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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학당

2023.11.03 10:48

‘대지의 공동체’와 ‘하느님나라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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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공동체’와 ‘하느님나라의 경제’

박경미(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1. 

 

근래 들어 뉴스를 검색하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폭력적이고 끔찍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공정과 상식을 앞세우지만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무법, 무도한 세상이다. 현 정권 들어 정치권, 기득권층의 무교양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자본주의 산업사회를 움직이는 심리적 동력으로서 분노와 시기가 이제 거의 한계 상황에 달해 사회 전반에 폭력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단군 이래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한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 봉건적, 위계적 사회관계가 주는 압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지만,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활개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화가 나 있다. 과연 행복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세상은 다시 한번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권위와 위계로부터 자유롭더라도 너그럽고 행복한 삶에 대한 동경을 잃어버릴 때 인간은 너무나 쉽게 천박하고 저급해진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 세대의 무책임과 무능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재구성해주고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주지 못했다. 적어도 우리 부모 세대는 어떤 종류의 삶을 사는 것이 가치 있는지 암묵적으로라도 전해줄 ‘이야기’가 있었는데 우리 세대는 그렇지 못했다. 우리 윗세대는 식민지 시대와 전쟁, 가난을 겪으며 힘겹게 살았지만, 그 속에서 우러나온 정직하고 순진한 삶의 이야기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 어렴풋이나마 자식들에게 각인시켜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굳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계급적 성격을 분명히 지녔고, 그럼에도 계급 이데올로기에 결코 포획당하지 않으면서 그 세대의 살아 있는 삶을 표현해내는 특성이 있었다. 어릴 적 나는 어른들이 일제 강점기에 얼마나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했는지, 그리고 전쟁으로 어떻게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했는지 고생담을 들려줄 때마다 이상하게도 그런 슬픈 이야기들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따뜻하고도 행복한 느낌으로 나를 채워주는 경험을 했다. 가난하고 고단한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 안에서 풍부하고 윤택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출세나 국가발전에 대한 멋진 이야기가 아니라 신기하게도 그런 소박하고 순진한 이야기들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고, 어른이 되어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사람과 관계를 맺고 세상을 이해하는 내 나름의 방식을 찾아가는 데 가장 원초적인 바탕이 되는 ‘기분’을 형성한 것 같다. 그처럼 우리 윗세대가 우리에게 전해줄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이 땅과, 땅에 뿌리내린 삶에 우리보다 훨씬 더 밀착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괴롭고 힘들게 살았을망정 대지에 뿌리내린 삶의 강력한 힘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전해져오는 삶의 지혜, 덕스러운 삶에 대한 이야기들, 이런 것은 전통이라는 말로도 지칭할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서 문화라고 할 수 있으며, 종교는 그 핵심에 있다. 그런 것들은 구체적인 장소와 장소에 결부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원래 연결되어 있다는 기억을 일깨우며, 그럼으로써 고향에 있다는 안전한 느낌을 갖게 한다. 우연과 역사를 통해 구체적인 장소에 육화된 존재로, 상호연결된 전체의 일부로 겸허하게 자기 존재를 받아들이게 하고, 그럼으로써 위대한 영웅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도 자기 삶을 긍정하고 개별 자아의 왜소함을 넘어설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과 문화, 종교는 땅과, 땅에 뿌리내린 민중의 공동체적 삶에서 자연스럽게 길어올려지며, 성서가 그렇듯이, 세계 안에 있는 존재의 유한성과 상호의존성에 대한 진솔한 인식을 그 핵심으로 한다. 행복한 삶에 대한 생각이나 도덕적 가치관 역시 무슨 정언적 도덕명령에 대한 개인의 수용이나 공리주의적 효율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땅과 땅에 뿌리내린 공동체적 삶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다른 존재와 담을 쌓고 분리된 독립적 존재인 양 물리적으로, 인식론적으로 폭력을 행사해도, 또 우리가 자연과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한다고 착각해도 원래 세계가 연결된 전체로서 하나라는 특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족과 이웃, 자연과 더불어, 그들 ‘덕분에’, 그들의 ‘은혜로’ 우리가 살아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종교적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나’와 나 이외의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알 수 없는 신비로서의 ‘전체’, 그것을 표상하는 언어로서 신, 또는 근원적 존재 앞에서, 아니 그의 품 안에서 살아간다. 성서에서 세계를 피조세계로 이해하는 것 역시 우주만물의 상호연결성과 의존성, 유한성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한 방식이다. 창조주로서 ‘하느님’은 세계를 연결된 전체로,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인식론적 아르키메데스의 점이다. 성서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동료 피조물과 조화로운 협력관계를 이루고 가족과 이웃을 돌보고 사랑하며 살다가 때가 되면 평화롭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스올로 내려가는 것이 하느님이 허락한 삶이며, 유한하고 의존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행복한 삶이다. 죽음과 가난 역시 무찌르고 박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전체’의 일부이자 인간 삶의 구성적 요소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감내하면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성서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태도이다. 원자론적으로 고립된 개체들을 권력에 의해 통합하고 동원하는 것이 파시즘적 전체주의라면, 신앙은 사랑의 힘에 의해 원래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전체 속으로 용해되려는 노력이다. 따라서 우리가 원래 속한 ‘전체’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신앙은 가짜이며, 하느님은 나를 이웃과 자연에, 전체에 조화롭게 연결시켜주는 중심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인간들은 이웃, 세계와 끈끈한 유대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땅에 든든히 뿌리내리고 있다. 성서에서는 가령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 같은 이스라엘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도 그저 위계적 권력자로, 또는 존재의 중핵을 결여한 채 형식적이고 이상적인 인물로만 그리지 않는다. 성서에서 인간을 보는 관점은 철저히 이웃과 세계, 땅과의 관계, 즉 ‘대지의 공동체’와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지의 공동체’는 미국의 자연보존주의자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가 무생물과 생물, 인간을 포함하여 자연을 통전적인 생명공동체로 지칭하면서 사용한 말이다.1) 그는 서로 연결되어 상호 의존하는 전체 생명공동체를 ‘대지의 공동체’라고 지칭했으며, 여기에는 흙과 바위같은 무생물만이 아니라 인간도 포함된다. 분리된 개인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 자연과의 사이에 궁극적 근원에 있어서 공감과 연결성을 유지하고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그 자신일 수 있다는 인식이 ‘대지의 공동체’라는 말의 근저에 깔려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성서가 인간을 그리는 관점의 가장 밑바탕에 깔린 생각이며, 바로 그것이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믿음의 실질적인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성서가 전해주는 믿음의 전통은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의 내적 유대와 교감을 확인시켜주는 강력한 정신적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에 따르면 인간은 유한한 세계 안에서 유한한 존재로 살아가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개체로서의 자기를 초월하여 더 큰 생명의 영속성에 참여한다. 땅과 후손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대지는 공동체이고 우리는 그 일부분이다. 우리는 땅에 뿌리박고 살아가며, 궁극적으로 땅에 의존한다. 땅은 단순히 자원들이 쌓여 있는 창고도 아니고, 화폐가치에 근거해서 그 안의 어떤 것은 가치 있고 어떤 것은 가치가 없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땅은 우리가 살아가는 커다란 맥락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그 안에서 분별 있게 잘 들어맞아야 한다. 경제는 이러한 ‘대지의 공동체’의 하위시스템이어야 하며, 자연의 건강한 기능과 일치되게 작동해야 한다.  

 

우리 시대 행복한 삶에 관한 생각 역시 자연과 자연 안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이해와 깊은 관련이 있다. 성서에서 땅은 생명공동체, 즉 서로 연결되어 상호 의존하는 생명 요소들의 공동체, ‘대지의 공동체’이며, 인간은 그 구성원 중 하나다. 성서는 이 ‘대지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주어진 운명에 순응, 또는 저항하며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려준다. 성서는 ‘대지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쓰라린 시련을 겪으면서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고통을 안으로 보듬으면서 절대적인 삶의 긍정에 도달한 지극히 부드럽고 너그러운 영혼들에 대한 찬미라고 할 수 있다.2) 이를 통해 성서는 존재의 내적 풍부성과 근원적 밝음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고 거기서 우리의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홀연히 아름다운 축제로 꽃피게 해줄 지혜를 선사한다. 

 

2.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사회적 혼란은 거슬러 올라가면 삶과 세계를 통일된 전체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 전통을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근원적 오류와 관련이 있다. 땅과 땅에 뿌리내린 삶에서 벗어난 ‘불경’이 문제의 근원이다. 성서를 비롯해서 땅에 뿌리내린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지혜들은 보다 많은 소유가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 자연 사이에 조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져야 행복한 삶, 좋은 삶이 가능하다고 가르쳐준다. 인간은 세계와 우주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이해해야만 온전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데, 이 사실을 망각한 결과를 우리는 지금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물의 하나됨이라는 진실이 오늘날 지극히 부정적인 방식으로 인류에게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 셈이다.  

 

 “문명이 몰락의 단계를 맞으면 파리, 런던, 뉴욕 같은 거대도시로 사람들의 생활이 집중되고 그 이외의 지역은 황폐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까지 대지에 생사를 맡기고 생활해온 민중은 사라지고, 토지로부터 유리된 채 대도시에 기생하는 유랑민이 대량으로 발생한다. 대도시의 주민이 된 사람들은 농민생활을 마음으로부터 혐오한다. 그들에게는 전통이라는 것은 전혀 없으며,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경제적 동기일 뿐이다. 그들은 무종교적, 실제적 인간으로 살아간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턱대고 여행을 좋아하고, 일찍이 문화가 번성했던 시대의 유물이나 예술품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구경하러 돌아다닌다.”3)  

 

이 인용문은 백여년 전 슈펭글러가 1차대전을 예견하면서 썼던 『서구의 몰락』에 나오는 한 대목인데, 흡사 지금 우리 사회를 묘사한 것 같다. 극단적인 도시화와 농촌의 황폐화가 진행되고, 땅에 뿌리박은 농민의 삶을 경멸하고 오로지 경제적 이윤동기에 따라 움직이며, 무턱대고 여행을 좋아하고 구경을 좋아한다는 것이 그렇다. 당시 유럽인들이 1,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있었다면, 오늘 우리는 기후파국을 목전에 두고 있다.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이 눈앞에 다가왔음에도 유럽 부르조아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사회에 대한 낙관적 기대를 마지막까지 유지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전 세계가 극단적인 기상이변, 기후재앙을 겪고 있지만, 서구 중심부 세계는 아직 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우리 역시 아직 버티고 있다. 그래서 기후파국이라는 과학적 사실 앞에서 전환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 국가가, 기술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하는 미신적 신앙에로 도피하고 있다. 또한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약적으로 증대된 부에 취해 자신들이 향유하는 부가 약소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약탈과 자국 내 노동자와 농민 계급의 희생에 근거해 있음을 무시하고, 그 사실이 지니는 도덕적 의미를 망각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메타담론으로서 슈펭글러의 역사철학의 타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문명 몰락의 핵심적 징후로 땅과 농민의 삶, 그리고 거기 근거한 문화적 전통으로부터 유리된 근대적 삶의 불모성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묘사는 예리하다.  

 

성서가 ‘대지의 공동체’에 뿌리내린 삶의 통전성과 영속성을 지지한다면, 근대 산업문명은 재산권에 기반한 추상적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행복한 삶의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재산권에 기반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 추구는 실은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소수의 특권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권리를 정당화하면서 전파한 이념인데,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만인에게 해당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착각하고 있다. 이런 환상적인 기대 속에서 우리는 상호 협동과 의존을 기반으로 했던 전통적인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후진적이라 여기고 서구 근대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기꺼이, 그리고 열렬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사회는 각자 자신의 권리와 욕망을 충족시켜주기를 요구하는 개인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하고, 그로 인해 정치는 시시각각 요동친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관계에 몰두해 있는 개인들의 집합체로 구성된 사회는 필연적으로 공동체적 도덕성을 결여하며, 그러한 상태에서 민중은 전통적인 사회적 안전망을 상실한 채 벌거벗은 개인으로 위기에 내던져진다.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형체를 지닌 물질덩어리로 살아가도록 강요받는다. 오늘날 우리는 각자 물질적 풍요와 안정을 이루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현대의 신화이며, “모두가 부자 되는 세상”은 우리 시대의 미신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생태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그러한 기대가 무망해지는 시점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가 직면해 있는 기후위기는 문명과 그 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의 위기, 과거 인류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미증유의 위기이고, 경험해본 적이 없는 만큼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제 기후위기는 과학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금년 4월에 발표된 IPCC 6차 보고서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라고 평가받지만, 대기와 해양, 육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난화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명백히 인간이 유발한 것임을 유례없이 강조하고 있으며, 산업혁명 이후 불과 200년 남짓 짧은 기간에 지구 평균 온도가 1.1도 이상 상승한 것은 지난 200만 년 동안 전례가 없다는 점을 확인해주었다.4) 그 결과 인류가 농사를 시작하고 현재와 같은 문명을 건설할 수 있게 된 12,000년 동안의 안정된 기후체계가 붕괴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5) 얼마 전 유엔 사무총장은 이제 global warming의 시대는 끝나고 global boiling, 즉 지구가 끓어오르는 시대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global warming에서 global heating으로, 다시 global boiling의 시대로 넘어간 것이다. 실제로 유엔은 2022년 현재 전 세계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약속한 온실가스 감축을 모두 이행하더라도 섭씨 1.5도가 아니라 2.4-2.6도 이상 높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6) 기후과학자 빌 맥과이어는 그린란드와 남극 서부 빙하가 녹는 속도 등을 감안할 때 1.5도 가드레일은 이미 무너졌다고 경고하면서 이제 기후위기가 아니라 기후붕괴(climate breakdown)가 맞다고 했다.7) 기후붕괴는 곧 총체적인 사회붕괴를 의미한다. 이것은 절망적인 이야기로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기후위기라는 눈앞의 빙산을 외면해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 그것을 막고 어쩔 수 없이 기후파국이 오더라도 사회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자세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기후위기는 과도한 탄소배출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니 탄소배출을 줄여야 하고, 오늘날 탄소배출의 주원인은 화석연료 사용 때문이니 화석연료 사용을 줄여야 한다. 문제는 화석연료가 현대 자본주의 경제를 작동시키는 동력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석유를 태워 이동할 뿐만 아니라 석유를 먹고 마시고 입으며, 석유로 만든 집에서 거주한다. 어쩌면 우리 몸속에는 피 대신 석유가 흐를지도 모른다. 결국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은 두 가지 방향에서 제시될 수밖에 없다. 사회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이후 사회, 탈성장 사회를 모색하거나8) 기술적으로 화석연료를 대체할 재생에너지를 개발하고 실용화하는 것이다.9) 조천호 박사는 현재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기술의 수준이나 재정의 규모는 기후위기를 극복할 역량을 갖추고 있지만, 사회정치경제 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효과적인 대처를 못하고 있다고 했다. 

 

기후위기는 총체적인 위기이고 경제 사회 문화, 즉 삶 전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높아졌지만, 여전히 대다수는 지금과 같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기후위기 대응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경제성장과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 가능할까? 게다가 서구 근대의 유산이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부유한 국가에 속한 개인들만이 아니라 후발 경제개발 국가의 개인들 역시 서구적 근대화가 약속한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번영이 계속해서 실현되기를, 자신도 그 혜택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생활수준의 향상에 대한 세계인의 기대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높아졌다. 이 점은 기후위기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대처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재생에너지 산업이 아무리 발전한다 한들 그런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독일 녹색당의 사상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심층생태주의자 루돌프 바로는 생태적 근대화(ecological modernization)야말로 최후의 제국주의(final imperialism)일 것이라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근대적 생활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신재생에너지로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적이다. 그런 생각 근저에 깔린 탐욕이 근원적 문제인 것이다. 과연 인간이 행복을 느끼고 만족할 수 있는 물질적 삶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그런 것을 정할 수 있을까?10) 이런 질문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인지에 대한 가치의 문제로 귀결된다. 결국 인간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말대로 우리에게는 ecology가 아니라 theology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11) 

 

근대 문명의 압도적이고도 결정적인 특징인 자본주의 시장 중심주의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우리가 자연과 인간을 인식하고 평가하는 방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이해할지, 또 무엇을 가치 있다고 여기고 원해야 할지를 규정한다. 오늘날 시장 자본주의는 본질상 금융위기와 기후위기를 체계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고, 사회적, 생태적 황폐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자본가들이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더 많이 돈을 쓰고 소비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탐욕을 부추기고 탐욕을 미덕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본의 축적을 위해서는 대규모 산업생산이 이루어져야 하고 자본축적과 산업생산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대중이 소비자로 규정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와 산업주의, 소비주의로 이어지는 시장경제 시스템에 의해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탐욕스러워졌고, 지구 생태계는 위기에 처했다.12) 이 체제의 목적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통해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고 끝없는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이며, 그 결과는 생태계의 파괴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소비자로 규정되며, 소비자로서의 인간은 기본적으로 개인이다. 개인의 자기중심주의가 오늘날 경제의 뿌리에 놓여 있다. 개인의 욕구, 개인의 이해관계가 경제의 핵심이라는 것은 오늘날 경제와 경제학의 기초가 되는 가정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도덕과 무관한 시장 참여자로서 개인이며,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자신의 선호에 따라 행동한다. 시장참여자로서 개인은 정치적 수단을 통해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시민이 아니다. 소비자로서 인간은 혼자서 행동하는 자율적 행위자이며, 기본적으로 개인이다. 그러므로 시장적 세계관의 근본적인 문제는 도덕 가치와 행위를 모두 개인적 선호의 범주 안에 밀어 넣어버리고, 그럼으로써 대안적인 도덕 가치와 공동체적 비전의 형성을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기후위기 대응 역시 개인의 주관적 가치관이나 선호의 문제로 취급된다. 따라서 시장이 더 강력하게 지배할수록, 우리는 소비자 역할을 하라는 압력을 받으며, 민주주의는 약해진다.13) 또한 시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연은 사적인 부분들로 구획되고, 상품으로 파편화된다. 자연은 그 자체로 통전적인 생명의 그물망, '대지의 공동체'가 아니라 소유주의 통제를 받고 시장에 의해 가치가 평가되는 단순한 물리적 실체일 뿐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는 특별한 가치가 없다. 인간 외의 다른 생명체에게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인간의 행복에 직접적이고도 가시적으로 기여할 때뿐이다.14) 이러한 문화적 경향은 인간 역시 지구 행성의 거대한 생태적 그물망에 속해 있다는 인식을 가로막으며, 서슴없이 ‘대지의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게 한다.  

 

조천호 박사의 말대로 현재의 사회경제시스템은 기후위기 대응을 근본적으로 어렵게 한다. 우리에게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물질적 삶의 향상에 대한 기대도 무망해지고 돌아갈 과거도, 정신적, 실질적 고향도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절망과 분노가 가져올 연쇄반응은 생각만 해도 두렵다. 이미 19세기 말 조셉 콘라드(Joseph Conrad)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삶, 그의 성격과 능력, 대담한 행동들은 그 본질에서 보면 결국 자기 주변세계가 안전하다는 믿음의 표현일 뿐이다. 발전한 문명세계의 거주자들은 제도와 도덕, 경찰력과 여론의 힘을 맹목적으로 믿는다. 어느 문명이든 그런 확신에 근거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하고 믿고 있다는 관념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15) 그러나 전쟁이든, 자연재난이든 어떤 원인에 의해서건 일단 그 믿음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문명의 붕괴는 걷잡을 수 없다. 결국 근대문명이란 조셉 콘라드가 말하듯이 일종의 얇은 베니어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계기로 인해 그 얇은 베니어판이 사라지고 나면 그가 보았던 내면의 거대하고 깊은 심연과 어둠이 드러난다. 사실 우리가 안전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문명의 담장 아래는 훨씬 크고 교활한 힘이, 문명과 자연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포괄하는 예측불허의 거대한 ‘전체’의 힘이, 피부 바로 밑에 피가 흐르고 있는 것처럼, 가까이 있다. 다만 근대 기술문명에 취한 우리가 그 세계와 직접 대면할 능력을 잃어버렸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가짜 안전, 가짜 위안을 떨치고 위기의 본질에 직접 대면해야 한다.  

 

3. 

 

미국의 농부이자 작가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는 그의 수많은 에세이에서 농부의 삶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실적인 예와 비유를 통해 성서와 기독교 전통의 진리를 아주 평이한 언어로 전해주고 있다. 그는 전문적인 성서나 신학 지식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오래된 농업문화에 뿌리를 둔 전통적인 지혜에 근거해서 일련의 가르침을 주는데, 그의 글은 어떤 신학자의 글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다가가 있으며, 깊은 울림을 준다. 원래 영문학을 전공한 교수였으나 제도권 대학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그는 교수직을 떠나 켄터키에서 농장을 일구며 소설을 쓰고 에세이를 쓴다. 그의 에세이에는 이웃에 사는 농부 친구들, 농장의 꽃과 풀, 양떼, 강물이 등장한다. 물과 공기, 흙처럼 싱겁고 순한 언어를 쓰지만 그 기조는 더할 수 없이 강경해서 나같이 마음이 약한 사람은 그의 글에서 용기와 담력을 얻고 그에 기대서 뭔가를 말한다. 1983년에 그는 “두 가지 경제”라는 에세이를 썼다.16)  

 

이 에세이에서 그는 인간 경제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하느님나라의 경제’라는 말을 썼다. ‘하느님나라의 경제’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경제이다. 이것은 의식을 하든 못하든 인간이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전체적인 맥락을 가리키며, 인간 경제가 이루어지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지식이 결코 완벽하게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신비한 영역으로서 종교적 인식과 실천이 이루어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하느님나라’라는 말이 풍기는 기독교적 색채가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큰 경제’(great economy)라고 칭하기도 했지만, 사실 종교적 전통에 의지하지 않고는 그가 말하려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나라의 경제’는 아무것도, 참새 한 마리도 빠뜨리지 않는데 반해 ‘작은 경제’이자 대표적인 인간 경제인 산업경제는 “포괄적이지 못한데다가 자신이 포괄하지 못하는 것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포괄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에 의존한다.”17) 계속해서 그는 ‘큰 경제’, 곧 ‘하느님나라의 경제’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된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는 이 질서 안에서 살지만 그 질서는 우리가 알고 규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다고 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질서를 악용하거나 위반한다면 혹독한 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 ‘큰 경제’와 ‘작은 경제’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마태복음 6장을 인용한다. 거기서 예수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 같은 자연에 대한 하느님의 돌보심을 이야기한 뒤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 33-36) 베리는 이 본문을 작은 경제, 즉 이 세상 경제의 가치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데 반대한다. 이 구절에서는 오직 하느님나라만을 구하라고 하지 않고 ‘먼저’ 하느님나라를 구하라고 했다. 다시 말해 ‘큰 경제’, ‘하느님나라의 경제’가 그 안에 포함된 그 어떤 ‘작은 경제’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큰 경제’는 ‘작은 경제’를 배제하지 않으며, ‘큰 경제’ 역시 실용적인 의미에서 실제 경제이다.  

 

그는 ‘큰 경제’와 일반적인 인간 경제 사이의 차이를 황금알을 낳은 거위와 황금알의 차이를 예로 들어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거위가 계속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려면 살아 있는 거위여야 하며, 따라서 생명의 순환에 참여하고 있어야 한다. 언제든 인간의 이해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온갖 유형의 사물과 그 형성과정에 참여하고 있어야 한다. 이와 달리 황금알의 경우, 그 가치를 ‘정확히’ 계산하려면, 우리는 그것을 삶으로부터 분리해내야 한다. 즉 죽은 알로, 황금알로 만들어서 그 무게와 형태, 크기에 따라 가치를 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알을 낳는 거위를 보존하는 것과 배치될 수 있다. 거위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알의 가치를 측정하려면 우리는 과학적으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정확한 계산과 합리성만이 아니라 겸손과 동정심과 자제심, 관대함과 상상력에 근거해서 행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큰 경제’ 밖에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만일 우리 자신이 어떤 조건을 정해서 ‘큰 경제’ 안에서 살려고 한다면, 그때는 반드시 ‘큰 경제’와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것은 생태경제학의 기본 전제와 일맥상통한다. 생태경제학에서는 경제를 품고 있는 지구 생태계에 둔감한 채 무한성장 패러다임에 매몰된 기존의 경제관과 경제정책을 뛰어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기후위기 대응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가령 생태경제학은 물리학 최고의 법칙이라고 여겨지는 엔트로피 법칙을 경제영역에 적용하여 생물리학적 과정으로 경제를 재해석하고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경제성장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18) 엔트로피 이론에 따르면 생산과 소비활동이 반복되면서 지구 위의 유용한 에너지는 점점 더 사용하기 어려운 에너지로 흩어지고, 활용도 높은 자원들은 점점 더 활용도가 떨어지는 폐기물이나 오염물질로 전환된다. 닫힌계인 지구 생태계 안에서 인류가 문명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물질적 경제활동을 확대하면 할수록 지구는 점점 더 무질서한 상태로 퇴화한다는 역설에 직면한다. 결국 경제가 생산과 소비의 무한순환을 반복하며 무한성장할 수 있다는 가정이 무너지게 된다.19)  

 

사실 인간 경제는 어떠한 가치도 독자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근대 초기 계몽사상가들과 나중에는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노동가치설을 이야기했지만, 실은 인간 경제는 사물의 가치를 평가하고 분배하고 이용하고 보존할 수 있을 뿐, 최초의 가치를 창조해내지는 못한다. 진정한 가치는 오로지 ‘큰 경제’에서만 시작된다.20) 물론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물에 가치를 보탤 수 있다. 이때 인간이 덧붙인 가치는 인공적인 것이며, 기술(art)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덧붙여진 가치는 인간 삶에서 대단히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차적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좋은 인간 경제라면 자신들이 다루는 물자와 에너지가 실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스스로 처음부터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착각할 때, 그때 만들어내는 가치는 추상적이고 그릇되고 포악하며 진정한 가치를 파괴한다. 가령 화폐는 궁극적으로 ‘큰 경제’에서 비롯하는 옷이나 음식, 보금자리 같은 필수적인 재화의 가치를 정확하게 나타낼 때 그 기능을 제대로 한다. 그러나 ‘큰 경제’와의 연결성에서 벗어나 화폐가 독립적으로 인간 경제 안에서 작동할 때 화폐는 추상적 숫자로 환원되며 인플레이션과 고이율을 통해 작동한다. 생태경제학자들은 생산의 주요 요소 중 하나인 자연 자원은 열역학 제1, 제2 법칙의 영향 아래 있는 반면 금융은 그러한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파괴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가령 프레데릭 소디(Frederick Soddy)는 이렇게 말했다. “부채는 복리의 속도로 성장하고 순수한 수량으로서 그 성장을 느리게 만들 아무런 제한도 없다. 실물자산은 한동안 복리의 속도로 성장할 수 있지만, 물질적 차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성장은 이내 한계에 부딪힌다. 부채는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만 자산은 그럴 수 없다. 실물자산의 물질적 차원이 엔트로피라는 파괴적 힘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21) 결국 미쳐 날뛰는 금융경제는 인간 삶에 필수적인 것들의 가치를 왜곡하고, 자연 자원과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 이 점에서 인플레이션이나 금융경제로 인한 피해는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낼 수 있다고 착각한 데 대한 응보라고 할 수 있다. 

 

베리는 이러한 나쁜 경제의 예로 복음서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예를 든다. 그는 미래를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준비했다. 그에 따르면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죄는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다. 그의 죄는 너무 많은 것을 쌓아놓음으로써 미래를 축소시켜버린 데 있다. 그는 미래를 자신이 희망하고 기대하는 크기만큼으로 줄여버렸다. 그는 자신이 번영하는 미래에 대해서는 준비되어 있었지만, 자신이 죽는 미래에 대해서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거기에 그의 어리석음이 있다. 우리 역시 영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미래를 축소시키며 살아간다. 지금 “많은 재산을”, 추상적인 부를 쌓아놓기 위해 구체적인 사물들, 가령 표토층과 화석연료, 지하수를 고갈시키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미래로 떠넘긴다. 

 

웬델 베리는 마태복음 6:24-34에 근거해서 ‘큰 경제’ 안에 있는 ‘작은 경제’, 또는 ‘하느님나라의 경제’ 안에 있는 ‘인간 경제’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만의 가르침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슈마허는 버마에서의 경험을 통해 불교 경제의 미덕을 발견했다. 그는 ‘불교 경제’의 목적은 최소한의 소비로 최대한의 행복을 얻는 것22)이라고 했다. 이것은 마태 6:24-34의 의미와 기본적으로 같다. 좋은 경제라면 그러한 인간 경제는 반드시 ‘큰 경제’ 안에서 삶의 다른 차원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큰 경제’와 일치해야 한다. 그것은 ‘큰 경제’의 유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 경제의 궁극적 목적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탈성장 사상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는 인간의 경제행위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경제적인 가치들을 중심에 두는 (또는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일을 중지하고 경제가 최종 목적이 아니라 인간 생활의 단순한 수단으로서 합당한 위치로 돌아간 사회, 따라서 끝없이 증가하는 소비의 이 미친 경쟁을 사람들이 털어버리는 사회를 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지구 환경의 결정적인 파괴를 피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특히 현대인의 정신적, 도덕적 재앙에서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23) 

 

따라서 ‘하느님나라의 경제’와 조화를 이루는 인간 경제 안에서 살아가려 할 때 전통적인 가치들이 필수적이다. 좋은 경제에서는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끼고 보존하는 전통적인 미덕이 선이다. 선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인 기준을 확고하게 붙들 때 우리는 산업경제의 오류를 제대로 볼 수 있다. 베리에 의하면 산업경제는 스스로가 ‘작은 경제’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산업경제는 자신만이 유일한 경제라고 본다. 산업경제는 이용 가능한 것, 즉 기계적으로 다른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원자재”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이용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쓸모없다”, “무가치하다”, “하찮다”고 낙인찍는다. 그리고 결국 그것들을 써먹을 수 있도록 망쳐놓거나 싸구려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산업경제는 유일한 경제로 군림하지만, 실은 ‘큰 경제’에 대한 침략과 약탈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단 ‘큰 경제’, ‘하느님나라의 경제’의 존재를 깨닫고 나면 근대 기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휘브리스’의 산물인지, 즉 오랜 기간에 걸쳐 인간의 지적 전통이 세워놓은 인간의 한계를 한참 뛰어넘은 오만인지 깨닫게 된다. 기독교적 언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죄이다. 

 

사실 ‘큰 경제’에 대한 베리의 서술은 성서만이 아니라 동서양의 오랜 지적 전통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구약성서나 그리스 비극은 우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인간으로서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한다.24) 인간은 유한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오만을 휘브리스(hubris)라고 했고, 휘브리스는 그리스인들이 이해한 비극의 원인이었다. 구약성서에서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고 그의 신비로운 경륜 앞에 인간은 조용히 고개 숙이고 복종할 뿐이다. 알 수 없는 고난 가운데 하느님께 항의하는 욥을 향해 하느님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거기 있기라도 하였느냐”(욥 38:4)고 묻는다. 폭풍 가운데 임하는 하느님 앞에서 욥은 조용히 머리 숙이고 입을 가릴 뿐이다. 욥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했다. 

 

오늘날 이러한 오만,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연이 단순히 자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경제’가 이루어지는 장소, 즉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요람이자 무덤이며 동시에 부활의 장소로서 그 자체가 ‘대지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 안에, ‘대지의 공동체’ 안에 가득 찬 아름다움과 신비, 하느님의 경륜에 눈뜨게 한다. 생명으로 가득 찬 이 대지의 공동체를 지키고 보살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한다. 그리고 대지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도구, 기계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인내력과 자제력, 동정심, 관대함 같은 부드럽고 너그러운 능력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만이 아니라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언제 그만두어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어느 지점에 이르면 인간의 이해능력은 너무나 보잘것없고, 따라서 그때는 ‘큰 경제’의 활동에 경의를 표하고 인간 경제의 활동은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웬델 베리는 이것이 안식일 사상의 실천적인 의미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 지점을 넘어서까지 인간의 활동을 밀고나가 ‘큰 경제’를 침범하는 것은 실제 자신보다 더 큰 것처럼 가장하는 휘브리스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없고, 제비가 하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없듯이, 흙이, 표토가 하는 일도 우리가 할 수 없다. 특히 우리에게는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거기까지 밀고나가는 것은 죄이다. 오늘 우리는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 신적 능력을 전유할 수 있고, 특정한 방식으로 그 힘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 힘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없으며, 그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을 비롯해 우리를 도와줄 어마어마한 힘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근원적인 인간 조건이 얼마나 확고하게 우리를 붙들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아무리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켜주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만든 기계는 항상 죄인으로서 우리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다. 때로 기계는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킴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줄여주고 우리를 더 강력하게 만들어준다. 지금까지 근대세계는 그러한 기계의 가능성을 진보와 동일시했지만, 반드시 우리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므로 타락한 피조물이라는 인간조건을 넘어선다고 하면서 우리는 에덴의 동쪽으로 점점 더 멀리 가는 것이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결국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과제는 우리가 ‘하느님나라의 경제’, 즉 ‘큰 경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같이 깨닫는 일이다. 베리는 바퀴의 비유를 들어 말했다. ‘하느님나라의 경제’가 큰 바퀴라면, 인간 경제는 작은 바퀴이다. 작은 바퀴는 큰 바퀴에 맞추어서 돌아가야 하고 큰 바퀴로부터 그 존재와 동력을 얻는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바퀴는 부서지거나 떨어져나간다. ‘큰 경제’ 안에서는 어떠한 거래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고, 회계도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패자의 손실이 언젠가는 승자의 고통이 된다. 농사를 비롯해서 인간 경제의 모든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것, 곧 물, 공기, 흙, 에너지는 모두 ‘큰 경제’의 핵심적인 원리이며 하느님의 질서 안에 있다. 그것들은 ‘하느님나라의 경제’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삶과 죽음과 부활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역동적인 과정을 유지시키고, 그 속에 사는 모든 존재에게 먹이와 물을 공급해준다. 대지 위에서 잘 살려면 우리는 이 과정이 끝없이 지속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그런 믿음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자발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어야 한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주의 기도’는 이러한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며, “재산을 많이 쌓아두는” 것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이웃사랑이다. 우리의 생명과 삶은 원자재를 비축해놓는다거나 구매력을 축적하는 행위를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하느님나라의 경제’ 안에서 대지의 공동체를, 물과 흙과 공기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잘 보존하고 돌보며, 그로부터 건강한 밥을 얻고, 그럼으로써 생명과 삶을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는 것이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4. 

 

‘하느님나라의 경제’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인간 경제는 지속불가능하다. 철옹성처럼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기후위기는 완강하게 그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문명적 전환이 필요한데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행복하려면 물질적 안정이 이루어져야 하고, 물질적 안정을 이루려면 경제성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장경제는 우리 시대의 우상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환경 위기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고는 하나 아직 대부분 단순한 정보와 지식의 차원에 머물 뿐 내면적으로 깊이 침투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위기를 느낀다 해도 먹고살기 바쁜 대다수 사람들은 생각할 여유도 없고 정부 정책과 과학기술의 힘으로 이 위기도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안이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내면화의 과정, 생태적 존재로서 우리 자신의 본성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대목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의 책임은 막중하다. 급진적 전환을 위해서는 정치적 변화 역시 절실하지만, 정치적 변화를 위해서도 구성원들의 내적 변화가 필수적이다. 생태경제학자 허만 데일리는 기후위기에 직면한 오늘의 상황에 대해 물리적 불가능성과 정치적 불가능성 사이의 싸움이라고 했다. 그리고 물리적 불가능성은 타협이 불가능하지만 어렵더라도 정치적 불가능성은 타협이 가능하니 정치적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25) 데일리가 말하는 정치적 변화를 위해서도 우리 자신의 내적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속한 믿음의 전통 안에서 우리의 생태적 본성을 일깨워주는 가르침들을 확인하는 것은 그 첫걸음이다. 

 

웬델 베리는 그의 책 『소농, 문명의 뿌리』에서26)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와 『일리아드』를 서로 대비시키며 각기 두 가지 인간 삶의 형태, 즉 뜨내기(boomers)와 붙박이(stickers)형 삶의 형태를 보여준다고 했다. 분노와 시기, 욕망에 불이 붙어 전쟁에 뛰어들고 그로 인해 삶이 파괴되는 뜨내기 삶에 대한 이야기가 『일리아드』라면 『오디세이아』는 반대로 그 전쟁에 참여했던 한 남자가 20년이나 집을 떠났다가 마침내 늙은 아내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일리아드』가 영웅담이라면 『오디세이아』는 고향의 대지로 돌아와 다시 가정을 이루고 삶의 뿌리를 내리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다.27)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의 유혹을 받는다. 여신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와 하룻밤을 보내면서 쾌락을 맛보게 하고 불멸의 삶과 안락한 낙원을 보장해주겠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의 제안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향한다. 흔히 『오디세이아』를 인간의 귀소본능의 문학적 원형으로 이해하지만 베리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의 동굴에 남아 불멸의 신이 되기를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가 병들고 아프고 죽는 인간의 길을 택한 것은 단순히 아내에 대한 사랑이나 애국심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베리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에게 집이란 아내 페넬로페만이 아니라 가족과 가문, 그들이 뿌리내린 공동체와 그 터전으로서의 땅, 거기 속한 전통과 기억, 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고향의 대지와 거기 속한 사람들, 늙은 개, 집 앞의 오래된 올리브나무, 그 사이로 부는 바람, 그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로서 그의 존재의 뿌리를 이루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칼립소의 세계 대신 페넬로페의 세계를 선택함으로써 오디세우스는 전쟁으로 뿌리뽑힌 자신의 삶을 고향 땅 위에 다시 뿌리내리는 길, 존재의 뿌리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28) 베리에 의하면 그 여행은 존재와 장소 간의 근원적인 결합을 상징한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이 감동적인 것은 그의 여행이 존재와 장소 간의 근원적인 결합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원형으로서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삶이란 궁극적으로는 지상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고 삶의 평화는 친숙한 일상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모든 존재에겐 삶의 여정을 기댈 오래된 장소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 역시 아끼고 지킬 오래된 장소를 찾는 힘든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과거에는 신적 계시에 사로잡힌 예언자들이나 환상가들이 우주 대파국에 대한 어두운 종말론적 비전을 펼쳐보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과학자들로부터 지구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성서의 묵시문학적 환상가들이 인간의 타락과 죄로 인해 끓어오르는 신적 분노의 표현으로서 마지막 때의 대파국에 대한 환상을 펼쳐보였다면, 현대의 묵시가인 과학자들은 산업문명 이후 250여 년 간 이어져온 인간에 의한 극단적 자연파괴 행위의 결과를 객관적 수치와 사실들로 보여준다. 또한 성서의 유대 환상가들이 묵시적 은유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실은 ‘세계의 종말’이 아니라, 식민지 피지배민족이었던 유대인들을 억압하는 ‘제국의 종말’에 대한 기대였다면, 오늘날 과학자들이 펼쳐 보이는 파국적인 미래의 모습은 결코 은유가 아니며, 그 일차적인 희생자들은 전 세계의 가난한 약자들일 공산이 크다. 결정적으로 성서의 고대 묵시가들은 파국 이후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 새 인간을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세상의 악과 고통을 하느님이 펼치는 거대한 드라마의 전개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파악함으로써 불행한 경험들이 더 이상 뿔뿔이 흩어진 무의미한 파편이 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된 질서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했다. 묵시적 환상가들이 했던 일은 고통스러운 현실이 오히려 삶을 더 심화시키고 삶에 궁극적 결실을 가져다 주는 계기가 되도록 인간 경험들을 해석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느님이 펼치는 종말론적 드라마, 즉 새로운 시작을 향해서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행동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대파국 너머 새하늘 새땅 새인간을 꿈꾸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능했다. 우리에게도 그것이 가능할까? 오늘 우리는 고대의 환상가들이 코끼리 다리처럼 든든하게 발딛고 있던 토대, 삶의 지속성에 대한 기대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그들이 아니라 우리야말로 진정한 묵시록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 묵시록적 상황에 직면하여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고대의 묵시가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만일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은 어떤 형태를 띠겠는가? 

 

이 절대절명의 시대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희망은 무조건적인 희망뿐이다. 외적 조건에 대한 영리한 판단에 근거해서 이러저러하게 잘 행동하면 잘 되리라는 기대(expectation)가 아니라, 진실한 삶, 인간다운 삶의 길을 걸으면서 기다리는 것, 즉 이반 일리치가 말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희망(hope), 인간 실존에 각인된 본질적 구조로서의 희망뿐이다. 아마도 그것은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한 수도사, 죽은 나무에 계속해서 물을 주었다는 저 중세 수도사의 행위를 성실하게 계속하는 것이리라. 죽은 나무에서 푸른 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물을 주는 행위,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믿음의 오래된 습관인 종말론적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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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ldo Leopold, “Engineering and Conservation,” The River of the Mother of God and Other Essays by Aldo Leopold, ed. Susan L. Flader and J. Baird Callicot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91) 참조. 

2) 근본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만, 안병무 선생이 생애 말년에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쓴 『선천댁』에서 우리는 이러한 부드럽고 너그러운 영혼에 대한 찬미를 듣게 된다. 안선생은 쓰라린 시련 가운데서도 존재의 근원적인 순진성을 잃지 않고 가족과 이웃을 한없이 품어 안음으로써 타자를 생명의 밝음 가운데로 인도했던 어머니 선천댁을 민중의 화신으로 그리고 있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의 바탕에는 이처럼 부드럽고 너그러운 인간, 민중의 순진성에 대한 믿음과 찬미가 있다. 

3) 오스발트 A.G. 슈펭글러(1918), 『서구의 몰락』 양해림(역), (책세상, 서울: 2019), 88. 

4) 1988년 결성된 IPCC(International Panel of Climate Crisis)는 1990년 1차보고서를 발표한 이후 최근 6차 보고서를 발표하기까지 계속해서 기후위기 상황변화를 업데이트 해왔다. 6차보고서에서는 만일 지금과 같은 상태로 계속 온실가스 배출이 증가하면 2100년까지 최고 4.4-5.7도 상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지옥문이 열린다고 할 수 있다. 김준우, 『인류의 미래를 위한 마지막 경고: IPCC 6차 보고서(2023)와 그리스도인의 과제』 (생태문명연구소, 고양; 2023) 참조. 이 책에서는 IPCC 6차 보고서를 분석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5) 인간의 경제활동이 지구 한계에 어느 정도 접근했는지를 확인하는 객관적인 지표들로 요한 뢱스트룀(Johan Rockstrom)은 9가지 지표를 제시했는데, 기후, 생물다양성, 토지사용, 영양소의 한계, 해양산성화, 담수사용량, 성층권오존층, 대기중 에어로졸, 신물질이 그것이다. 그는 이중 기후, 생물다양성, 토지, 영양소의 한계선이 이미 위험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 요한 록스트룀/오웬 가프니(2001), 『브레이킹 바운더리즈: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담대한 과학』 전병옥(역) (사이언스북스: 2022), 138. 2022년에는 데이비드 암스트롱 맥케이 등 과학자들에 의해 더 세분화된 지표들이 나왔는데, 이들은 16가지 지표 중 5가지가 이미 회복불가능한 티핑포인트를 통과했을 것이라고 본다. 16가지 목록은 1) 그린란드 빙상붕괴 2) 남극 서부 빙상붕괴 3) 레브라도해 대류 붕괴 4) 남극 동부 빙하분지 붕괴 5) 아마존 열대우림 고사 6) 영구동토층 북부 상실 7) 대서양 대규모 해양순환 붕괴 8) 북극 겨울 해빙 상실 9) 남극 동부 빙상 붕괴 10) 저위도 산호초 사멸 11) 영구동토층 북부 돌발 해동 12) 바렌츠해 해빙 돌발 상실 13) 산악 빙하 상실 14) 사헬과 아프리카 서부 몬순 전환(녹화) 15) 북부 삼림(남부) 고사 16) 북부 삼림(북부) 확장 등이다. 그들은 이중 1) 2) 3) 6) 10) 다섯 가지는 회복 불가능한 단계로 들어섰다고 평가한다. David Armstrong McKay, Staal, Arie et al. 2022. 김병권, 408에서 재인용. 

6) UNFCCC(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 2022. 2022 NDC(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Synthesis Repport”. https://unfccc.int/ndc-synthesis-report-2022#Mandate-and-background 

7) Bill McGuire, “Why we should forget about 1.5C global heating target?”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22/sep/12/global-heating-fighting-degree-target-2030. 

8) 나오미 클라인/이순희 역,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자본주의 대 기후』 (파주: 열린책들, 2016), 173, 291-293. 이 책에서 나오미 클라인은 수많은 자료와 사건들을 분석하고 탈자본주의, 탈성장주의의 방향을 제시했다. 클라인은 1980년대 초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수상이 집권했던 것이 기후위기 대응과 관련해서 얼마나 불운한 일이었는지 썼다. 당시 세계가 직면했던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 탈규제와 민영화,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신자유주의가 이들에 의해 대안으로 채택되지 않았다면, 인류는 지구 시스템과 전쟁을 벌이는 어리석은 길을 멈추고 다른 사회경제적 대안을 모색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역시 기후대응을 위한 기회였는데 오바마 행정부의 무의지와 주류 환경운동 단체의 오판으로 인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Ibid., 181-86. 최근 우리나라 저자에 의해 집필된 중요한 생태경제학 저술로는 김병권, 『기후를 위한 경제학: 지구 한계 안에서 좋은 삶을 모색하는 생태경제학 입문』(서울, 착한 책가게; 2023) 참조. 이 책은 자연, 사회, 인문학적 언어를 통합적으로 구사하면서 비전문가도 쉽게 읽을 수 있게 생태경제학의 제안들을 설명하고 있다. 

9) 탄소포집, 성층권에어로졸 분사, 인공지진 등 지구공학적 방법도 있지만, 이것은 문제해결을 위해 더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10) 2022년 로마클럽에서는 전세계의 적정 경제수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 15,000달러를 제시한 바 있다. 

11) Rudolf Bahro, “Theology, not Ecology” https://onlinelibrary.wiley.com/doi/epdf/10.1111/npqu.11426. 

12) 울리히 두크로/프란츠 힌켈라메르트, 『탐욕이냐 상생이냐』 한성수(역) (생태문명연구소: 2018), 146. 

13) 에릭 T. 프레이포글, 『가장 오래된 과제: 자연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생각하다』 박경미(역), (한울 아카데미: 2021), 258. 

14) 프레이포글, 172-176. 

15) 조지프 콘래드, 『어둠의 심연』 이석구(역), (을유문화사: 2011), 312. 

16) Wendell Berry, “Two Economies“, 186-201. www.worldwisdom.com/public/library/default. aspx 23  

17) Wendell Berry, 186. 

18) 김병권, 97. 

19) 엔트로피 법칙을 경제영역에 적용하여 경제성장의 불가능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최초의 생태경제학자로 김병권은 니콜라스 조르제스쿠-로겐을 들고 있다. Nicolas Georgescu-Rogen, “Energy and Economic Myths”, Southern Economic Journal Vol. 41, No. 3(1975) 김병권, 96-108. 

20) 생태경제학자인 로겐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자원은 어떠한 다른 생산요소와도 같지 않다. 자본이나 노동의 변화는 단지 상품생산에서 폐기물의 양을 감소시킬 수 있다. 어떤 주체도 그 주체의 작업대상인 물질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자본 역시 그것이 만들어질 때 사용되는 재료를 창조해내지 못한다.” Peter Victor, Herman Daly’s Economics for a Full World: His Life and Idea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80-81. 김병권, 93에서 재인용. Nicolas Georgescu-Rogen, 『엔트로피와 경제』 김학진 유종일(역) (한울: 2017) 참조.  

21) Herman Daly, 『성장을 넘어서: 지속가능한 발전의 경제학』(1997) 박형준(역) (열린책들: 2016), 326에서 재인용. 

22) Ernst Schumacher(1973),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상호(역) (문예출판사: 2022) 

23) Cornelius Castoriadis, La Montée de l’insignifiance. Les carrefours du labyrinthe Ⅳ, (Seuil, Paris: 1996), 96. 세르쥬 라투슈, 『탈성장사회: 소비사회로부터의 탈출』(2010) 양상모(역) (오래된 생각: 2014) 179쪽에서 재인용.  

24) 소크라테스의 말로 널리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도 원래 아폴론 신전인 델피 신전의 신탁이었다. 즉 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분수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25) http://www.conversationearth.org/economic-heresy#113 

26) 웬델 베리(1977), 『소농, 문명의 뿌리: 미국의 뿌리는 어떻게 뽑혔는가』 이승렬(역)(한티재: 2016), 254-66. 

27)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의 왕으로 나오지만, 『일리아드』의 다른 영웅들과 달리 잔머리를 잘 굴리는 보통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어 οὐδεῑϛ(우데이스), 즉 “아무도 아닌”이라는 말과 비슷하고, 따라서 “아무 것도 아닌” 보통 사람을 뜻했을 가능성이 있다. 

28) 박혜영, “웬델 베리”, 『느낌의 0도: 다른 날을 여는 아홉 개의 상상력』, 94-119. 이 글에서 박혜영은 웬델 베리의 오디세이아 해석을 장소와 존재와의 연관성에 착안해서 유려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 부분의 서술은 박혜영에게서 통찰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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