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이런 예수 그리스도 사건, 즉 민중사건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언젠가 함석헌 선생님이 마산의 요양원에 가서 "이 폐병쟁이들아!" 하고 욕을 했대요. 네 속에 있는 네 아픔을 어떻게 좀 소리질러서 건강한 우리의 메마른 가슴을, 다 메말라서 사랑의 샘이 고갈되어 있는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거기서 무엇이 좀 나오도록 하라고 그랬다는 겁니다. 이 욕설은 예언자적 표현이에요. 나도 환자들을 보면 "불쌍한 당신들이여"하지 않고 "되도록이면 가장 아픈 절규를 해 봐라. 그래서 건강한 놈들이 당신들의 절규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게"라고 말해요. 그 아픔에서 시가 나오고 그 절규 자체가 대답이 되지요. 농민이면 농민 아닌 사람들, 즉 서울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리가 됩니다.
저는 그리스도가 지금 헝클어진 문제들을 척척 해결해주는 해결사가 아니라 오히려 절규하는 이, 그 절규가 우리 가슴에 사무쳐서 자기 영역에 안주해 있는 우리의 상태를 깨뜨리고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논리를 깨뜨리는 역할을 하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읽은 그런 시를 읽으면 나 자신이 근본적으로 흔들려요. 모범적인 논리정연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게는 문제가 안 돼요. 그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내가 이리 저리 피해 방어할 수 있는데, 적나라한 민중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나 절규 같은 것은 도무지 어쩔 수 없이 나를 당황하게 하고 쩔쩔매게 만들어요. 그런 상황이나 절규에 접해서 '그야말로 나보다는 능력이 있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내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고 나 자신이 절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메시아 운동입니다.
이런 메시아의 바람이랄까, 메시아의 파장이랄까하는 것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운동 같은 것을 보더라도 젊은 사람들이 애써 공부해서 경쟁을 뚫고 학교에 들어갔는데, 자기 일생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일이 지금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어요. 젊은 사람들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일이 어떻게 저렇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는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는 바울로의 말이 지금 막 이루어지고 있어요. 오히려 교회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서는 지금 기적이 일어나고 있어요. 우리는 이것을 메시아 경험으로서 감격적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그리스도 사건이 지금 계속 폭발되고 있는데, 교회가 우리의 눈을 흐리게 만들고 교리 자체가 우리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해방을 받아야만 됩니다. 이 해방을 받는 것도 설교에서는 가능하지 않고 민중의 사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 보는 사람들에게 "우리 저 자기초월의 현장으로 나갑시다. 거기 그리스도가 현존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교회의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못해요. 지금 수난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태일이나 송광영에게 그리스도가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미 2천 년 전 예수의 민중은 그렇게 했습니다. 사실 마태오복음 25장의 얘기는 예수가 한 이야기로 보지 않고, 예수의 민중들의 고백으로 봅니다. 현존의 그리스도를 찾는 고백입니다. 나는 이 점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의 그리스도가 우리와 격리된 것은 교회가 우리를 세뇌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선생님께서는 그리스도 경험과 그리스도 증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집단적이고 전체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는데, 찬송가나 일반 신도들의 신앙의식에서는 그리스도가 아주 개인적이고 종교적, 인격적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순복음교회를 위시해서 많은 교인들이 이 나라의 민중인데, 주로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이고 영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민중의 삶과 고난을 기술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거기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고 증언하는 데 신학의 역할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서 서남동 선생님과 선생님께 신학적 차이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까 하려다 못한 얘기를 하면서 이 물음에 대답해봅시다. 지금부터 2천 년 내지 2,400여년 전에 있었던 시편의 절규와 오늘 읽었던 시집의 절규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요. 시편에는 '내 원수'라든지 '악' '불의' 같은 말들이 많이 쓰이는데 그때의 사회구조와 관계가 있을 겁니다. 이런 말들에는 정치적인 색채가 짙게 깔려 있어요. 당시에도 여전히 배고팠겠지만 경제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개념들이 많이 나열되어 있는데, 오늘날에는 자꾸 물질적인 표현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아요. 이렇게 바뀌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당연합니다. 요즘 물질적 해석(materialistische Auslegung)이 나오는 것도 우연이 아니에요. 현대인들은 완전히 물질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리고 물질화되어버렸기 때문에 마땅히 언어도 물질적인 언어를 써야 합니다. 언어는 그 시대의 세계관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언어를 써야 진실합니다. 지금은 하느님마저도 물질적 표현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이 점을 보려고 하지 않아요. 여전히 2천 년 전의 시편적인 슬픔을 노래해야 종교적이고 그렇지 않으면 타락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 자신의 삶은 완전히 물질적인 것에 매여 있기 때문에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버렸습니다. 그런 현장에서 물질적인 해석을 하자는 겁니다. 이 말은 물질의 노예가 되라는 게 아니라 현대인의 언어가 물질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