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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사건의 전거

▶ 하느님 사건을 판단하는 데 예수가 전거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나 또 일반 사건들에서는 하느님사건을 경험할 수 없습니까? 서남동 선생은 민중신학의 전거로서 성서, 교회사, 그리고 한국사를 삼고 있는데요.

나는 예수사건에서 하느님사건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는 예수사건이 유일한 전거입니다. 그러나 예수 외에는 하느님 사건을 체험할 길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어요. 까닭은 내가 그 길을 가보지 못했으니까! 내게는 그리스도교의 신이 참신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는 신을 모른다거나 또 거짓이라고 할 권리가 내게는 없어요. 어떤 종교인이나 그의 길에서 신을 경험한다면 부정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나는 예수 안에 있는 경험에서 비로소 신 안에 있었다고 생각지 않아요. 예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순간 나는 이미 신 안에 있는 나를 발견했어요. 그전에는 종교인이 아니었어요. 유교의 분위기에서 자라고 불교에도 접해봤지만, 종교인이라는 생각은 없었고 그리스도라는 이름도 처음 들었어요. 그런 상태에 있던 나인데 나는 하느님 안에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불교도나 마호메트교도나 심지어는 무종교를 표방하는 자들이라도 '하느님 안에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아들 딸이다'라고 생각하는 데 어떤 방해도 받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을 방해하는 것은 이른바 유신론입니다.

나는 유신론은 무신론과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봐요. 신학에서는 일반사(一般史)와 구속사를 구별하는 논법, 또는 성속(聖俗)의 영역을 구별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로써 종교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대신 신이 축소됩니다. 결국 독점욕이 신에게까지 뻗친 셈이지요. 나는 다른 종교들, 철학서둘, 문학작품 그리고 예술작품 등에서도 신의 사건을 경험할 수 있다고 봐요.

▶ 마르코복음 같은 경우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인의 편이다"라고 하는 예수의 당파성을 보이며 "사람들을 회개시키러 왔다"라고 하는데, 신약내에서의 하느님 이해도 다양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래서 예수의 이야기를 특별히 강조하는 거예요. 여기서 "하느님 나라는 지금 실현되고 있다"라는 것과 예수의 행태를 분리시켜서는 예수와 민중의 관계는 설명이 안 돼요. 예수에게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사실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하느님 나라는 지금 실현되고 있다"는 신념이 예수에게 있어서 일직선을 긋는 하느님의 가능성을 열어췄어요. 그런데 예수식으로 살면 기존질서가 다 파괴돼요. 그 신념이 후퇴했을 때 세상의 질서를 걱정하게 되고, 제도적인 교회를 생각하게 되고, 따라서 너무 한쪽으로 편중해서는 안 되겠다, 민중만 위해도 안 되겠고 모두 다 각기 있을 자리를 마련해줘야 되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질서가 필요해진 거죠. 그래서 다시 윤리와 질서를 세우게 돼요. 그건 바울로에게서 이미 시작됐어요. A.D. 60년대 아니 A.D. 50년대부터 시작이 되었어요. 그 발전과정은 복음서들을 비교하거나 바울로의 편지와 제2바울로서신 등 후기의 편지들을 비교하면 확연히 드러나요. 처음 초대교회가 종말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했을 때는 개인소유를 포기하는 공동체가 가능했는데, 그런 기대가 후퇴되니까 생활양식도 달라지게 되고 그 다음엔 교회라는 질서를 만들게 되고 제도를 만들게 되는 겁니다.

민중신학 이야기의 민중교회론에서 나올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교회'라는 것이 하느님 나라 대신 땅에 자리를 잡게 된 거예요. 그런데 예수에게 있어서는 "하느님 나라가 지금 도래하고 있다"라는 것으로 일관할 수 있어요. 여기서는 교회가 전제되지 않으며 반윤리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신념이 후퇴하게 되니까 다 달라지게 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민중사건을 기준으로 하여 다시 신약을 보면서 맥을 찾아 세워야 돼요. 종교개혁에서는 '믿음으로만'이라는 것을 가지고 전체를 가늠했지만 우리는 지금 민중사건이라는 것으로 전체를 가늠하고 맥을 잡자는 것으로, 이것이 새로운 운동이라면 운동인 셈입니다. 구약 전체, 신약 전체를 그렇게 보자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었기에 비로소 복음이 아니고, 예수가 민중과 더불어 일으킨 사건이 이미 복음이에요.

▶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질문이 되겠는데요,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하느님 안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만남으로써 이전에도 그런 처지에 있었다는 것을 단지 확인하게 될 뿐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과 안 믿는다는 것은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을까요? 그리고 여기에 곁 들여서 질문을 드린다면, 하느님을 전제하지 않고 논의를 전개하는 것, 이를테면 유물론 같은 것과 하느님을 전제로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가령 이런 예를 봅시다. 불트만이 자기는 하느님을 전제로, 역시 하느님을 전제한 성서를 통해서 인간이해에 도달했는데, 그런 전제 없는 하이데거의 인간이해가 거의 똑같은 언어로 똑같은 이해에 도달한 데 놀라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사람이 그의 문학 작품에서, 오늘 현재 신약신학이 도달한 것보다도 훨씬 더 확실하게 예수의 현실에 접근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그가 성서를 철저히 연구했다거나 신심(信心)이 두터운 데서 온 통찰력이라고 보이지는 않아요. 그는 러시아인 일반이 지닌 정도의 성서와 예수에 대한 상식을 갖고 있었는데, 삶의 철저한 경험에서 세상과 인간을 일반과 전혀 다르게 보고 그 눈에서 그리스도교를 해석했을 것이라고 봐요. 일본의 아라이 사사쿠(荒井 獻)가 『예수의 행태』 후기에 자기는 일정한 방법론을 가지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에 도달했는데,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방법론 없이도 예수의 현실을 놀라울 정도로 겨냥하고 있다는 경탄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방법론이라는 것은 유일한 게 아니라는 얘기를 했어요. 여기서 방법론이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면, 예수를 믿음으로써 도달한 결론과 믿지 않고도 도달한 결론이 같다는 얘기예요.

나 자신은 예수 때문에 저들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고도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과 믿지 않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냐? 물론 차이는 있어요. 그것은 어떤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반응하는 것과 몰랐을 때 반응하는 차이와 같겠죠. 이 정도밖에는 말 못하겠어요.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의 답변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는 신을 전제로 한 사람만이 반드시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살 수 있다고는 말 못한다고 봐요. 그 판단은 나의 소관이 아니라고 봅니다. 마지막 판단은 하느님이 하시는 거겠지요. 신이라는 말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의식 속에 부각시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을 전제로 한 사람보다도 더 개방된 마음으로 신의 뜻을 파악할 수도 있고 이룰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요. 가령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전제하지도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증오를 하면서도 실제로 민중사건에서는 앞서고 있다고 할 때, 저 사람은 예수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없어요. 한걸음 더 나아가 실제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내 쪽보다도 예수님은 저기에서 활동하고 있다라는 고백이 가능하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하느님 또는 예수를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름을 부른다고 예수를 독점하나요? 내가 의식한다고 독점하나요? 정말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 숨은 예수가 그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기본적인 것이라고 봐요.

▶ 그러면 예수를 얘기하고 신을 얘기하는 것을 효용성이라고 하고, 예수를 전제하거나 하느님을 전제로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에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전제하지 않은 사람이 더 나을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나 신을 이야기하는 효용성은 실존적인 나에게만 관련되는 것일까요?

내가 독일에 있을 때, 브라운이 신약의 문제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신약 안에는 그리스도론, 구원론, 교회론이 모두 다 연속성은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신약의 주제가 무엇인가 하는 최종적인 결론으로 "하느님 앞에 너는 허락받았고, 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거기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켰어요. 그때 내가 "당신이 그런 자세로 전도설교(Missionspredigt)를 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묵묵부답입니다. 그때 곁에 있던 케제만, 보른캄 등이 다 나서서 그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고 다그치니까 그제야 "Missionspredigt? Ich weisse nicht, aber ich kann predigen"이라고 해요. 무슨 말이냐 하면, "'너 부처님 믿어서는 안 돼, 예수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어'라는 말은 못하겠다. 그러나 나는 설교는 할 수 있다." 그 말은, 내가 경험한 바대로 예수를 증거할 수는 있다는 말이지요! 그때는 정말 못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대답이 진실하다고 생각을 해요. 누구에게나 경험이 중요해요.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이런 과정을 통해서 경험을 하고 있고 하느님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너는 틀렸다', '다른 길은 없다'라는 얘기는 못한다고 봐요. 나는 이것이 예수 앞에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또는 교회가 하느님을 독점했다고 할 수는 없고, 단지 '내가 경험한 차원에서는 이렇다' 하는 증거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민중사건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저기 하느님이 활동하신다', '그리스도가 활동하신다'고 증거할 수 있어야해요.

▶ 이제까지 말씀하시는 가운데 나와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정리하는 의미에서 질문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종교에 따라서 혹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자연을 통해서 신을 인식하고 자연 속에서 신을 경배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자기의 인생관이라든지 자기의 삶의 태도를 규정짓는 존재로서 신을 인식하는 경우, 또는 자기의 내면 속에 심리적으로 경험되는 경건한 감정을 신으로 인식하는 경우 등 신을 인식하는 데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예수에게서 나타난 그 하느님은 또는 성서에서 나타난 그 하느님은 어디에서 볼 수 있는가, 또한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은 어디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가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자연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자연에서 신을 경험한 체험이 없어요. 소설 하나 읽어도 자연 묘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안 가고 인간 묘사에 집중하게 돼요. 이를테면 톨스토이하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끌려요. 톨스토이에게는 자연 서술이 많아요. 나는 예수에게서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면을 봐요. 밤낮 자연 속에서 살면서도 거기에서 출발하지 않고 사람을 보고 있어요.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을 경험하거나 또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 산비의 경지를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사람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만—내게는 말이에요—하느님을 만나게 되지, 그외에는 없어요.

이제 두 번째 질문과 연결시켜서 생각하면, 나는 불트만이 한 말 그대로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입장에 있어요. 여기서 인간학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거예요. 우리는 인간을 보는 길밖에 없어요. 우리는 하느님을 못 봐요. 우리는 태양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태양에 의해 비추어진 만물을 보는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이 만물을 보게 하는 태양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다시 말해, 사람을 설명하려다보니까 결국 하느님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신학이 하는 일이지요! 소위 인간학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만을 보는 데 반해, "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할 때, 독존적(獨存的)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이웃과 더불어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문제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사람이 이웃과 더불어 희비애락 속에서, 사건 속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다는 것밖엔 몰라요. 그런데 구약에는 하느님을 직접 보면 죽는다는 말도 있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 신이 실제로 임재(臨在)한다는 것은 종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사는 여러 모습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고, 여기에 선학적 설명이 들어가야겠죠. 가령 우리가 예수와 민중의 사건 중에서도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그 절정이라고 본다면, 그 짓밟히고 쓰러지는 와중에서도 예수와 민중의 부활이 일어난 것을 보는 데서 참 궁극적인 하느님의 임재, 하느님의 계시를 볼 수 있다고 말을 해야 되겠지요. 여기서 나는 십자가사건과 민중사건이 직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을 분리시켜놓고 볼 때는 십자가는 마술적 대상이거나 의식(儀式)의 대상밖에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형식적인 예배, 즉 성례전이라든지 설교라든지 하는 데서 하느님을 만난다기보다는 민중의 해방을 위한 꿈틀거림 속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겠지요.

지금 소위 말씀의 신학에서는, 불트만이나 바르트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자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유일한 장이에요. 그러나 나는 설교 자체, 성례전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고 봐요. 설교가 역사 속에서 사건을 일으키게 될 때, 성례전도 역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듯 역사 안에서 함께 나누어 먹는 사건으로 화할 때에만 거기서 하느님을 만날 수가 있어요. 기도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 거기서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때는 당연히 민중사건이겠지요?

물론이에요. 저항이 일어나고, 사회구조가 변동이 되며, 해방이 일어나는 민중해방 사건입니다.

▶ 선생님께서 아까 말씀하신 "하느님 앞에서 너는 할 수 있다"라는 말의 의미를 민중 쪽에서 보면 참해방의 선포가 되고 은총이 되는데, 가진 자 즉 지배자 쪽에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게 되면 무서운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입을 통해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그랬는데, 이를테면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자들, 세계의 부(富)를 독점하고 있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하느님이 없으면 좋을 거예요. 그것은 종전의 하느님이 율법의 하느님, 윤리의 기준으로서의 하느님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하느님이 계신다고 하더라도 "너는 할 수 있다"라고 한다면 또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구 신학이 "하느님 앞에서 너는 할 수 있다"라고 말할 때 거기에 민중적인 입장, 즉 당파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참으로 무책임한 얘기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같은 사실이 얘기되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예수가 말을 한 대상은 사실은 가진 자들이에요. 그들에게 민중 사실을 얘기해요. 특히 루가복음에서 이 점이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민중사건이에요. 그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만이 그들에게 구원이 가능하다는 거예요.그런데 그들은 예수에게 안 옵니다.

▶ 그러니까 결국 그것은 민중들에게는 해방의 선포가 되고, 부자나 권력자들에게는 심판의 선언이 되겠지요?

물론이에요. "모든 걸 다 버리고 나를 좇아라"했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한 거예요. 이런 문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불트만은 개개인에게 선포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 그리스도론 이야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교리적으로 얘기되는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삼위일체론 같은 것은 상대를 안 해요. 성서에는 없는 것이고, 그저 하느님을 설명하는 데 편리한 도구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봐요.삼위(三位)라는 말까지는 신약에 나온다고 할 수 있는데 일체(一體)라는 말은 안 나와요. 사고를 전개하는 데 필요하다면, 그런 도구를 써도 상관없지만 페르조나(persona)라는 개념을 갖고 성령을 설명하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도 보고, 하느님도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도, 성령도 페르조나로 보는 존재론에 빠지지 말고 사건으로 보면, 그것은 민중에게서 일어나는 여러 양상의 다른 표현이라고 봐요. 민중 자체는 개개인을 보거나 한 집단으로 볼 때 대단하지 않아요. 그러나 거기서 '자기 초월'의 사건이 일어나요. 난 이것을 하느님의 선교, 예수운동의 연속, 성령의 임재라고 부를 수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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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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