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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 |
한국 민족 운동과 통일
(한국신학연구소)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1. 민족과 네이션

민족이란 개념은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다. 현실체로서의 민족과 개념 상의 그것 사이에 큰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명적으로 사용하는 민족이란, '족'(族) 자가 붙어 있는 것에서 보는 대로 종족을 기반으로 한 개념이다. 따라서 그것의 정치적 실체로서의 체제는 가족 제도의 확대로서 가부장적인 것을 이상으로 했으며, 또한 그것이 종족적 대집단을 결속하는 데 호소력이 있었다. 유교가 500년 동안 우리의 가치 기준이 되었던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민족은 종족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서구 사회에서도 종족(race)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통념으로 된 민족이란 개념에 꼭 맞는 것은 없다. 흔히 네이션(nation)을 민족으로 번역하나 그것은 국가를 전제한 국민이라는 뜻도 되는 것으로서 민족과는 다르다. 특히 한 민족을 혈통, 언어, 문화, 그리고 정치적 단위의 실체 등으로 일치된 공동체라고 할 때 내셔널리티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개념이다.

서구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모호해진 것은 저들에게 그러한 현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서구의 국가들은(미국 등도 포함해서) 종족을 바탕으로 한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저들의 역사가 여러 종족들을 혼합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랜 옛날에는 종족적 감정을 내포한 민족이 있었다. 켈트족, 게르만족, 노르만족 등이 그런 것이다. 이러한 종족들이 혼합되어 나라를 형성한 것이 서구 제국이다. 가령 서구에서 가장 일찍이 국가 체제를 갖춘 영국의 경우를 보아도 켈트족, 게르만족, 프랑스화되었던 노르만족 등의 혼합체이다. 그런데 그것이 완전 동화되지 않은 채 국가를 형성했는데, 그것은 오늘에도 지속되는 현상이다. 지금도 게르만계가 앵글로색슨으로, 켈트계가 웨일즈족 또는 스코트족의 후예라는 의식과 전통을 여전히 고수한다. 따라서 언어도 세 가지 이상이다(영어, 프랑스어, 웰즈어). 섬나라로서 영국이 그러할진대 서구 대륙의 나라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혈통상으로는 이미 가려낼 수 없게 혼합되어 있고 통치의 실체로서도 통합과 이산을 거듭했으며 그것이 오늘과 같은 나라로 정비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서부터다. 그렇게 정비된 현상을 보면 혈통은 물론 언어나 풍속 등은 통치 단위와 상관이 없다. 가령 영어를 쓰는 이들이 많은 나라를 형성했으며, 독어를 쓰는 이들이 오스트리아, 동구, 스위스 등에 갈려 있다. 그러므로 종족적으로나 언어상으로 독(獨)불(佛)이(伊)라는 엄연한 현실과 의식을 가진 세 족속이 한 네이션을 이룬 스위스 같은 예가 우리에게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이나 저들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한 저들에게도 '민족'이라는 것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독일에서 볼 수 있다. 독일은 국가 형성의 측면에서 볼 때 서구에서 후진국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열등감에 사로잡혔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민족을 찾았다. 그들의 그같은 노력에 자극을 준 것은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주장이었다. 그의 제자 격인 독일의 헤르더는 자연과 역사를 유기적인 성장이라고 보고, 민족을 개별적이며 독특한 단일체로서 신의 자기 계시의 단위라는 주장을 내세웠으며, 한 민족사는 하나의 부단한 창조 과정인 생활로 점철되므로 신의 계시의 실현체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도 혈통적인 데서 민족의 거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민족이란 정치적 또는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신적이며 도덕적인 개념이라고 했다. 쉴레겔도 민족을 찾으면서 혈통 대신에 지정적인 거점으로 라인강을 "우리의 조국, 우리 역사, 그리고 우리 국민성 그대로의 영상"을 심어준 것이라고 했으며, 피히테나 아른트(E.M. Arndt) 등은 독일 민족에게 그 언어의 고유성과 우수성을 크게 부각시켜서 그 민족 의식을 자극했다.

이처럼 민족을 찾으려는 것은 공동체적 형성(국가)을 위한 요소를 찾자는 것인데, 그것은 특히 나폴레옹의 서구 정복에서 온 자극에서였다. 제1차대전에 패한 독일은 히틀러를 중심으로 피와 흙을 내세워서 게르만 민족주의를 수립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20세기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결국 저들은 한 네이션을 형성하기 위해서 없어진 민족을 재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발돋움을 하는 데는 또 하나의 큰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문화적 경계를 그을 수 없는 역사와 현실 안에 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서구제국에서 문화라면 뭐니뭐니 해도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세계성을 지녔기 때문에 종교와 문화적 측면에서, 나는 이 나라 국민이라는 특수 의식을 주입시키기가 곤란했다. 그러므로 정치적 단위를 형성하는 운동은 같은 그리스도교지만 그것을 분파시키거나 이미 분파된 어느 하나와 일치시키려고 했다. 여기서 국가 형성의 갈망은 종교 전쟁이라는 형태로 번져나갔다. 독일이 신교에 거점을 둔 것은 종교개혁을 민족적 결단으로 파악한 때문이나 그것으로 모두를 포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신교의 프러시아와 구교의 바이에른이나 오스트리아와의 통합이 어려웠다. 영국에서는 가톨릭에서 독립하여 앵글리칸 교회를 창설하는 것과 네이션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것으로 국민 전체를 포괄할 수는 없었으나 바로 그것이 국가 형성의 발판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이상과 같은 역사를 지닌 서구 제국에서 형성된 말이 바로 우리말로 번역할 수 없는 '네이션' 또는 '내셔널리티'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이에 비해서 우리는 대조적인 입장에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 민족 하면 너무나 자명적인 만큼 새로운 정의가 필요없다. 정치적으로는 주권을 잃은 역사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내셔널리티란 서먹서먹한 말이나, 민족이라는 뜻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혈통, 언어, 지역 등으로 볼 때 수천 년의 역사를 그대로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국가(정부)는 없었어도 민족은 없어진 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민족을 하나의 숙명체로 알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로서의 국가 형성을 이룩할 결정적인 요소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서구 국가들과 비교해서 우열을 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면 서구 국가들이 혈통이나 언어와 같은 공통의 분모를 갖지 않았는데도 강자로서 세계를 지배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2. 네이션과 민권

저들의 공통의 바탕이 그리스도교임을 말했다. 저들은 그것을 전제로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네이션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것은 문화적 배경이고 그들에게 또 하나의 모델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 국가 사상이다. 이 둘을 어떻게 계승 조화시키느냐에서 저들은 각기 어느 정도의 고유성을 내세웠다.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저들은 히브리 민족 사상의 3대 근간인 선민 사상, 역사 의식으로서의 미래 희망, 그리고 민족적 메시아 사상을 배웠다. 히브리 민족이 수천 년을 주권과 영토와 심지어 말까지 잊어 버리면서도 여전히 민족으로 살아남은 것은 바로 이상과 같은 신념 때문이었다. 영국이 국가 의식 형성에서 바로 이러한 것을 자기들 것으로 받아들이고 국민에게 주입시키는 것으로 대영제국을 이루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다. 영국만이 아니라 서구 제국 중에 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히브리적 민족 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모델로서 고대 그리스적 국가 사상도 영향을 끼쳤다. 고대 그리스의 민족적 공동체의 모체는 폴리스(polis) 체제와 사상이다. 폴리스는 개인 위에 있으며, 개인은 이 폴리스를 위해 있을 때 존재 의미가 보장된다. 플라톤은 이런 전통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개인에 대한 국가의 우위성을 역설했다. 한때의 프랑스나 독일 등은 플라톤적 국가관을 도입하여 강력한 통치 체제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자연법적이며 합리적인 사고 영향은 그리스도교의 영향과 결부되어 강력한 통치권만으로 국가를 형성할 수 없게 했다. 그리스도교에서 받은 주권 의식과 그리스의 합리적 사고에 젖은 민중은 통치권을 상대화했으며 합리적인 강권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구 제국은 자기 판도 안에 들어온 민중의 뜻에 영합하는 데 경쟁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국의 존 밀턴은 "내셔널리즘이란 권위로부터의 개인의 자유확립이요, 정부나 교회에 대한 개인 인격의 자기주장이며, 또한 예속과 미신의 멍에로부터의 인간을 구출"이라고 했다.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은 크롬웰도 1654년 의회에서의 연설에서 "양심의 자유와 국민의 자유, 이 두 개는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쟁취해야 할 신성한 것"이라고 했고, 로크는 개인의 자유, 위신 및 행복이 일체의 국민생활의 기본 요소라고 단언했다. 이것은 바로 영국이라는 국가로 국민을 결속시킨 핵심이다.

영국의 이 같은 네이션의 성격과 그 구체화는 군사적 정치적인 힘으로 통치의 판도를 넓히고, 그 안에 거주하는 민중들을 다스림으로써 '조국화'하려고 몸부림쳤으나 군사적 정치적 패배와 더불어 지리멸렬 되는 고배를 계속 마셔온 유럽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끼쳤다.

세계 제국의 영광을 구가하던 프랑스는 군사적 패배와 더불어 국가의 판도가 축소됨으로 해서 안으로 침체되어 있을 때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네이션'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서, 그 바탕은 역시 국민의 뜻을 일반 의사라는 이름으로 특수 의지(집권자)의 우위에 두는 것과 철저한 자유정신이었다. 그의 주장이 선풍적으로 파급되어 유럽 국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영국이라는 새로운 '네이션'의 출현이 심은 씨에 물을 준 결과라고 하겠다.

루소는 제네바에서 탄생했다. 그는 그곳에서 애국적 덕성과 거룩한 국민이 되게 한 고대 도시 국가들의 성격을 살리려고 한 제네바의 칼빈주의 전통, 그리고 스위스 공화국들의 떳떳한 자유 정신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고, 그 영향 아래에서 사생활 영역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국가는 개인간의 상호 작용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일종의 보호의 틀로 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마침내 프랑스 혁명(1789)이 일어났다. 이것은 봉건적 국가 체제의 종언의 나팔소리와도 같았다. 자유, 평등, 인권 사상의 승리는 바로 프랑스 혁명이 가져다준 것이며, 그 승리가 민주 국가의 정초 작업을 이룩한 셈이다. 1789년 8월에 인권 선언이 법으로 제정 선포된 것은 바로 인권이 법에 의해 보호되는 자유로운 국민적 통일로 이루어지는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게 했다.

이와 같은 해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새 나라 건설을 위해 황무지인 북미로 이주하여 많은 투쟁 끝에 결정된 미 국가의 성격이 발표되었는 데 그것은 '만인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 '같은 창조주에 의해서 일정한 상호 불가침적 개인의 권익 옹호' '생명, 자유 및 행복 추구의 권리를 모두가 부여받았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라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이었다. 그 헌법은 바로 이상의 내용을 평등하게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군사적 수단으로 통치하는 국가 형성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고 각자의 선택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연방제를 채택하고 혈통이나 전통이 다른 민중들이 스스로 결정하여 참가할 수 있게 함으로써 연방은 날로 늘어나고 복합적이면서도 공통의 분모를 갖는 새로운 '국가'를 이루었던 것이다. 1830년에 제퍼슨의 생일축하 자리에서 당시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 "우리의 연방은 보존되어야 한다"는 말로 축배를 들었을 때 부통령 존 칼훈이 그의 말을 수정하여 "가장 가치가 있는 자유에 다음가는 연방, 그것은 연방의 혜택과 부담이 골고루 분배됨으로써만 보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이라고 함으로써 '자유'를 재강조한 것은 바로 미국의 민주 체제 성격의 재천명이었다

이런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저들은 '천명'(malest destiny)이라고 믿고 서부 개척에 자발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점차적으로 국민 의식이 구체화 되었고, 남북의 심각한 대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며, 혈통 과는 상관이 없으면서도 민족과 같은 의식을 지닐 수 있는 '네이션'을 이룩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 핵심은 결국 인권의 존중과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를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러므로 구미의 내셔널리티는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유동적일 수 있다. 민중은 보다 자유롭고 인권이 존중되며 행복할 수 있는 나라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국민의 결속을 위해서 국민을 존중하는 보다 나은 체제로 계속 개선해 나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튼튼한 결속을 할 수 있는 중요한 바탕일 수 있는 단일 민족이라는 뚜렷한 거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민주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국가관이 정립되지 못했다. 그것은 민족의 구성원인 민중의 뜻을 묵살해 온 역사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국민의 인권 의식과 자유로운 선택의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국민 전체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국가 형성의 철학이 없었고, 언제나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주종 관계로 형성되는 낡은 국가관이 그대로 지속되어 왔다. 국민으로서의 주권 의식을 억누른 채 밖으로부터 들어온 민주주의라는 감투를 씌워놓은 탓에 3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야누스적 민주 국가로 남아있다. 민족은 있어도 주권 의식에 투철한 민중이 없는 것, 이것이 우리의 치명적인 취약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 민족의 일원이라는 긍지와 보람을 느끼지 못하게 했으며 그 구체적 현상은 이민열에서 드러난다. 그보다 더 뚜렷한 현상은 외세에 의해 분단된 이 민족이 그렇게 믿던 '피'의 동일성이 아무런 힘도 없다는 사실이다. 북한 정권은 국제 공산주의 슬로건을 내세워 '인민'의 해방 운운하나 실은 외세를 업고 밖으로부터 들어온 소집단이 봉건적 통치 사상을 그대로 고수함으로써 민중을 폭력으로 완전 노예화하는 집단일 따름이다. 그 분명한 증거는 김일성이 자기 자식을 후계자로 임명했다는 데서 드러난다. 이 사실은 자기가 잡은 권력을 왕권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낡은 가부장제도의 연장을 꾀하고 있다는 것은 김일성이 '어버이'라는 신화를 강요하고 있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그리스도 교회가 이 민족과 그 미래를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3. 민족의 미래와 교회의 과제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민족적 수난기에 들어와서 그 운명을 함께 호홉하면서 자라왔다. 일제 식민지의 운명을 앞에 했을 때 개화 운동은 그리스도교와 서구 문명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며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개화 운동과 그리스도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특수성은 침략 세력이 비그리스도권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서구 문명'을 등에 업고 민족적 저항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31 운동에 그리스도교 교도들이 대거 참여한 것에서 표출되었다. 일제의 폭력 정치에 기진했을 때 교회는 점차 개인주의와 피안으로의 도피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적 감정을 잊어버린 일은 없었다. 다만 힘이 없어진 때의 교회는 개화기, 31 운동 등에서 싹트려던 민족 주체 의식이 약화된 감상적인 민족 감정에 눌러앉았던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온 민족의 분단이라는 쓰라린 현실 앞에 한국 그리스도교회는 민족이란 감상에 머물 수만은 없게 되었다.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도 민족 주체가 무엇인가에서 달라질 수 있는 현실 앞에서 저 둘은 공산 체제를 뿌리치고 한국을 선택했다. 그것은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족이라야 참민족이라는 것을 행위로 고백한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가 의식화되지 못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으나 그리스도교와 구미 문명을 일치시킨 과거의 상념에 그대로 주저앉았던 사실, 자유당 정권을 바로 그것의 구현이라고 인식했던 사실, 그리고 625에 다시 겪은 공산 집단에 대한 분노는 반공 곧 민족 수호라는 간단한 도식에 머물도록 했다. 그러는 동안 이 민족을 공산주의에서 수호하는 데는 크게 기여했으나, 참 민족의 구체성에 대해서 방관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런 상태는 민족적 과제를 방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20여 년의 과정 속에 한국 그리스도교는 자랐다. 그들은 점차로 그리스도교가 곧 서구 문명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민족주의는 일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후자의 발견은 자기의 정치적 상황에서 다시 읽은 성서에서 발견한 것이다.

성서는 신구약으로 되어 있다. 일제시에는 민족 구출의 영웅 모세를 계속 반복 설교해 왔다. 이것은 민족주의의 발로다. 또 히브리의 선택된 민족이란 사고도 많이 흡수했다. 그러나 『구약』의 정신적 충추를 이룬 예언자군의 정신은 민족적 구원을 말하나 그와 더불어 어떤 민족이어야 하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예언자들은 언제나 민중의 편에 서서 부패한 권력자들을 죽음으로 경고 했으며 옳은 민족이 아닐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주저없이 절규했다. 이것은 단순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옳은 민족으로 서야 한다는 정신이며, 민족의 주체는 바로 민중이라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신약』은 이미 민족주의와는 직접 상관이 없다. 그것이 형성될 때는 유대 민족의 터전이 없어졌을 때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교 자체의 세계성은 어쩔 수 없이 거듭 탈유대 민족—세계화의 과정으로 줄달음치게 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는 민족 대신 민중의 벗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에게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는 '세계 구원'(하나님의 나라)을 설교했으며, 눌린 자,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들의 친구였을 뿐아니라 그들은 '미래'(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이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임을 대담하게 선언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민족이나 나라에 속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예속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리스의 폴리스 사상과 전혀 다른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불가침성을 확립했던 것이다.

이 같은 성서의 재발견은 감상적 민족 사상을 흔들어 놓게 했고 교회의 과제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고유한 것이 아니라 분단된 민족에서 한국을 선택했던 이유의 심화요, 또한 그것은 참된 '민주적 민족 사회'를 이룩하는 데 이바지하자는 것이다. 민주적 민족 사회를 이룩하자는 것은 바로 인간 존엄성, 인권의 확립, 자유한 인격 등을 최대한으로 보장함으로써 민중이 주체가 된 민족 사회를 형성하자는 것이다.

위에서 『신약』은 민족 개념과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민족의 해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그리스도 교회는 숙명적으로 우리 민족을 옳은 민족이 되게할 사명 의식을 갖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이며 또한 이 민족의 염원과 함께 호흡하는 길이다.

이 민족의 염원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어떤 미래를 바라고 있느냐는 물음을 내포한다. 그것은 자유 민주적 민족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며, 그것은 남북의 민족적 통일의 염원과 직결되어 있다. 이 점에서는 정부나 한국 교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 사이에 긴장이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의 주체성에 대한 견해의 차이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의 객관적인 문제는 분단된 현실이다. 남북의 민족적 통일이 있을 때 비로소 내적인 문제도 해결된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정세로나 우리의 현실로 보아 무력적 통일을 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정부도 대화의 길을 모색한 것이며, 평화적 통일을 과제로 하고 있다.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는 국력의 배양이 배경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옳다. 이 점에서도 정부와 교회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이 국력이냐가 문제다. 정부는 공산 세력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군사력 확보와 그리고 경제력의 신장을 말한다. 이것을 교회가 반대할 까닭은 없으며 그럴 입장도 아니다. 그런데 교회가 인권의 신장, 민중의 자립적 선택의 권리로서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을 마치 반정부적 내지 반민족적 언동이라고 본다면 문제가 크다.

우리는 민족 통일을 염원한다. 그런데 무력적인 통일을 원치 않는 현실이고 보면 남은 것은 공산 체제에 대한 민주 체제의 우월성을 현실로 구현하는 일이다. 그것도 바로 국민으로 하여금 민족의 성원으로서의 주권을 행사하고 보장받은 주체라는 의식과 긍지를 갖게 하는 길이며, 그럼으로써 자발적으로 민주 사회 건설의 요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이런 사회를 이룩할 때 공산 독재 아래 밀폐된 채 30년 간을 세뇌당하여 노예화된 것조차 모르게 된 이북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훈련되고 의식화된 국민이 될 때 비로소 남북 통일이란 막연한 의식은 이북 민중의 해방을 위한 주체 의식으로 바뀔 것이다.

통일을 전제할 때 당면 과제는 민족 주체의 싸움이 될 것이다. 이북 공산 집단도 이른바 민족 주체를 말한다. 그러나 민중의 의사 표시를 완전 봉쇄한 마당에 주체가 있다면 권력을 잡은 김일성을 중심한 소집단일 따름이다. 반백년의 역사를 가졌고 군사경제적으로 세계 강대국으로 등장한 소련도 그대로 봉쇄 사회라는 것은 민중을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폭력으로 다스린다는 구체적인 증거인데, 하물며 이북 집단 아래 있는 우리 민족의 주체성이야 더 물어볼 여지도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민주 사회는 민중이 주체며, 그 의식이 분명하면 할수록 그 사회는 강해진다. 이것이 바로 한국이 출발한 노선이며, 이 노선을 전민족적으로 관철하자는 것이 바로 통일의 염원이다.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교 교회도 바로 그러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인권, 자유, 정의, 평등을 부르짖기에 이른 것이다. 그 같은 것들이 민중에게 의식화되지 않고는 민주사회 건설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민주사회 건설에는 프랑스 혁명과 같은 과정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과정이 없이 민주사회 건설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부조리가 따른다는 사실을 이미 지적했다. 이것은 비단 우리의 경우만이 아니다. 이 마당에 공산 세력은 프랑스 혁명의 후예이기라도 하듯이 가면을 쓰고 유혹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통일이라는 미래를 앞둔 그리스도교 교회의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민주 사회의 기초를 이룬 민권 의식을 수립하는 일이다. 그러나 폭력에 호소한 프랑스 혁명을 재연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임무는 아니며 또 그럴 수도 없다. 우리의 현실이 서구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정신에서 볼 때 오히려 그러한 혁명의 유발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용한 혁명'의 일익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조건이 있다. 첫째는'이 조용한 혁명'의 작업은 민주적 민족 통일을 대전제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말은 한국을 민주적 민족 통일의 모체로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는 교회가 정권과 관련된 정치적 차원에서 파생된 동기에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정치 단체가 아니라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종교적 공동체다. 인간애의 집약이 민족애며, 그것의 구체화가 민중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사실을 의식화하며 그러한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사상계』 1976/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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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족 운동과 통일
(한국신학연구소)
List of Articles
표지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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