'는 말과 '연대성을 가진다'는 말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나누어준다'는 말보다 '나눈다'는 말이 더 옳겠지요. 서양 사람들은 흔히 연대성(solidarity)이란 말을 써요. 그 이상은 한걸음도 못 나가요. 소위 나눔(sharing)이란 말은 세계교회협의회(W.C.C)를 통해서 제3세계 쪽에서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압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물'(物)의 나눔에 역점이 있습니다. 사실상 제1세계에서는 나눔이란 말을 현실적으로 쓰기 어렵지요. 까닭은 나누어줄 수 없으니까. 그 대신 솔러대러티라는 말을 즐겨 쓰는데, 이 말은 '물의 나눔'의 의미화(意味化) 내지 추상화라고 봅니다.
▶ 선생님, 민중운동에서는 무작정 나누어주고 당하는 민중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 몫을 찾으려고 주장하고 싸우는 모습이 자주 드러납니다. 지금 말씀하신 예수의 사상을 가지고 이런 민중의 모습을 포괄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이 점을 분명히 하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말한 것은 성서에서의 그리스도상입니다. 우선 이런 그리스도상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실문제가 그렇다고 성서의 그리스도상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예수를 젤롯당과 연결시키는 브랜던(S.G.F. Brandon)적 해석으로는 설명이 안 돼요. 지금 민중은 나누기보다 가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들은 제 몫을 찾으려 하고,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이기적일 수도 있고, 고난 속에 비뚤어지기도 하고, 또 배신도 합니다.
저는 민중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민중의 다른 면을 봅니다. 그것은 민중은 자기초월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의 경험을 회상하면 돼요. 1970년 '전태일'이란 젊은이가 자신은 굶주린 상태에서 동료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어디에서도 통하지 않으니까 마침내 자신을 불태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고, 그것이 평화시장을 위시한 노동자의 현장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했어요. 그는 자신을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아니, 자신을 나누었다는 말이 적절합니다. 그런데 이런 큰 사건이 지난 15년 동안 가속화되어 계속 순교자의 역사가 점철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노동자들이 자신의 문제는 초개와 같이 버리고 자신의 권익보다 동료들의 권익을 위해 투신하는 사건을 무수히 보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자기초월의 사건으로서 교회가 아니라 민중에게서 일어난다는 사실에 당황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지른 불이 계속 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