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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 이제 민중 그리스도론을 물어야 할 차례입니다.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에서는 그리스도가 성례전(sacrament)이나 설교에서 현존한다고 말하는데, 민중 그리스도론은 강도 만난 사람, 고통받는 민중에게서 그리스도가 현존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현존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민중 그리스도론을 말씀해주십시오.

대표적인 성서본문은 마태오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심판의 비유'와 히브리서 13장에 나오는 '성문 밖의 그리스도'지요. 오늘의 그리스도 문제를 말하기 전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의 문제성을 생각해봅시다. 불트만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행한 마지막 강연은 자기 제자들의 글을 이리저리 논박하면서 한 것인데, 쉽게 말하면 예수와 그리스도 사이에 연속성이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은 초대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전제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말했다는 뜻은 아니고 내용적인(sachlich) 연속성이 없다는 말이지요. 즉,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설교했는데, 제자들은 예수를 설교했으니까요.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가 된 것은 예수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용상으로는 연속성이 없고 의면상의 연속성만 있다는 겁니다. 불트만의 생각은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자기가 자기를 말할 때와 그 사람을 제3자가 말할 때 달라지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 정도는 달라지겠지만 나는 내용상에서도 기본적인 것은 동하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나는 메시아적인 화산맥이 나자렛 예수에게서 활화산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 사건은 나자렛 예수에게서 한 번 일어나고 끝난 것이어서 우리가 메시아 경험을 하려면 2천 년 전의 일을 회상하면 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사건은 화산맥이 계속 분출하듯이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예수의 사건이 질적으로 고유하고 유일회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스도 사건은 나자렛 예수에게서 단 한 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죽었습니다. 부활했다고 하더라도 역사상에는 없어졌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의 민중들은 예수를 그리워하면서 메시아를 추구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예수에 대한 현재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성령인데 성령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에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이란 말이 나오고 있어요. 삼위일체론 때문에 자꾸 흐려지고 있지만 나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현존양태로 보고 싶어요. 이렇게 성령이 그리스도가 '초자연적'형태로 현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면, 다른 하나의 경험은 그리스도가 분명히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현존하고 있다, 그리스도 사건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험이 마태오복음 25장에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감옥에 있는 자들, 헐벗은 자들, 굶주린 자들, 가난한 자들, 포로된 자들과 같은 사람들의 현장에서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겁니다. 이런 사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히브리서 13장 13절에 "우리도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성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갑시다"란 말이 있는데, '수치를 걸머진다'는 말 자체가 아주 중요한 것을 말해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말입니다. '성문 밖에 나간 그를 찾아간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철저히 버림받은, 세상에서 소외된 거기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있다, 거기로 나가자, 지금 이 성문 안에는 그리스도가 없다.' 세상이 인정한 그 영역에는 그리스도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처음에 성령을 일단 '초자연적'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그리스도 현존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과 성령의 활동을 서로 다른 두 사건이라고 보지 않아요. 한걸음 나아가서 마르코복음을 살펴봅시다.

마르코복음은 40년 전에 살았던 예수를 그린 것이지만 마르코복음의 자리는 분명히 현재 민중들이 살고 있는 현장, 민중들이 살고 있는 자리였습니다. 마르코복음은 '민중의 현장'이 곧 '예수의 현존의 장'이라고 봤다는 겁니다. 유다 전쟁에서 참패한 후 굴을 잃고 흩어진 개미떼처럼 나라를 잃고 삶의 터전을 잃어 굶주리고 헐벗은 채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을 마르코는 주목한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서에 보면 예수가 사흘동안 굶고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는 무리를 불쌍히 여겼다고 하는데, 이것은 40년 전 민중의 모습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마르코가 서 있는 민중현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코는 이 굶주린 민중에게 떡을 나눠주는, 자기 자신을 나눠주는 예수를 그리고 있어요. 또 마르코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장면에서도 아무리 절규해도 대답 없는 신 부재(神不在)의 캄캄한 현장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나자렛 예수가 40년 전에 당한 경우만이 아니라 지금 그것을 쓰고 있는 마르코가 살고 있는 민중들의 현장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40년 전 나자렛 예수의 현장과 마르코복음을 쓰는 마르코의 현장, 이 둘이 유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꼼짝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가는, 굶주려 헤매는 민중의 현장, 이 신 부재의 현장에 현존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마르코는 그 글을 썼다고 봅니다.

이처럼 마르코는 예수를 자기 시대의 현장 속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예수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민중의 죽음으로, 예수의 고통을 예수 개인의 고통이 아닌 민중의 고통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마르코는 예수를 그리면서 동시에 민중의 삶을 그렸던 것입니다.

▶ 그러면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오늘의 민중의 현실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겠습니까? 마르코의 설교는 위로의 설교로 그치고, 민중의 적극적인 항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문제가 남게 되지요. 유다전쟁에서 젤롯당은 싸우다가 마지막 한 명도 남지 않고 죽어갔는데, 마르코는 민중들에게 예수가 죽으면서 "오,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했듯이 "끝끝내 하느님만 신뢰하고 하느님의 아들들로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라, 그러면 마침내 로마도 칼을 버릴 때가 올 것"이라고 설교했던 것입니다.

마르코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설교했다면 우리는 거기에 승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코는 실제로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그렇게 무력하게 죽어가는 예수상을 고난받는 민중현실의 한복판에서 제시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시스트인 마코비치도 그런 예수에게 동의를 했어요. 앞서도 말했듯이, 예수가 그렇게 하지 않고 젤롯당처럼 했다면 아무 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그냥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거라는 거예요. 예수의 처신은 아주 현명했다는 겁니다. 사회과학적으로도 예수는 현명한 투쟁을 했다는 말입니다. 젤롯당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고, 젤롯당 때문에 결과적으로 유다는 빨리 망하고 말았지요. 사실 젤롯당은 의미가 있고 그럴듯하고 호응을 받았었지만 성과는 없었지요. 그에 비해서 예수의 운동, 마르코가 그린 예수의 모습은 로마에 대항해서 싸우다가 억울하게 죽어가는 현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 절박한 현장에서 마르코의 설교는 어쩌면 돌에 얻어맞을 설교였을 거라는 얘기지요.

다시 얘기를 민중 그리스도에게로 돌리자면, 민중적 현장이 예수의 현존의 장이라는 신념을 모든 교회가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일부에서는 그런 신념이 계속되었지만 일부에서는 에클레시아 조직으로 발달되어,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드리는 거기에서만 현존의 그리스도를 경험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후자가 강력해져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생각에까지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생각이 발전하여 교회가 그리스도의 대리자 역할을 한다는 데까지 나아가 마태오복음 25장, 히브리서 13장, 마르코복음 해석에서 제시한 민중 그리스도론과는 아주 다르게 변해버렸지요. 사실 그리스도가 민중의 현장에서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현존하고 있다는 말은 유다 사람들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얘기인지도 몰라요.

제가 들은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봅시다. 나치가 폴란드로 진입하자 유태인을 색출했습니다. 일군의 유태인들이 유태인 공동묘지에 숨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중 한 여인이 그 와중에 해산을 했어요. 무덤 가운데서 말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도와주지 못한 채 무덤지기인 노인만이 그 아이를 받아들고 "오, 하느님, 이제야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십니까?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무덤에서 생명이 탄생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고난의 역사를 수천 년 살아온, 그리고 또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둔 유태인에게 가능한 메시아 현존 경험입니다. 그 아이 자체만으로는 메시아일 수 없지요. 무덤과 연결된 그 고난당하는 민중의 현장에서 메시아 경험을 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금년(1986년)도 노벨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이 소설 『흑야』(黑夜)에서 증언하고 있는 수용소에 잡혀 있던 유태인들 이야기입니다. 나치가 심심하면 몇 사람씩 잡아다가 죽이던 때, 한번은 어린 소년 하나하고 좀 나이 먹은 사람 둘, 이렇게 셋을 교수대에 매달았어요. 나이 든 두 사람은 일찍 죽고 어린 소년은 한참 버둥거리면서 죽어갔는데 그 장면을 보고 있던 한 사람이 너무 억울해서 "하느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하고 소리 없이 절규를 했어요. 그러자 그 사람 뒤에서 누군가 "하느님은 저기 교수대에서 죽어가고 계시지요"라고 대답했답니다. 그 죽임당하는 장면 밖이 아니고, 지금 죽는 저기에 하느님이 있다는 겁니다. 죽는 그 사람이 하느님이란 말이 아닙니다. 억울하게 죽어가는 거기에 하느님이 있다, 즉 하느님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유태인이 아니면 못할 말이에요. 유태인들은 늘 이런 고난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예수의 죽음에서 하느님을 경험한다는 것도 이런 정신적 전통이 있어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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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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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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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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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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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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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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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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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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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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