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님, 과거에는 하느님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 자명한 전제로 받아들여졌는데 지금에 와서는 '신의 죽음'의 신학이 나타나는 등, 신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다고까지 얘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어떻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과거에는 하느님의 존재라는 것이 자명한 것으로 여겨진 데 반해, 지금은 인간사회가 발달함으로써 자명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하느님 없이도 사람들이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문제지요.
이것은 우리의 문제이기 전에 서구의 문제입니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최근이 아니고 벌써 나은 말이지요. 니체의 '신의 죽음의 선언'이 유명하지만 그보다 앞서 장 폴이 이미 그런 정황을 얘기했어요. 그런데 저들의 신의 죽음의 선언은 저들이 가지고 있던 재래의 세계관의 붕괴라는 말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유신론(有神論)은 하나의 세계관입니다. 즉 신의 세계, 생명 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설이었습니다. 세계 또는 삶을, 가시적인 것으로는 도저히 다 설명하지 못하고, 따라서 상존하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총칭을 '신'이란 개념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신은 사변(思辨)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계관이 과학의 발달로 무너지니까 자동적으로 그 신도 있을 자리가 없게 된 것이지요.
물론 사변의 신은 철학화된 신입니다. 서구에는 그러한 철학적 전통 말고, 성서를 통해서 전승된 신(神) 신앙이 있습니다. 서구의 지식사회에서 이러한 신 신앙이 그리스도교 문화를 형성하게 됐습니다. 그리스도교 문화란 바로 그리스도교 체제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교 체제를 뒷받침한 것이 신을 정점으로 한 서구 세계관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죽음'이란 그리스도교 신 신앙을 세계관화하지 않은 일반에게는 없고 지식인사회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은 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이용된 그 신은 바로 그 세계관에 예속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그 세계관과 운명을 같이하는 수밖에 없지요.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데 또 하나의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존의 신 사상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실감하는 데서 유발됩니다. 국제적으로 볼 때 동서의 냉전, 남북 종속관계의 심화, 각 국가 또는 민족 단위내의 독재체제와 그로 인한 부정과 불의가 폭력화되어서 뚜렷한 계층이 생기고 그 갈등이 심화되어도 물리적 힘 외에 어떤 힘도 개입하거나 그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경험적 판단이 그리스도교의 신도 인정하지 않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신 자체에 대한 문제이기 전에 신에 대한 표상의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교 교리에서는 신은 '전능하다', '전지하다', '무소부재 하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한다' 등등의 표현을 써왔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러한 신을 신앙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믿었다면 생활이 달랐을 것이고 따라서 역사 진행도 달랐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에 대한 관념과 신앙이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느 쪽이든 시정되어야 했습니다. 정말 위와 같은 표현으로 성서의 신을 제대로 설명한 것인가? 오히려 그러한 표현들은 인간이 자기 가치기준에서 가장 극점적(極點的)인 것을 신의 이름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하여간 그런 신은 정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밖에서 말하기 전에, 신을 믿는다는 그리스도교 자체 안에서 그런 신은 있지도 않은 셈입니다. 그러나 "죽었다"는 말은 우스운 말이지요. 왜냐하면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신은 죽었다"는 말은 사실에 대한 선언이라기보다 "신이여, 어디 있느냐?"라는 절규라고 본 하이데거의 견해가 옳을 것입니다. 칼 마르크스 같은 이는 신을 제거하면 계급사회를 형성하고 착취를 정당화하는 것들이 의지할 것이 없어지므로 기존질서를 깨뜨리는 데 전제조건이라고 본 반면에, 니체 같은 이는 신이 죽었다고 전제하니까 지금까지의 가치체계가 무너지므로 앞과 뒤, 위와 아래를 분간할 수 없는 혼돈에 빠지는 것을 경험하는 환상을 하고 있고, 대낮에 등불을 들고 신을 찾아헤매는 인간(자신)을 그렸지요. 그보다 앞서서 장 폴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예수가 처형된 후 사람들이 교회로 몰렸습니다. 그것은 처형된 예수가 교회에 내림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대가 전통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서구의 교회당 뜰에 공동묘지가 설치됐습니다. 큰 사원은 유명한 사람들의 시체를 보관한 공동묘지 자체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대에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말 처형됐던 그가 교회 제단 있는 데로 하강했습니다. 사람들은 환희와 기대를 안고 몰려듭니다. 그런데 다시 온 예수는 창백한 얼굴과 절망적인 모습으로 사후의 피안 그 어디에도 신은 없고 그저 공허뿐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때 무덤에서 부활을 기다리던 시체들도 다시 한 번 죽되 영원히 죽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로 유신론을 '조롱'한 폴은 다음의 말로 이 얘기의 끝을맺습니다. "깜짝 놀라서 일어나보니 그것은 꿈이었다. 아! 꿈이기 다행이지." 이 마지막 말은 니체의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신이 죽으면 기존질서가 파괴되며 그것은 바로 종말을 의미하니까 그런 현실이 아니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신이 어디 있느냐", "신은 죽었다" 등의 회의나 절규는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신에 대한 표상과 삶의 현실 사이에 괴리가 웅크리고 있는데서 연유합니다. 이전에는 신을 정점으로 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 왔는데, 그 세계관이 삶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지 못하고 어떤 해결의 힘도 없다고 판단됐을 때, 아니 그런 세계관, 그런 신관이 삶을 구속하는 상층 구조의 역할을 하니까 저들은 그것에 저항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