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러한 마을들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왔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우리 민중들로부터 열렬히 환영받았습니다. 저들은 사랑을 설교하고 평등을 역설했습니다. 아니, 저들은 먹다 남은 떡부스러기도 주었고, 입다 버린 옷가지도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이르는 곳마다 밥상공동체가 깨진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은 '우리'로서의 민족공동체성을 깨고,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점령세력으로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저들은 우리의 민중문화를 모두 '미신'이라는 굴레를 씌워 사정없이 잘라버리고, 이것을 서구 문화로 대체해버렸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교회의 일원이 된 나는 근래에 와서야 내가 한국 사람으로서 얼마나 멀어져 갔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사도 거부하고, 부락제 따위는 물론 이려니와 온갖 축제와 더불어 나누는 행사는 모두 미신이라는 보자기에 씌워서 우리와 완전 격리시켜버렸던 것입니다. 이로써 나는 한마디로 '우리'를 잃어버린 짐승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그 대가로 준 것은 '교회'라는 장(場)이었습니다. 교회는 모이기도 자주 모이고, 계속 설교에 의해서 모든 사람의 관심을 한 대상에 집중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우리'라는 의식이 날이 갈수록 퇴색해버리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후에 와서 발견한 것이지만 그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밥상공동체로서의 '우리' 의식을 빼앗아갔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도 나눠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종교적 의식주의에 의해 박제화되어버린 전형적인 예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의 본래적 의미는 완전히 상실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된 연유를 나는 다음 서너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본래 한국에 없었던 서구의 개인주의가 침투되었습니다. 모르는 동안 '나'라는 의식과 나와는 다른 '너'라는 의식이 왜 그렇게도 빠르게 감염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서구화의 도상에서 자아의식이니, 주체성이니 하며 찬양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없어지고 인격이니, 개성이니 하는 이름의 'individium'이 외롭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인격으로서의 개인존중보다 물(物)의 기득권 확보가 원래 목적이었습니다. 프라이버시! 프라이버시! 사생활의 강조는 가진 자에게는 편리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득권을 옹호하는 중요한 무기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득권이 절대화되고 사유화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이것은 밥상공동체를 파괴하는 제1의 적입니다. 배고픈 자와 가난한 자가 범람하는 것은 물질의 결핍과 모자람 때문이 아니라 기득권자가 사유화해서는 안 되는 것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전세계 인구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자들이 세계의 부의 80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20퍼센트 안에 속하는 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그들의 기득권만 불가침적인 것으로 전제했으니 저들이 어떻게 예수의 참정신을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의 낙원이야기는 기득권과 관계되는 인간의 문제를 잘 압축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둘 이상이 더불어 살아야 하며, 사람이 산다는 것은 노동으로써 새 땅과 새 세계를 창조해 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동은 자연과 하늘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산하는 행위입니다. 강요되지 않은 노동의 기쁨은 창조이며 참여입니다. 그런데 이 낙원에서 모든 것은 다 허락되었으나 단 하나 따먹 어서는 안 될 나무열매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사람들은 그것을 신적(神的)인 지혜라고도 하고 또는 성(性)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든간에, 요는 아무도 사유화할 수 없는 공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무엇입니까? 그는 공(公)입니다. 땅도 하늘도 바다도 모두 공(公)인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 노동하여 생산한 모든 식물도 공적인 것입니다. 공적인 것이란 사유화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 즉 따먹어서는 안 되는 열매가 사정없이 독점화되는 과정이 인간역사의 죄악화입니다. 공을 사유화하는 것이 곧 타락이고 죄입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국제법으로, 군사력으로, 경제력으로 사(私)의 영역은 넓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기적 공동체를 파괴하는가장 큰 원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밥상공동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둘째로 모든 것을 이분화하는 사고방식입니다. 하늘과 땅, 육체와 영혼, 정신과 물질, 종교와 세속 등. 이것도 가진 자의 교묘한 자기보호를 위한 허위입니다. 물질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영혼으로 도망가고, 정신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는 물질로 도망하고, 땅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기 싫을 때 그것을 하늘에 맡기는 등 교묘한 방법으로 독점함으로써 이원론적 사고에 능숙한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종교귀족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둘쭉날쭉할 수 있는 주장이었습니다.
루터의 이른바 두 왕국설, 즉 정치와 종교, 정권과 교회를 구별한다고 한 것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공존을 위한 타협의 결과인데 그것이 마치 하늘에서 주어진 계시처럼 생각하게 만든 것은 얼마나 큰 죄악인지요. 그런데 이러한 악습이 조선조 말엽에 상륙한 그리스도교의 선교사들에 의해 그대로 한국 교회에 전승되었습니다. 저들은 한국이 일본에 완전히 점령되기 이전에도 정ᆞ교분리를 주장했고, 일본 치하에서도 이 주장을 계속했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민중의 교회이면서도 한국의 민중을 배반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진리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물질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권력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까닭은 그것은 공(公)이기 때문입니다. 이 공을 지키는 이가 하느님이며, 그것이 지켜질 때에만 나눠 먹는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