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의 한국 기독교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수 있던 것은 1900년 이후이다. 1900년에 신자 17,000명이라고 하고, 이 때가 바로 평양신학교 설립의 해이다. 190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립된 한국장로교가 평양에서 창립된다.
당시 선교사가 33명, 한국인 대표가 36명, 목사가 6명, 신자가 약 70,000명이라고 하니 이때쯤부터 한국 교회에 기대와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1905년은 한ᆞ일보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열강의 대(對)한국 각축전은 끝나고 일본의 손아귀에 나라의 운명이 귀착됐을 때이다. 당시의 국가는 약할대로 약해졌으며 불교, 유교에는 더 기대될 것이 없었고 그렇다고 새롭게 규합된 세력은 없을 때이다. 이 시기의 기독교는 민중이 기대를 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다.
그러한 기대를 한 몸에 모을 수 있었던 외적인 여건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1) 민중이 낡은 것에 대해 절망하였고 더불어 무엇인가 새 것을 동경해서 갈망했으며
2) 일본ᆞ중국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어오던 새로운 세계로서의 서구 문명에 큰 관심을 보여 왔는데, 그 서구 문명이 기독교회의 후견인(後見人)의 역할을 했으며
3) 이 시기는 우리 민족이 일본 식민 세력을 대항할 내부에서의 발판을 다 잃어버린 때라 서구 세력을 배경에 갖고 있는 세계적인 기독교가 항일운동의 거점이 될 수 있었으리는 기대 등이다.
이 전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벼랑에 몰린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는 외점(外點, Punktausserhalb)을 기독교에서 찾았던 것이다.
기독교의 출발은 그 당시에 알맞는 달관적(達觀的)인 것이었다. 그 특징을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대중에 침투(천주교는 제외)한 것이다.
1883년의 선교 정책의 기록에 의하면 ① 우선 노동자 계급을 선교의 대상으로 하고, ② 부녀자를 선교함으로써 가정에 침투, ③ 저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서 소학 교육부터 하고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중학 이상의 교육 기관을 설치하며 일면 한글 사용을 채택한다.
2) 교회 성격을 자주 독립의 행동대로 삼았다.
소위 네비우스 방식을 채택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면 곧 ① 개인 전도 ② 교회 자치와 자립이라는 원칙을 세워서 사색보다 실천에 옮기게 함으로써 이조(李朝) 당론과 공론(空論)에 문약(文弱)해진 한국에 대조를 이루었다.
따라서 당시의 기독교 선교를 우민정책이라는 시각으로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또 기독교가 이북(以北)에 거점을 둔 것도 정권과는 다른 민중적 판단이다.
3) 대외적으로 미신 타파와 새 윤리 추구를 행동의 지침으로 삼았다.
저들은 우선 술, 담배를 금하는 것으로 결단의 외적 표준을 삼고 일부다처제의 폐습은 타파하고 여성에게 문호 개방함으로써 새로운 윤리 제창의 강력한 아성이 됐고 미신적 조상 숭배와 무당을 전부 우상(偶像)으로 규정함으로써 비생산적인 중요한 요소를 거부하는 반면 과학적 사고의 길닦기 역할을 했다. 더욱이 교회 자체의 치리를 의회적(議會的)으로 해서 민주주의 체제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이상의 세 가지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독립된 자각에서 한 일은 아니고 선교부(宣敎部)의 정책에 호응한 것이다. 그러나 선교부와 상관 없이, 아니 어느 면에서 저들의 정책에 역행하면서 그 독립성을 발휘한 것이 있다. 그것이 네 번째 특징으로서 기독교가 항일의 민족 운동에 적극 가담한 것이다.
4) 선교사들은 정치와 포교를 처음부터 엄격히 분리시켰다. 1911년 105인사건 때 선교부가 일본 총독에게 낸 글에 1) 기독교가 반란 선동의 소굴이라고 지정된 감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역설하고 "우리 교회 역원 및 교사에게 권세에 복종할 것을 가르치고 교회를 정치 운동(運動)에 간여함을 허락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 일본과 한국의 감리교 감독인 헤리스는 일본 신문에 이 사실을 극구 주장하는 글을 실음으로써 한국 기독교인들의 독자적인 성향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1904년 테프트-가츠라 비밀 회담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는 데, 선교사들은 저들의 국가 정책에 따라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이해했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초대 주(駐) 한국 공사 알렌이 일본 침략의 진상을 본국에 보고한 이유로 소환됐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인 자체는 저들의 정책을 외면하고 과감히 항일 전선과 민족 운동에 참가했으며, 교회도 애국 단체라는 성격을 보여 주어서 교회는 민족의 염원에서 이질적인 것이 아니게 했다.
1897년 북(北) 장로교 선교 보고에서는 특히 기독교도들의 집과 교회에는 태극기가 꽂힌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참여가 '기독교회의 독자적인 기독교적 사상에 의해서 이뤄진 결단이며 행위였나?' 아니면 '민족의 일원으로서 당시의 대세에 몰려 앞장섰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에 독자적인 입장에서 취해진 것이라면 그 입장은 군사적ᆞ정치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것으로 이 민족 운동이 완전히 봉쇄됐을 때에는 홀로라도 끝까지 싸웠어야 한다.
그러나 민족 전체가 봉기했을 때는 함께 봉기했으나 그것이 좌절됐을 때는 피안적인 세계로 도망해 버렸다. 이 사실은 1907년과 1920년의 부흥 운동의 성격이 말한다. 당시의 부흥 운동의 내용은 벌써 민족 운동, 사회적 책임성은 완전히 외면하고 피안적인 위로로 일관했는데 1907년은 바로 한일보호조약 체결 2년 후이며 1920년은 3ᆞ1운동이 좌절된 다음 해이다.
바로 이럴 때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인 방법으로 갈 길이 더 없었을 때 산상수훈에 영향을 받은 인도의 간디 정도만큼이라도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성서적인 근거에서 역사적인 사명의 비전을 보여주고 현실에서 정치인들이 내버리고 간 지휘봉을 꼭 잡고 나갔더라면 아마도 그 시대에 있어서 굉장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안에만 도피함으로써 3ᆞ1운동 이후 엘리트들은 교회에서 많이 떠나가고 망명하거나 아니면 사회주의로 이동했다. 이동휘, 여운형 같은 인물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저들은 기독교도 몰랐으며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알고 그것에 가담한 것도 아니었다. 저들은 기독교에 뿌리박은 민족 지도자가 아니고 민족주의에 뿌리박고 기독교에서 사회주의로 가서 민족해방을 위한 도움을 구한 인물들이다.
도대체 기독교가 성서적 또는 신학적 반성을 하고 한 민족의 역사 창조에 어떠한 형태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성서에서 나타나는 역사와 인간과의 관계는, 인간은 역사 안에 있으나 역사에 속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역사 안에 있어 역사의 참여자이나 역사 안에 어떤 절대적인 거점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거점은 역사 밖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외점(外點)이다.
이 사상은 땅위의 어떤 것에도 궁극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땅 위에서 인간에게 절대로서 군림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우상이다. 기독교는 절대주의, 무슨 지상주의하는 것은 다 우상으로 간주하고 싸워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 민족지상ᆞ국가지상ᆞ과학지상ᆞ경제지상 이런 것들을 기독교회는 허락할 수 없다. 참 하나님을 믿는 교회라면 불의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불의란 절대로써 인간의 희생을 하나의 권리처럼 요구하고 군림하는 일체의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한국 교회가 이 민족사에 참여하는 길은 직선적(直線的)은 아니고 부정적(否定的) 참여의 길 뿐이다. 끝까지 "아니다" 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질 때 "아니다" 할 수 있는 거점을 못 가진 이 민족에게 새 가능성의 거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