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 후에 하느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이루어지지 않은 그 자리에 교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불가피하며 또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떤 성격의 공동체여야 할 것인가?
먼저 지적할 것은 민중전승에서 서술된 예수의 현장인 민중이 그 공동체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민중이 주도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이에 따르면 민중과 예수의 만남, 민중과 예수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 속에서 '참교회가 무엇인가'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민중신학은 바로 예수와 민중이 만나는 그 현장에서 교회의 원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 공동체는 종교적인 특권층이나 또는 선별된 사람들이 주도하는 것도 아니요, 또한 비종교적인 영역과 담을 쌓은 특수 영역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와 민중이 더불어 있는 공동체, 예수의 공동체, 그것을 교회라고 전제한다면 일반 사회운동 공동체와 다른 것이 없어야 된다는 말인가? 그런 물음을 전제로 다시 예수의 현장과 예수의 민중 공동체의 원초적 모습을 봅시다.
예수가 민중을 허허벌판에서 아무 한계 없이 만났다는 말은 그 공동체가 일반 사회의 도덕ᆞ종교적인 범주나 규율에 매이지 않고, 특별히 제의적인 어떤 전제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보다 적극적인 대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천지개벽에 참여한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이 새 나라에 사람들을 부릅니다. '부른다'는 것은 꼭 '열두 제자를 부른다'는 그런 의미만은 아니고 예수에게 모여들게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라는 선포에 호응하여 모인 것이 바로 예수의 공동체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도래함으로써 지금 세계에는 이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이 종말적 순간에 지금 모인 공동체, 그것이 교회의 원모습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냐, 현재적인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독일계통은 늘 미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앵글로색슨 계통은 도드(C.H. Dodd)를 위시해서 소위 "실현된 하느님 나라"(realized eschatology)라고 주장합니다만, 확실한 것은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 이미 하느님 나라는 '지금 실현되고 있다',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 '도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앞에서 모든 가치관이 달라졌고, 그 앞에 모이는 사람들의 계층성이 달라졌고, 그들에게 요청하는 것도 달라졌습니다. 이 교회는 결코 희랍에서 말하는 에클레시아 같은—폴리스에서 에클레시아의 역할은 법을 만들고 모든 질서를 만드는 소위 의회와 비슷했다—것이 아니고 오히려 결과적으로 기존적인 모든 질서를 다 무너뜨리는, 어떤 의미에서 거기 모인 사람들이 의식했든 안 했든 기존의 것들을 거부하면서 새 나라가 도래하는 데 참여한 것이 바로 교회의 원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것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예수는 이 사건 앞에서 "하느님 나라가 오고 있다", "지금 도래하고 있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고 외쳤고, 그 소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과거의 가치로 평가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무조건 받아들입니다. 그 소리에 응해서 모인 그들에게 '네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새 백성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설교지요. 이것은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고는 감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산상수훈 같은 것도 역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현장에 있는 그 공동체의 성격을 선언한 것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고 봐요. 지금 가난한 자, 지금 우는 자, 지금 배고픈 자, 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우선한다는 말은 그 나라 도래의 현실을 서술한 것이라고 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달려오고, 우는 사람들이 달려 오고, 수난당하는 사람들이 달려오는 데에 하느님 나라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는 너희들의 것이다. 배부르고 권력 가진 사람들은 오지 않으니까 저들은 자동적으로 배제된다.' 그들은 스스로 그 나라를 포기한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병 든 사람이나 정신병 든 사람을 고치는 것 등등은 전부 다 그런 전제 밑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고 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형성의 뿌리지요. 마르코는 분명히 바울로에 의해서 상당히 틀이 만들어진 교회관에 대해서 이런 놀라운 민중전승의 예수공동체의 원모습을 우리에게 전함으로써 벌써 도식화되고 권위주의화 된 교회와는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