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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 순복음교회 같은 데서는 성령체험, 초자연적인 체험이 전도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만일 이런 것들이 집단적인 고통을 알게 하고 전하는 데 사용된다면 이런 것들을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한국 민중의 언어를 생각해봅시다. 무당을 예로 들어봅시다. 만일 예수를 무당이라고 할 때 귀신축출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거든요. 그런데 오늘날의 귀신축출과 예수의 귀신축출이 크게 다른 것은, 예수의 귀신축출은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병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를 구조적으로 종속시키는 악마를 추방한다, 낡은 세력을 추방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내가 하느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온 것이다"(마태 12, 28)라고 한 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교회의 귀신축출 내지 치병행위가 개인의 질병을 낫게 한다는 개인적인 욕구 충족에만 머무르고 있어요.

방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방언을 몰랐어요. 바울로도 "내가 방언으로 1만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내 이성(여기서 이성이란 남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고전 14, 19)라고 말했어요. 사실 방언하지 말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예요. 방언은 개인적인 것이지요. "혼자 엑스터시에 빠져 알지 못할 소리 해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공적으로 공유할 수 있어야 의미가 있지." "그러니 네가 받은 내용이 있으면 통역으로 남도 알게 하라"는 바울로의 말은 사적(私的)인 것이 되는 것에 대한 경고지요.

예수가 병을 고쳤으면 얼마나 고쳤겠어요? 그러나 예수는 한 사람을 상대할 때 그 사람의 문제를 사회구조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에게 이 한 사람은 개인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할은 개인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해방과 관련되어 있어요. '성령의 역할은 종말론적'이라는 말을 요즘 말로 하면 체제변혁과 관련되었다는 말입니다. 종말론적인 말의 의미는 인류 전체가 이 체제를 뒤집어놓아 윤리, 종교, 법 같은 것으로 짜여져서 빈틈이 없는 이 체제를 완전히 쓸어버림으로써 우리가 거기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할은 이러한 체제변혁과 인류해방에 있습니다.

오늘날 샤머니즘을 재평가할 때도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해요. 샤머니즘의 잘못은 개인의 한풀이에 그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는 결코 한 개인의 한을 풀었던 것이 아니라 인류의 한, 또는 어느 계층의 한을 풀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샤머니즘을 재평가할 때 샤머니즘의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샤머니즘(종교)적인 언어로 소통되는 사람들이 있고, 물질적인 언어로 소통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 선생님, 끝으로 우주적 그리스도론과 민중 그리스도론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우주적 그리스도론 또는 문화신학을 민중신학에서 수용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성서의 하느님은 결코 우주적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하느님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대개 형이상학적인 신은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대답으로서의 신이에요. 말하자면 세상의 문제가 풀리지 않으니까 신을 가설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성서는 결코 그런 신을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우주적 그리스도라는 사고는 일단 성서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우주적 그리스도가 전혀 불가능하다는 건 아닙니다. 민중사건에서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지만 이것만이 영원불변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단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민중사건을 통한 구원이 진리라는 말이지요.

▶ 선생님, 그럼 미래학에서 말하듯이 '놀이'가 생활의 중심이 되는 그런 시대가 도래하면 민중신학의 효용성이 없어진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현재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을 영원불변한 진리로 고집하지 않겠다는 말이지요. 내게는 우리 시대에 절실한 증언밖에 할 권리가 없어요. 요즈음 문화신학적 언어는 노동에서 산출된 언어가 아니고, 그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지적이고 인위적인 사회집단 사이에 통용되는 언어예요. 땅이나 노동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한가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음악을 즐기듯이 신과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지적인 수수께끼를 풀고, 문화적 삶에서 문제 되는 것을 문화적 언어로써 풀어주는 것이 문화신학이라고 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문화신학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도 김용택의 시를 읽어준다든지, 민중사실을 들려주는 것이 더 절실하지, 문화적 그리스도나 우주적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납득시켜 구원이 온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음악도 원래는 노동의 리듬하고 관계가 있었는데 지금의 클래식은 궁중음악 아니면 교회음악이지요. 이것은 이미 노동에서 떠난 전혀 다른 세계의 음악이에요. 우리도 노동의 생산현장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쉽게 그런 음악에 젖어들 수 있어요.

그리고 우주적 그리스도는 주로 인도의 지식인들,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회적 신분이 아주 높은 사람들이 표방하는 신학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그런 신학을 내세워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 나는 상당히 회의적이에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일수록 민중 그리스도론에 귀를 기울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거꾸로 생각해서 삶의 현장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우주적 그리스도가 필요한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감 하나를 가지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을 우주적인 영역으로 끌고 가면 좀 해방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에는 감밖에 안 보이니까 우주적 그리스도를 아무리 설명해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언어를 모르는 그들로서는 그런 신학을 아니 그런 이야기 자체를 이해할 수도 없을 거예요.

▶ 선생님께서 이제까지 말씀하신 민중 그리스도론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나 신학자들은 고통받는 민중현장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인식하고 그 현장에 동참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만, 고통 받는 민중 자신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누가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일까요?

몰트만도 "그리스도와 민중이 동일하다고 하면 그 민중은 누가 구원하느냐?"고 물은 일이 있어요. 그 물음에는 민중을 구원할 분이 저 밖에서 와야 한다는 전제가 이미 깔려 있어요. 그러나 나는 민중이 민중사건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속죄론을 빼더라도 여기서는 '구원'이란 말이 문제가 됩니다. 가난과 고통에 대해서 어떤 부정적인 가치관을 가지고서 거기서 벗어나는 게 구원이라고 생각한다면, 고통이 기쁨이 되고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는 것이 구원이겠지요. 그러나 이런 논리에서는 해방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놀랍게도 예수는 거기에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가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여기서 의미가 모호한 '구원'이란 말 대신에 '해방'이란 말을 쓴다면, 민중의 해방은 민중 스스로 하는 거지요. 민중이 자신들의 고통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고통이 혼자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당하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통을 나눠가질 때, 해방을 위한 힘을 얻게 되지요.

저는 민중이 아닌 사람들이 민중해방을 위한 전략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민중해방은 민중이 스스로 하는 것이고 그 전략도 그들 스스로 발견을 해요. '내 가난의 슬픔'을 '우리의 가난의 슬픔'으로 바꿔놓으면 자연히 구원운동으로, 해방운동으로 나가게 됩니다. 지금 김용택 시인이나 박노해는 구원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구원운동은 의식분자들이 전략을 짜고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전투지휘를 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준다고 하는 공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가고 있어요. 공산주의의 그런 태도에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고 봐요. 이에 비하여 민중신학에서는 민중 속에서 메시아사건, 구원사건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처방을 가지고 구원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그리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김용택 시인도 국민학교 교사니까 땅을 파는 농민은 아니지요. 예리하게 보고 부지런히 증언하고 거기에 참여하지만 그래도 거리는 있는 것 같아요. 예수 역시 농촌을 두루 다녔지만 땅 파면서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지요. 직접 당하는 사람이 아니면 완전한 일치나 나눔은 불가능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내가 구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온다고 하는 기본적인 신학적 언어들이 옳다고 봐요.

다시 몰트만의 얘기로 돌아갑시다. 민중과 예수를 일치시키면 민중은 누가 구원을 하느냐고 말할 때 몰트만은 민중을 자명하게 아는 것처럼 전제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민중이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한 일이 없어요. 나는 민중이 불쌍하고 처참하고 착취만 당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아요. '민중은 비참한데 나는 잘산다. 그래서 미안하다.'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가치기준을 바꿔놓는 게 중요해요. '오히려 나는 참 형편없는 존재다. 나는 주변으로 밀려나 있다. 너(민중)는 역사 한복판에 있다. 너는 생산의 주체자다'. 단지 민중이 그 생산의 결과에 참여하는 데서 소외되어 있다는 의미에서만 불쌍하지 생산의 주체자란 면에서 보면 위대해요. 그 눈에서 보면 착취하는 사람이 불쌍합니다. 이런 면을 보지 않고 민중을 가련하게 여기고 구원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봐요. 거꾸로 민중이 나를 구원하는 메시아적인 위치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몰트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라는 성서구절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지, 어떻게 민중을 가리키는 것이냐고 이의를 제기했었어요. 저는 민중을 함부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 민중의 고통은 예수 이전부터 있었고, 예수 당시에도 있었고, 또 지금도 있습니다. 민중이 존속하는 한 민중의 고통도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민중의 고통 속에서 우리가 메시아를 보고 그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가 고통당하는 민중과 동일시되는 면도 있지만 자신의 고통, 자신의 욕망에 매몰되어 있는 민중에게 공동체적인 기쁨을 가져다주는, 그 민중으로 하여금 공동체적인 해방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해방자로서의 예수의 모습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 자신의 해방과 민중의 해방을 분리시키지 않으려고 지금까지 얘기한 거예요. 예수의 생애 자체가 민중해방이고, 예수를 통해서 민중해방 사건이 일어나고 있지요. 예수의 고통과 십자가 죽음에서 민중이 고통을 당하고 민중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설명할 수 있어야겠는데, 언어가 모자라요. 그 언어를 발견해야 할 거예요. 우리가 주객도식에 빠지면 예수의 죽음과 민중 사이에 가교를 놓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람과 그리스도가 만나는 데서 일어나는 사건이 민중사건이고 메시아 사건이지, 메시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도하는데, 그것은 둘을 분리시키지 않으려고 그래 보는 거지요. 예수가 민중을 해방만 하는 게 아니라 민중이 또 예수를 해방하는 면도 있을 겁니다. 예수가 자기 자신으로서는 안 그래도 좋은데 계획을 세워 민중을 위해 운동을 일으킨 게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곧 민중을 해방하는 삶이 된 거지요.

예수는 전략가는 아니었어요. 그야말로 화육(化肉)된 사람처럼 예수는 자기를 철저히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곧 민중의 삶이고, 그의 죽음은 곧 민중의 죽음이고 해방이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이 스스로 구원한다고 할 때 예수를 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요.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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