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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것이 극복돼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바울로는 가령 고린토교회내에 가진 자와 가난한 자, 유다인과 비유다인, 가문이 좋은 자와 이름이 없는 자 등등 사이의 알력이 있는 것에 분노하여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어 평가해야 한다고 했으며, 가진 자들을 공격도 했고, 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주인과 종, 유다인과 비유다인, 남과 여의 구별이 없다고 선언했어요. 그러나 기존질서 안에 있는 교회라는 것을 자인하는 한 이런 주장은 정신화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없지요. 그러므로 점차 교회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의 사유가 이원론적으로 기울게 될 방향이 이때 이미 설정된 셈입니다.

참공동체는 바로 이 기존사회의 가치관을 극복해야 하며 따라서 교회 안에 있는 사회적 계층성이 극복돼야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일반 사회처럼 사회계층성이 그대로 반영된 것은 아닙니다. 까닭은 그것이 '종교적 집단'이라는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내에 교권이 형성되었고, 종교귀족이 등장하고, 교역자와 평신도 사이에 사회의 신분계층에 뒤지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계층성이 생긴 것입니다. 교역자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다스리는 자로 군림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일찍부터 생겨서—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시작되기 전 종교 일반의 영향을 빨리 받아 된 것인데—요한복음에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줌으로써 제자들(지도자들)의 역할이 바로 섬기는 데 있음을 강조했고, 마태오에는 '스승'이란 이름으로 권위를 부리는 현상이 두드러졌기 때문에 스승은 한 분 예수뿐이니 사람 사이에는 스승과 제자가 있을 수 없다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계 안에 있는 한, 가진 자와 가난한 자, 권력권에 있는 자와 이름없는 자가 공존하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가진 자, 권력권에 있는 자는 가난한 자, 이름없는 자의 권익을 옹호하고 섬기려는 자세뿐 아니라, 바로 가난한 자나 이름없는 자들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 하나라도 더 가졌기 때문에, 권력권에 있기 때문에 상실된 인간성을 발견하고 회복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진 자와 권력권에 속한 자는 가난한 자와 억압당한 자를 통해서 가진 것과 권력권에의 예속에서 해방되고, 또 가난한 자와 눌린 자의 해방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도 해방되고, 따라서 그 공동체가 해방의 공동체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도교회의 목회자나 장로들이 현실적으로 있으며 새크러먼트 제도가 있는데 그런 것들은 완전히 무시해버리라는 뜻이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집단이든 제도화되면 그 안에 질서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안에 직능의 분담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는 이같은 제도교회와 예수의 민중공동체 정신이 병존하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병존상태를 운명처럼 전제하고 거기 주저앉아서는 안 될 말입니다.

지도층은 다시 예수의 기본정신을 실현해야 합니다. 저들은 예수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들을 교회가 나가야 될 구체적 방향 제시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99마리의 건강하고 문제없는 양과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집을 나간 이른바 탕자와 '모범적'인 맏아들, 이들 중에서 언제나 사건이 일어난, 그러므로 소외된 축에 서야 하며, 단순히 그 편에 설 뿐 아니라 교회 전체가 잃어버린 자를 위해 총동원되는 기동력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도교회의 목회자들은 교회내에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으며, 권력자도 있고 약자도 있는데 복음은 그 모두에게 적용돼야 하지 않느냐고 하며, 민중신학은 도대체 편파적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비판하려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한 편파적인 예수에게 항의해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편파적이 아닙니다. 교회의 성원 전체가 바로 사건이 일어난 자, 즉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집중함으로써 모두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자기 것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한테는 구원이 있을 수 없어요. 그러나 바로 소외된 그런 이들이 구원의 열쇠를 제공하는 셈이지요.

새크러먼트도 그 본래 정신은 나누는 데 있어요. 나는 성찬은 소중 한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 몸의 피와 살을 '나눈다', 즉 한 몸 되는 의식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누는 일을 종교 행사로만하지 말고 현실생활에까지 연결시켜야 합니다. 예수의 피는 나누어 먹을 용의가 있는 자들의 집단이 왜 밥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하지 않을까요? 그러고도 마음 편한 것은 나누는 일도 하나의 예배의식으로 처리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종교성과 싸워야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지요. '나누는 일'은 공동체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고, 이것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천하느냐에 교회의 존재근거가 결정될 것입니다.

왜 서구의 그 큰 교회는 텅텅 비고 그 풍요한 시설들이 젊은이들에게 백안시되는 반면에 동양의 여러 신비종교에 빠져들어가는 젊은이들은 많은가? 중요한 것은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삶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봐요. 저들이 나누는 것은 종교적 경험만이 아니라 삶 전체입니다. 그런데도 또 의문이 생겨요. 서구에는 거대한 수도원이 많고 그것은 나누는 공동체인데, 왜 그것에는 매력을 느끼지 않을까? 무엇인가 폐쇄적인 것이 있기 때문일 터인데, 난 지금도 그 까닭을 묻고 있는 중입니다.

▶ 그런데 예수님께서 교회상을 생각할 때 그 교회상은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예언자전승을 많이 따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위시한 성전 제의적인 요소를 예수님께서는 많이 부정하셨잖아요. 그런 것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의 교회전승은 예언자적 전승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계보상으로 '제사전통'과 '예언자전통'을 나누어본다면, 물론 예수는 예언자전통에 속했지요. "교회가 두 전통 중 어디에 속하느냐"고 묻는다면 역시 예언자전통에 서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제도 교회는 계속 그리고 점진적으로 제사전통으로 기울어져요. 제사전통이란 바로 예루살렘 성전전통인데, 로마교회의 의식(儀式)이 바로 그것을 많이 따왔지요. 그 색채나 제사법에서 모든 종교간의 유사성을 볼 수 있어요. 나는 구라파에서 가톨릭교회 미사에 참여해볼 때마다 가끔씩 구경한 불교사원의 분위기를 연상했어요. 예수가 마지막에 대결한 게 바로 예루살렘 성전 아닙니까? 교회는 성전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종교전통에서 뿌리를 찾는 경향이 예언자적 소명을 상실하게 한 것입니다.

제사적 공동체는 종교공동체로서 폐쇄적이고 자체만을 위하게 마련입니다. 이에 대해 예언자적 전통에는 성속(聖俗)의 구별, 교회와 사회의 구별이 없다고 봐요. 예언자는 썩은 권력정치에 대해서도, 썩은 종교층에 대해서도 기탄없이 관여하고 불의와 싸웠습니다.

그런데 예수전통을 말할 때 교회와의 관계에서 언급해야 할 또 하나의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모인 곳이라는 말에 대한 새로운 이해입니다.

예수는 민중을 무조건 하느님의 백성으로 대했습니다. 이 점은 유다인이 이스라엘 민족을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한 것과 맥을 같이하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느님 백성 의식도 많은 굴곡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타락했으니까 '남은 자'의 사상이 움텄습니다(이사야). 그 남은 자만이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의식이지요. 그런데 예수 당시에는 바리사이파를 대표로 하는 유다교에 의해서 이른바 죄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에서 제외됐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유다 체제에 맞지 않기 때문에 소외된 저들을 받아들여 저들도 하느님의 백성으로 인정합니다. 잔치 초대의 비유를 위시하여 많은 비유들도 이 점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것은 감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뿌리를 가진 행태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형성되던 그때의 본질에 닿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탈(脫)에집트 한 히브리와 가나안, 시리아, 팔레스틴 지역의 합비루(Habiru)가 함께 군주들의 억압에서 탈출하여 이룬 것입니다. 이 억눌린 자들이 군주로부터 탈출하여 연합체를 이룬 것(이를 '종족동맹' 또는 '지파동맹' 이라 하며 마틴 노트[M. Noth] 등은 희랍어의 '암픽티오니'로 부릅니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지주는 야훼입니다. 야훼신앙은 군주권력의 횡포에서의 해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저들은 일찍부터 '야훼만'(mono Yahwism)이라는 주장을 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인간도 우리를 지배하거나 군림할 수 없다는 주장과 신념에 직결된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바로 민중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다윗 이후 군주국가가 됨으로써 변질됐는데, 예수는 저 원초적인 이스라엘의 본질을 되살린 행위를 바로 갈릴래아에서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공동체는 이런 근원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잊어버리는 순간 그것은 나무에서 잘린 가지가 될 것입니다.

▶ 그렇다면 기존의 교회제도라든지 형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라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기성교회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근본적인 방향은 이미 말했고, 기성교회 자체에서 계속적 개혁을 통해서 원모습에 접근해야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예수운동과 그로 인해 형성된 공동체는 정통적 유다교(그것도 교회지요)에서 볼 때 민중적이었고, 동시에 이단적인 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민중은 그것이 유다교를 떠난 새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느 기간 동안 유다교내의 개혁파라는 의식 속에 있었지요. 그러므로 안식일도 지키고 성전계율도 지키고 회당에도 참석했지요.

그런데 그것이 전혀 새로운 공동체라는 의식은 유다교에 의해서 박해를 받게 될 때부터였어요. 저들은 안식일을 지키다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부활을 경험한 일요일(주일)로 대치하게 됐고, 성전이나 회당 대신 자기들끼리 모이게 됐어요. 이것은 예루살렘 교단의 경우이고,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그보다 일찍 그리스도교를 새로운 운동, 새로운 공동체로 인식하고 반유다교, 특히 반율법 내지 탈유다교, 탈율법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아 되는 출발로 알게 됐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사회적 계층으로 보아 유다교에서 소외된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달라지는 것은 필연적이었지요. 또한 그 공동체에 모인 저들에게 예수의 수난과 부활이 절대적 의미를 가지게 됐고, 공동체의 기초로서 그리고 그 성격의 요인으로서 새롭게 해석되어 역광적(逆光的)으로 교회론을 구성했습니다. 그렇게 출발한 예수민중의 공동체도 종교의식의 강화와 더불어 종교 일반의 테두리에 들게 되었는데 유다교 전통의 재수용, 그리고 헬레니즘 영역의 종교적 사고 등을 수렴하면서 이른바 그리스도교를 형성했지요.

그러나 민중적 성격을 보유해오다가 그것이 로마제국의 국교(國敎)가 되면서 완전 변질됐습니다. 천 년 동안의 이른바 '암흑시대'를 거쳐 종교개혁아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은 루터의 만인사제설, 성서와 그 해석권을 교권에서 민중에게 돌린 것, '믿음으로만'을 크게 내세움으로써 재래의 도덕윤리 체제에 대한 사실상의 거부 등 굉장한 선언을 하면서 출발했지요. 칼뱅도 세례와 성찬을 제외한 새크러먼트를 전부 폐기하여, 우상의 온상이 되어 온 온갖 상들의 철폐 등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출발한 개혁이 계몽주의에 의해서 역습을 당하게 되어 다시 보수화로써 방어태세를 취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내부질서를 위해 교권이 점차 득세하게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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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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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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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의 시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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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유다 사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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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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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루살렘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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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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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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