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사고는 신을 말하지 않거나, 말해도 신을 절대타자 또는 절대초월자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신과 인간이 영원한 평행선이 되는 이분법에 빠지지 않아요. 불교는 신을 말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무신론으로 규정해버리면 잘못입니다. 유교는 신으로서의 천(天) 또는 상제(上帝)라는 말을 써요. 그러나 서구의 신처럼 페르조나론(persona論, 품성론)으로 발전되지 않아요. 그러므로 유신론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외형적 판단이 크게 고쳐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서구의 유신론적 사고방식에서 종교를 규정하는 큰 잘못을 범했어요. 가령 불교에서 신이라는 말이 없어요. 그러나 불(佛)이 그 자리에 있지요. 유교는 천 또는 상제가 있으며 도가(道家)에는 도(道)가 그 자리에 있어요. 그런데 저들은 유신론도 무신론도 전개하지 않아요. 가령 공자가 '귀신'(鬼神)에 대해서 질문 받았을 때 "사람도 능히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능히 귀(鬼)를 섬기리오"(未能事人, 焉能事鬼: 先進 편)라고 한 것과 또 그가 "신을 괴(怪), 역(力), 난(亂)과 더불어 말하지 않았다"(述而 편)는 등의 발언에서 그는 비종교적이었다고 하는데 그것들은 무신론 범주에 넣고 판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산에게 제사드릴 때 신이 실재하는 것처럼했다는 말을 듣고는 "내가 그것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것은 참제사라고 할 수 없다"(祭神如神在子曲 吾不興祭不祭: 八佾 편)라고 하며 그가 제(祭)에 대해 정성을 다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예(禮)도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상형글자인데 이 예는 바로 종교행위이며 유교의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천(天) 또는 천명사상(天命思想)입니다. 그는 그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 안연(顔淵)이 죽었을 때, "아, 하늘이 나를 버렸다, 하늘이 나를 버렸다"(噫 天喪予, 天喪予: 先進 편)라고 통곡했는가 하면, 세상이 자기 마음을 모른다고 하면서 자신을 말하여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삶의 주변에서부터 배워 위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나를 아는 이는 하늘뿐입니다"(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平 : 憲問 편)라고 하고, 50에 천명(天命)을 알았다고 하며 천명을 운명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유교에 대해서 종교임을 거부하는 간단한 기준은 신앙에 해당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다음 두 시각에서 그런 판정을 자성(自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른바 '신앙'이란 것을 그리스도론적인 의미에 국한함으로써 성서의 신앙을 너무 좁힘과 동시에 다른 종교를 보는 눈이 흐려진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신앙의 강조는 서방 교회의 전통인데 반하여 동방 교회에서는 그것 대신에 하느님의 찬양이라든가 체험 등이 강조되는데 성서에도 이런 면이 엄연히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서의 '피스티스'(pistis, 믿음)는 결코 그리스도론적인 협의의 것만이 아니라 자기를 어떤 절대의 품에 맡기는 신뢰 같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가령 불교의 무의식 세계로까지 탈아(脫我)하려는 것은 자신을 아주 내맡기는 행위이며, 노장(老莊)의 무(無)나 무위(無爲)의 강조도 인간의 어떤 기능이나 기교에 의존하려는 온갖 자기방어 장치를 해체해버리자는 것으로, 그것은 보다 큰 믿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나는 동양적 '신앙' 자세에서 주객도식이 없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 'OO을 믿는다'나 'OO에 내맡긴다'보다는 그저 '믿는다', '내맡긴다'가 더 옳아요. 딴 말로 하면 불교나 노장은 객체로서의 신을 말하지 않으니까! 무신론적이라는 판단은 너무 피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