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의할 점이 있어요. 그것은 신과 역사 그리고 해석자를 선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는 대전제가 문제입니다. 신은 역사(그리고 해석자)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역사나 해석은 따로 그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옳은지요? 우리가 구약에 나타나고 예수에게서 나타난 신 외에 다른 신을 말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역사 밖의 신이 우리의 인식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신이며 비록 우리 인식 안에 들어오지 않고서 실재하는 신이 있다고 해도 그와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우리가 그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없다고 봐요. 요는 체험하는 신만이 신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문제가 제기될 테지요. 지금 질문에서 말한 것처럼, 성서에만도 그때그때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서 다양한 신이 전해지는데, 그중 어느 것이 참신일까? 방금 '왜곡된 신'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어떤 기준이 있어서하는 말이 아닐까? 방금의 질문자는 자기 나름대로 경험한 신이 있어요. 그것을 기준으로 '왜곡'이니 '참모습'이니를 말할 수 있어요.
나는 예수가 보여준 하느님을 전거(典據)로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민중 편에 선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구약의 다양성 속에서도 일관된 맥을 짚을 수 있게 됐어요. 민중을 향한 예수의 사랑이 조건 없이 일직선을 그으니까,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참모습이라고 보게 됐어요.
그런데 거기에도 문제가 있어요. 신약에서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소개하는 방식이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복음서, 복음서 중에서도 특별히 마르코의 것을 선택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질문이 열쇠 역할을 할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그 짧은 글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마르코의 주제를 여러 가지로 보았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메시아 비밀' 또는 '임박한 종말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수난사를 마르코의 중심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두 그리스도론의 시각에서 보았습니다. 나도 맨 처음에는 그처럼 그 어느 쪽의 뜻을 따르거나 취사선택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 내 눈에 비친 마르코의 중심은 민중이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마르코복음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동안 그것에는 색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색맹을 치유했나? 그것은 60년대말, 70년대초부터 서서히 관심하기 시작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수난받는 민중사건에서 온 것입니다. 민중과 '대중'을 따로 구별하지 않고 오히려 멸시의 대상으로 여기던—그것은 키에르케고르와 그리고 사회학의 '대중론'에서 받은 영향인데—사고가 잠재해 있던 나에게는 일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구원이니 해방이니를 말하면서, 아니 사랑을 구두선(口頭禪)처럼 외우면서도 수난당하는 민중을 의면한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던가? 그것은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했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적 체제에서 왕권(王權), 부권(父權) 등이 가치의 절정이었기에, 하느님을 그리고 예수를 그런 시각에서 군림하는 이로 높였기 때문에, 예수와 더불어 살던 민중은 전혀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어떤 의미로나 군림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는 가난한 자, 그리고 피압박자였습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결코 민중의 운명과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민중을 뺀 예수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명약관화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인 것은 성서를 보면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장에서 당하고 있는 민중사건에 접하면서였습니다. 예수의 사건과 민중사건은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다른 두 이야기인데, 나는 그것이 맥을 같이하는 한 사건의 연쇄적 폭발로 본 것입니다.
그러면 '민중사건이 전거이지 예수사건이 전거가 아니지 않느냐?'는 물음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사건 없이는 민중사건이 바로 하느님의 자기실현의 장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고 또 민중사건에 접하지 않았으면 예수사건이 민중사건으로서 하느님의 사건이 됐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니 둘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