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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이러한 변천을 거쳐서 교회는 점차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어 함께 사는 이가 되는 대신 예배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바울로에게서 역사의 예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 지금 실현되고 진행되고 있는 사건으로서의 하느님 나라 도래 사건에 놀라 모여든 무리들의 공동체를 교회라고 본다면, 교회의 본질은 어느 정도 밝혀지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내림의 지연으로 인해 일단 기다림은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되고 나서 성서가 기록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 교회가 하나의 제도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 전까지 소위 가톨릭교회라는 것이 지배하여왔습니다. 그 교회는 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고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는데, 종교개혁에서 이 점을 많이 시정하고 개혁을 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역시 가톨릭의 교회이해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은 채 지금까지 교회를 말해왔습니다. 그러면 2천 년간 계속되어온 기존 교회를 위에서 지적된 예수공동체라고 하는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요? 말하자면 그것은 원래적인 교회공동체의 본질에서 이탈된 것이라든지 아니면 어떻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 말은 기존교회를 그대로 살리면서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길은 없겠는가 하는 염원 같은데, 결국 그 말은 혁명이냐 개혁이냐라는 물음과 같다고 봐요. 그 언저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기존교회가 성립되어 오늘의 모습으로 정착된 과정과 실상을 다시 성찰하는 일이 앞서야 할 것 같군요.

이미 지적한 대로 예수공동체는 재빨리 제도적 교회형태를 띠게 됐습니다. 제도적 교회형태의 불가결의 요소는 지도층이 예수와 민중의 중간에 있어 그 권위를 주장하게 됐고(사도권, 후에 감독 등), 교회의 특수성을 성격화하기 위해 새크러먼트 제도가 생기고, 여러 가지 그리스도인에게만 적용되는 규율이 생기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태화되어 자체를 세상에 노출하면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바로 제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세상의 권력이나 제도 그리고 가치관 등과 타협하게 됐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다교라는 것을 크게 의식하고 그것과 타협하다보니까 율법적으로 됐고, 이방 그리스도교회는 로마제국, 그리고 헬레니즘 문화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탈정치화, 헬레니즘 문화권에의 토착화 등의 양상을 띠게 됐습니다. 그것은 어떤 공동체든 겪어야 하는 현상일지 모르나,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예수와 민중이 직접 마주하는 현장, 그 사이에 어떤 것의 개입도 필요하지 않은 그 사귐의 모습은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일부에서 예수사건의 전통을 생활로 고수하는 세력이 있어서 늘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운동이 로마제국에 '흡수'되면서부터 변질된 그 상태를, 교리나 제도로 고정화해버리게 된 것입니다. 탈정치화하면서 실은 정권의 앞잡이가 되고, 새크러먼트는 계속 늘어가고,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여 마침내 법왕제도를 만들어 베드로의 후임임을 자처하나, 실은 베드로의 후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한을 양도받은 이상의 권위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법왕무오설(法王無誤說)로까지 발전했지요. 언제 베드로가 무오(無誤)했던가요? 그리고 하늘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베드로가 가졌다(마태 18, 19)는 것을—이는 마태오에서만 볼 수 있는 구절이고 원래 본문인 마르코와는 상반되는 것인데(마태 18, 13~20; 마르 8, 27~30 비교)—크게 내세워 법왕이 사실상의 신권(神權) 대행자로 자처했지요. 이런 제도 아래서 지금의 도그마의 근간이 형성됐고, 교회론이 성립됐습니다.

종교개혁이 만인사제설을 주장하고 성서해석권을 법왕에게서 박탈했다고는 하나 실은 반(反)법왕 싸움이고 헤게모니 싸움이었지, 제도적인 교회론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서를 대중의 언어로 번역하여 모두의 것으로 한 것 등은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왜 이렇게 종교개혁까지도 낮게 평가하는가 하면 종교개혁가들도 중세기의 교회관의 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계속 봉건영주들의 권력을 배경에 업고 싸운 것, 바로 그런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기에 뮌처(Thomas Münzer)가 대변하는 농민들의 고통에 대해 그렇게 잔인하게 대처했고, 칼뱅은 교리에 상반된다고 수많은 사람들을 사형에 처할 만큼 법왕 아닌 법왕의 자리를 고수한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예수사건, 특히 예수와 민중의 만남의 현장을 서술한 복음서를 과소평가 내지 묵살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저들을 거쳐서 수립된 교회관은—이것은 성서관이나 성례전관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현재까지 기존교회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민중신학의 교회관은 어떤 입장에 있으며, 또 있어야 하나? 민중신학은 민중과 예수의 만남의 장(場)을 기점으로 교회를 생각하자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 말은 민중신학은 유별나게 새로운 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서술한 교회형성에 저항하면서 제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뿌리에서 교회 자체의 모습을 찾게 하자는 것이지요.

이미 거듭 말한 대로 제도적 교회형태의 싹은 일찍 발생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다교를 모방하였고, 이방 그리스도교회는 희랍적(의회제도 같은) 에클레시아의 영향을 받으면서 제도화해가면서 그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계속 여러 조건(교리 등등)들을 만들어나 갔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교회가 특정장소에 고착될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 담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제국 안에서 존립 하기 위한 자위책이기도 했습니다만, 하여간 그런 과정에서 교회는 비역사적 케리그마, 즉 도그마로 무장한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의 민중들은 예수와 민중이 만난 사건을 계속 반복 전승해나갔는데, 그것은 비공식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습니다. 까닭은 교회의 지도층이 그것을 공식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민중들은 예수와 민중 사이를 가로막는 교권으로서의 사도권에 도전했으며, 예수공동체로 들어가는 제반 조건인 새크러먼트 따위를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사건의 정치성을 그대로 전승했습니다. 더욱이 예수와 민중, 즉 가난한 자, 병 든 자, 눌린 자 등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크게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복음서에 전승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제도교회에 대한 원초적 저항운동이라고 봅니다. 그후에도 계속 이 계보에 속한 흐름이 이어져왔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제도교회에 의해 무시되거나 아니면 이단자로 처형됐습니다. 따라서 이 흐름은 어쩔 수 없이 '종파'라는 규정을 받으면서 적은 무리로 그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민중신학은 바로 이 민중들에 의해서 전승된 계보에 서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운동이 기성교회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게 될 것이냐'는 물음이 나올 것입니다.

예수공동체의 컨텍스트는 종말론적인 것이 생명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예수와 민중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이 종말의식이 기존체제를 자동적으로 폐기하게 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기존의 것, 정치윤리는 물론 종교마저도 기득권이 인정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중적 만남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루가복음 4장의 예수의 공생애의 선언은 이것을 잘 표현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종말의식이란 지속하기 힘듭니다. 까닭은 그것이 기존적인 것과의 계속의 충돌을 의미하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점차 교회는 종말적 요소를 교회에 흡수하고, 교회를 특수영역화하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기존체제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완충지대 형성의 작업을 한 것이지요. 이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와 세계는 상관없는 것이 되고,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종교피안적 그리고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됐습니다. 이와 더불어 윤리교리가 점차 표면에 나서게 되고, 그것이 민중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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