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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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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으로 스스로를 의식한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갈래였기는 하지만 유기적 몸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아마 지동적으로 그렇게 됐다는 말이 옳겠지요. 그것은 서로 나누어 먹는 일이었습니다. 성서에는 그러한 몇 가지 흔적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공산체의 출현입니다. 예수의 죽임당함에 절망했다가 되살아난 예수의 민중들이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들이 한데 어울려 밥상공동체를 이룬 얘기입니다(사도 4, 32 이하). 가진 사람들은 자기 것을 팔아 공동체에 바쳤습니다. 그 기간이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물(物)의 공유를 공(公)으로 환원함으로써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즐거움을 앞당겨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공동생산의 노동 없이 분배만하는 공동체가 오래갈 수는 없었겠지요.

또 하나는 함께 모여서 주의 날(부활의 날)을 축하 예배하고는 가져온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중에는 여분 있게 가져온 사람들도 있었고, 전혀 못 가지고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주님 앞에서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은 예수가 살아 있을 때 늘 하던 행태에 상응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계급의식이 발동한 것입니다. 가진 자들은 저희끼리만 모여 앉아 포식을 하면서, 음식을 못 가지고 온 자들을 모욕(멸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함께 나누어 먹는 일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이 됐습니다. 이에 분노한 바울로는 "여러분이 먹을 때에 각기 제멋대로 자기 음식을 먼저 먹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배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 취합니다.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고전 11, 21~22)라고 하면서, 이런 계급적 현상이 극복되지 않는 한 결국 "한자리에 모이면서도 주의 만찬을 먹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고전 11, 20)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만찬을 새크러먼트화해버렸습니다(고전 11, 23 이하). 배고픈 자는 집에서 먹고 오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자 주의 만찬은 하나의 외식적(外飾的) 행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후에 사랑의 만찬과 성만찬이 병행하다가 결국 새크러먼트화한 성만찬만 남은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 14장 17~25절은 그런 흔적을 보입니다. 그 안에 식사한다는 말이 두 번 다른 사건과 결부되어 반복됩니다. 18절과 22절 이하는 서로 다른 두 장면인데, 한데 합쳐진 것입니다.

바울로에 의해서였든 아니든 간에 초대교회의 지도층이 밥을 같이 나누어 먹는 만찬을 성찬(새크러먼트)화 해버리고 만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이로써 밥상공동체는 파괴되고 종교의식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종교의식, 즉 예수의 피와 살을 나눈다는 종교의식만 남고 나눔―먹음―배부름―식구 됨의 길은 포기해도 좋은 구실이 된 것입니다.

'밥상공동체'라는 것은 바울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나 사회학적으로 말하는 유기적 공동체의 구체상인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제가 특별히 밥상을 강조하는 것을 의식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실을 밝히려는 목적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소위 영적인 코이노니아, 사랑의 공동체 등의 아름다운 언어 속에 감추어진 허구를 폭로하자는 것입니다.

가정이 유기적 공동체라면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좀더 직접적으로 물어보지요. 같은 솥에 끓인 밥을 나누어 먹는 것을 뺀 가정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런 가정이 있다면 그것은 유기저 공동체는 아닙니다. 우리 한국어에는 '가족'이라는 말의 참뜻을 실감시키는 또 다른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식구'(食口)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가족을 '먹는 입'이라고 했을까요? 도대체 이팅 마우스(eating mouth)라고 해서 이것을 가족으로 이해할 민족이 어디 있을까요? 한국 사람들은 유기적 공동체라는 것을 함께 밥을 먹는 것과 불가분의 사실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기체의 핵심을 정곡으로 찌른 것입니다.

공동체는 결코 어떤 관념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험적 결과입니다. 어쩌면 한국의 오랜 가난의 역사가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했는지도 모르지요. 일용할 양식에 허덕이는 자들에게 밥상공동체가 주는 기쁨과 평화를 배부른 자들은 절대로 모릅니다. 예수의 행동에서 민중과 더불어 먹고 마셨다는 사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도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 재회할 장(場)도 더불어 먹는 자리로 표상한 예수의 말의 뜻은 배고파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 영원히 모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을 식구라고 부른 한국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언할 것은, 조선조 500년 동안 유교적 관료주의 밀에서 사대부라는 상부구조를 구축하고 노동은 천한 것들이나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에 의해 생산 된 물(物, 먹을 것)도 천시하는 것이 위신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 한 양반족이 가족을 식구라고 불렀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식구'라는 말은 굶주린 민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라고 집작됩니다.

다음으로 밝힐 것은 한국어의 '우리'라는 말의 뜻입니다. 일본 말로 '와타구시'(私)나 영어의 '아이'(I)는 한국어의 '나'와 같으나 그 복수의 역할을 하는 '우리'라는 말은 일본어의 '我我' 또는 '私達'이나 영어의 'we'와는 그 뉘앙스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운명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동물을 사육하기 위해서 치는 울타리를 한국 말로 '우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우리, 돼지우리 등의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안에 있는 자는 공동의 운명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자기의 남편 혹은 아내를 제 하에게 소개할 때 '나의 남편', '나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우리 남편', '우리 아내'—이것은 물론 '우리 집 남편'이라는 말의 약칭이지요—라고 합니다. 물론 집이나 아이들을 가리킬 때도 '내 집', '내 아이'라하지 않고 '우리 집', '우리 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공동체를 개인의 위에 두었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내 소유일 수 없고 '한식구'입니다. 바로 이 '우리'를 식구라고 한 것은 공동체의 핵심을 찌른 것입니다.

유물론은 물(物)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에너지라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가 물질을 강조한 것은 오랫동안 관념론에 빠져 현실을 도피한 그리스도교의 허점을 찔렀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리스도교가 물 또는 육을 경멸하는 역사를 길게 끌어오는 동안 마르크시즘이 생겨났습니다. 밥(物)은 모든 사람에게 절대 불가결한 것입니다. 사회상류층이면 상류층일수록 삶의 목적을 육의 향연에 두고 살았으면서도, 저들은 물 또는 육을 천시했습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저들이 물을 멸시하는 것과 생산의 주체인 민중을 멸시하는 데는 함수관계가 있다고 보입니다. 이에 반해서 물을 실제로 생산하는 자이면서도 물로부터 소외되므로 언제나 굶주려 살아온 노동자들에게는 물이 그렇게 중요했던 것입니다. 한 덩이의 밥, 아니 한 톨의 쌀이 그렇게도 그들에게는 소중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피와 땀의 소산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소중했습니다. 그러므로 물을 나눠 먹는다는 것과 공동체의식은 서로 쪼개면 피가 날 정도로 직접적인 것이었습니다. 물은 악이 아닙니다. 육은 멸시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육체적 노동으로 밥을 만들어내는 민중을 멸시하는 역사가 그리스도교에도 있는데, 이것은 사회의 놀고 먹는 귀족전통에서 세뇌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물, 즉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그리고 그것을 생산하는 실체인 노동하는 육체의 중요성을 신학적으로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먹는 것을 멸시하는 자들은 포식가(飽食家)들뿐입니다. 물(먹는 것)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서의 중심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기도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마태오 전승은 이것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덧붙여 주석을 달았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에 직결된 것은 '오늘 먹을 밥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지금까지 얼마나 무시되어왔는지요. 이 기도에 진실했다면 그리스도교 역사는 오늘과 전혀 달라졌을 것이며 따라서 마르크시즘의 공격을 받지 않아도 됐을 것입니다. 왜 이 기도가 무시되었을까? 그것은 종교지도자들이 귀족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이미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는 포식가들이 되었고, 그들의 여유 있는 물질은 바로 그 물질을 생산한 계층에게서 공짜로 가로챈 것이기에 그들은 물질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이로써 민중과 더불어 먹고 마셨던 가난한 예수와도 단절된 셈입니다. 복음서에는 "돌로 떡을 만들라"는 악마의 유혹에 대해 예수는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대응했다는 전승 이 있습니다. 그런데 풍요해진 교회의 대변자인 신학자들은 이 말을 마치 '하느님의 말씀으로만'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빵의 문제를 완전히 무시하여 왔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코이노니아니, 사랑이니 하는 따위의 설교는 허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식구라는 말에는 단순히 먹는다는 의미를 넘어선 종교적 배경이 있습니다. 일본에도 그런 전통이 있는지 모릅니다만 한국에는 돌아가신 선조를 표시하는 위패를 모시고, 식사 때마다 일단 선조 앞에 음식을 바쳤다가 그것을 내려서 가족이 함께 먹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밥을 먹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선조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한곳에 바쳤던 음식을 나눠 먹는 것, 그래서 식구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관계를 일컬어 '한솥밥을 먹는 관계'라는 표현을 씁니다.

또 우리에게는 '부락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계절에 따라 약간의 돈을 걷어 소나 돼지를 잡고, 집집마다 정(淨)하게 지은 밥을 그릇에 수북이 담아 동리마다 있는 성별(聖別)된 장소에 제물을 나란히 차려놓고, 그 동리의 원로가 임시 사제가 되어 일정한 제사의식을 행한다음, 거기에 바쳤던 음식을 모두 나누어 먹습니다. 이날처럼 즐 거운 때는 없습니다. 일 년 내내 먹어보지 못한 고기를 먹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아무런 빈부의 차이도 없고 계급의 차이도 없이 한 신에게 바쳤던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 그렇게 흥겨운 것입니다. 이런 행사에서 이 부락민들은 서로를 '우리'로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바울로의 말은 바로 그러한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다 민족의 예를 들어 말하렵니다. 제단에 드린 제물을 나누어 먹는 사람은 그 제단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고전 10, 18).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한국의 시인 김지하는 또한 다음과 같은 짤 막한시를 썼습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나는 이런 사실을 소년 시절에 경험했습니다. 자기 땅과 권리를 일본에 강점당한 한국 사람들은 1910년을 전후하여 많이 만주 간도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중이 독립운동으로 궐기했다가 또다시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서 참패를 당하고, 이방의 땅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우리 부모도 어린 나를 업고 그 땅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나를 길렀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뿌리뽑혀서 추방된 자들, 즉 '우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지방에서 몰려들었기 때문에 언어도 풍습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들에게 거듭되는 부락제는 새로운 '우리'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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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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