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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 |
한국 민족 운동과 통일
(한국신학연구소)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1. 8.15는 해방이 아니었다.

학병을 피해서 만주 오지에 가서 1년을 숨어 살다 가끔씩 손에 들 수 있는 신문상에서 일본이 망해가는 것을 감지하고, 다시 간도로 잠입해 들어온 나는 중학생 시절에 인연을 맺은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가 중심에 있는 어떤 시골에 파묻혀 지냈다. 소학교 1학년 때부터 신으로 떠받들기를 강요받던 히로히또의 육성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815는 글자 그대로 도둑같이 온 해방의 선포였다. 해방의 환희에서 날뛰기를 1주일도 못되어, 해방군이라고 대환영을 한 소련군의 약탈과 여성 폭행 때문에 밤잠을 못 자는 어처구니없는 날을 보내면서도, 일제가 버리고 간 학교나 행정 기구 등을 인수하여 새출발을 시도하였다. 그러다가, 진주해 들어오고 있다는 팔로군(八路軍)을 등에 업고 급조된 공산 세력과의 충돌로 알몸으로 식구를 거느린 채 야간 도주로 두만강을 넘었다. 그러나 그곳 분위기도 역시 소련군 점령하에 공산 세력의 횡포가 극심하여, 고향에도 들러보지 못하고 남한으로 외국 국경을 넘듯이 밤을 선택하여 잠입해 들어왔다. 그러니 하루 이틀을 빼고는 해방을 즐겨 웃음 한번 크게 웃어본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남한의 상황은 글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거리고 학원이고 할 것 없이 헤게모니를 지향하는 사상 투쟁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부정과 폭행 암살 등이 난무하는 글자 그대로의 밤의 역사였다. 38선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도 몰랐고 그 문제는 이른바 미소 공동 위원회라는 것에 맡겨 버리고 내부 분열만 계속했다. 일제시대부터 특혜를 누려온 지주파, 일제의 잔재 세력을 중심으로 급조된 이승만파, 좌우를 합작해 보려는 건준파(建準派), 공산당 등등 거기에 중국 대륙에서 연명하다 귀국한 임시정부파와 이승만파의 암투가 있었다. 마침내 이승만은 미국의 원호 밑에 1948년 8월 15일에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함으로 분단 역사를 사실화해 버렸다. 물론 이북도 동시에 단독 공산 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이른바 해방 45년이 이처럼 이 민족의 염원을 배반하는 분단의 비극이 될 줄 모르고 외세에만 의존했다.

2. 참 해방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외세의 통치 세력에서 벗어나 자주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것을 위해서는 크게 다음과 같은 과제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외세의 잔재를 완전히 소탕하는 일, 둘째 자율권을 완전 확보하는 일, 셋째 자주적 자기 건설을 위한 실력을 확보하는 일, 이상의 세 가지는 분리될 수 없이 서로 맞물린 것으로 이것은 민족단결로써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해방 45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해방은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1) 일제침략은 단절됐는가?

일제 40년, 우리는 글자 그대로 노예상태에 있었다. 그들의 손에 의해서 희생된 인적 경제적 피해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민족 정신의 오염의 심도도 대단했다. 해방 직후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 사람들이 백기를 들고 항복한 수만도 712,000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들은 만주 중국 전역에까지 뻗혀있었는데 관동군이라는 최대의 강대 군단까지 합해 보면 그 수는 어마어마한 것이리라. 그러나 문제는 그 수가 아니고, 저들이 이 나라에서 누린 전능에 가까운 횡포다. 우리 문화를 말살하고 우리의 혈맥을 상징하는 이름까지 바꾸고 우리의 신경에 해당하는 말까지 금지시켰으니 그 악독성은 극에 달했던 것이다. 우리는 저들에게 저항하기에는 너무나도 약한 그리고 평화적인 민족이었다. 일부에서는 항일 운동을 크게 다루고 있으나 그것은 침소봉대한 인상이 없지 않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아무 저항도 못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교활성의 상징이며 우리 민족사의 치욕은 이른바 한다 하는 민족의 명사들이 거의 모두가 친일파로 둔갑했다는 사실이다. 저들이 과거의 명성을 등에 업고 한국민의 일본화를 역설하고 다녔으며, 일왕에 충성하는 구체적인 행위로 남자들은 징병, 징용으로 여자들은 정신대로 나가야 할 것을 역설해 왔다. 또 한편 저들이 한국의 사상범을 색출해 내고 투옥, 학살하는 데에도 한국 사람을 하수인으로 동원했다. 민간 단체라는 것은 사실상 종교밖에는 없었는데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교도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저들에게 항복해 버린 것이다. 다른 것은 다 빼고라도 한국 교회가 우상숭배를 마치 제일 가는 범죄처럼 훈련받아 왔는데, 서울과 부여 등의 신궁(神宮)을 위시해서 전국에 신사(神社) 등이 114개나 세워지고 한국인 전체에게 그 앞에 절을 할 것을 강요했는데, 그 첫 출발인 1925년 서울에 조선 신궁이라는 것이 세워질 때, 적어도 큰 교단을 대변하는 기관지들은 일언반구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오히려 그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은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애국심의 표현이니 우상이 아니라는 궤변으로 교인들을 설득하러 나선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교회도 완전 탈진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곧 항복했는데 미군이 진주함과 더불어 바로 그 일본 관료들을 등용해서 한국 통치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반해방적이고 통분한 예인가!

그런데 항일과 반공을 그의 정치 목표의 주제처럼 반복한 이승만은 자기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일제 밑에 충복들을 모두 다시 등용한 것이다. 고문에 전문가인 고등계 형사들을 위시해서 일제에 충성한 하급 장교들을 국군의 기간으로 만들어 그의 세력의 기반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에 분개한 우리 민의 소리는 높아져 국회 내에 이른바 반민특 위가 구성되었다. 일제 침략의 역사를 단절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과제를 이 특위가 해내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끝끝내 친일파 옹호를 무력으로 실현한 것이다.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던 그들이 이제는 반 이승만 세력을 고문하는 기수로 등장한 것이다. 이 때 우리 해방의 첫걸음이 좌절되고 만 것이다. 저들은 이승만 밑에 일제시대에 배운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확고한 자리를 잡아서 고관들이 되었고 바로 그들의 손에 의해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30여 년의 악몽 같은 세월을 보내게 한 것이다. 친일파들이 이승만 그늘에서 잠복하다가 1965년에 일본 하급 장교 박정희 집단에 의해서 이른바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함과 더불어 일본 세력은 표면에 당당히 부상하게 됐고 오늘에 와서는 저들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듯 망언들을 서슴없이 선전하는 세력들로 대두되고 있다. 한마디로 이른바 45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에게서 참략자로서의 고백 하나도 받아내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 있으니 일제의 지배는 단절된 일이 없음을 입증하는 일이 아닌가?

2) 우리는 자율성을 확보한 민족인가?

우리는 강제로 분단된 채 통일 논의 자유마저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 역사를 회고해 볼 때 고구려의 요절 이후 자율성을 거의 누려보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38선의 분단도 회고해 보면 이상하게도 훨씬 전부터 우리를 제외한 외세에 의해서 계속 논의된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한반도 분할론이 처음 나온 것은 1896년 5월 24일 일본과 러시아의 대표간에 오고 갔다. 그것은 한국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간의 군사충돌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것은 일본 대표의 안이었는데 러시아는 39선을 주장하다가 다른 제국들의 방해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청일 전쟁을 앞두고는 일본이 한국의 중립론을 내세웠는가 하면(1894), 러일 전쟁 직전에는 러시아가 한국의 중립론을 내세웠다(1902). 2차 대전이 끝나려는 무렵에 연합군은 카이로, 테헤란, 포츠담, 얄타 등등의 회담을 거듭했는데 이 때에 한국 문제가 우리를 완전히 제외한 채 그들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논의되어졌으며 결국은 확실한 결론 없이 군사적 이유라는 명목으로 38선이 양진영에 의해 그어졌던 것이다. 그 후 이른바 미소 공동위원회가 한국의 통일 문제를 한국 사람을 제외한 상태에서 계속 논의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영구 분단을 전제로 한 남북 정부를 수립하고 만 것이다.

그 후 625전쟁의 민족적 비극을 위시해서 정치, 경제 어느 분야에서 자율성을 행사한 적이 있는가? 아직도 엄연히 4만여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한국의 군사 통치권마저 미군이 장악하고 남북 회담마저도 남쪽의 대표는 미군이 담당하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아도 적어도 국민의 입장에서 이 나라는 독립 정부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한국의 사정은 고려함이 없이 저희 멋대로 수입품을 결정하고 압력을 가할 뿐만 아니라 끝끝내 관철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자기 정부를 선택할 자율권마저도 엄밀한 의미에서 행사해 보지 못한 것이다.

이상의 종속적 관계에서 해방되려면 결국 그럴 수 있는 힘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데 여기서는 그 문제를 유보하겠다.

3. 민족 통일만이 진정한 예방의 길이다

외세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분단됐던 여러 나라 중에서 모두 자기 힘으로 통일을 이루어가고 실현해 가고 있는데 오직 한국만이 예외로 남아 있다. 그것은 제 힘으로 해방을 하지 못한 필연적인 결과다. 우리에게 반통일적인 현상은 크게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나 있다. 첫째는 물론 국토 분단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령 통일로 매진하는 독일과 다른 점은 독일은 정치적으로 분단된 상태를 지속한 데 대해서 우리의 분단선은 정치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군사적인 분단선이라는 것이 그 특징이다. 둘째는 지역간의 분열이다. 이것은 서구 사회의 봉건주의의 유산에 의한 것과 완전히 다른 인위적인 것이다. 셋째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계급적 분열이다. 역사적으로 우리의 사회에 계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데서도 보는 바와 같이 신분적 계급에서 토지점유에 의한 계급 형성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산업화 사회로 돌입하면서 자본의 집중 정책으로 기업주와 노동자의 계급으로 나뉘어져 그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런 분열을 둘러싸고 상호 자기 정당화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에서 분열 현상은 날로 고착화되어가고만 있다. 그런데 이상의 분열 내지 분단 현상은 그 발단부터가 어디까지나 외세에 의한 것이거나 그것에 조정받는 세력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반통일적 세력들에게 우리는 우리의 통일 문제를 일임했거나 기대는 어리석음으로 40여년을 허송한 것이다. 저들의 분단 정책은 바로 저들의 존재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분단 상태를 유지하면서 아니 유지하기 위해서 상호 적대적 감정을 최대한으로 자극해 왔으며 그것으로 민생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군사력 증강을 정당화하는 발판으로 삼은 것이다. 남한만 해도 거듭되는 권력 쟁탈전으로 이어왔음에도 계속해서 똑같은 무기를 사용한 것은 반공이 었던 것이다. 반공법, 보안법, 그리고 안기부법 등등으로 반통일적 작태에 대한 국민의 소원을 거부해 왔던 것이다. 그것은 이론적 대립이 아니라 정책적 무기로 사용된 것에 불과하다. 이 불의의 통일 의지가 국토 분단과 민족분열을 조장했는데 그것이 이른바 분열과 지배라는 원칙이다. 국민을 서로 적대시하게 하고 집권자는 어부지리를 계속 거둬들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도 아무런 반성 없이 이 그물에 걸려 세뇌를 당해 왔다. 특별히 해방 직후 이북에서 난폭한 공산당에게 쓴맛을 보고 자기 가진 것들을 다 버린 채 월남한 그리스도교인들이, 합리적인 반성은 전혀 배제한 감정적인 반공의 화신이 되어, 입으로는 원수 사랑을 설교하며 공산권 영역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증오를 극도로 고조하면서도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마비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통일 문제는 오랫동안 정부가 완전 독점을 하고 금기로 삼아 왔을 때, 적어도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인정받는 공적인 기관으로는 그리스도교가 유일하게 고난을 무릅써가며 통일론을 민의 문제로 쟁취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 결과는 마침내 1987년 정부의 방해를 거부하면서 통일에 대한 과감한 입장을 세계에 공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통일 논의를 민의 손으로 넘기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1) 통일은 화해가 앞서야 한다.

기독교장로회의 이번 총회는 해방과 통일이라는 주제 아래 "먼저 가서 화해하라"는 성구를 선택한 것으로 안다. 그것은 통일에 대한 선언적인 성격에서 실천으로의 발걸음을 내디디려는 의도를 표시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우리가 화해를 표면에 내세우는 경우 까딱하면 우리 현실에 반하는 오해와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다. 까닭은 확실한 견제 없는 화해의 주장은 알맹이 없는 하나의 설교에 그치고 말 수 있기 때문이다. 화해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실천이 선행되거나 병행되어야 한다. 그 첫째는 맺힌 것을 푸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공산당에 대한 쓴 경험을 고수하고 이북 전체를 적지처럼 간주하면서 증오심을 최대한으로 고취하는 반공주의가 곧 그리스도교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한 화해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맺힌 것을 푸는 일은 반공 의식을 보류하거나 감정적인 영역에서 처리한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화해는 설교의 제목이 아니라 제사적 행위로써만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 시대의 제사 행위를 과거 일로 회상만 해서는 안 된다. 제사의 중심은 화해에 있으며 그 화해의 행위에는 반드시 희생의 제물이 따랐다. 이 사상은 그리스도교에 와서 그리스도론에 그대로 이어지되 첨예화되었다. 예수의 죽음을 화해의 구체적인 행위로 파악한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힌 것을 푸는 사건이라는 뜻이 기조를 이루고 있으나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인간과의 관계에 그대로 적용된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은 다음과 같다. "내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 할 때 형제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은 것이 생각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나아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형제와의 화해가 유리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밀착된 것을 잘 드러낸다. 제물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과의 화해 행위라면 형제와의 화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한 형제와의 원한이란 경제적으로 생긴 맺힌 관계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형제와의 화해는 빚진 것을 갚거나 아니면 채권자가 완전히 빚을 탕감해 주는 행위를 말한다. 그것 없이 말로만의 화해가 가능하지 않다.

이 말은 화해는 반드시 희생의 제물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자기 권리와 기득권을 대전제로 한 화해 행위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일방적인 희생을 함으로 어쩌면 상대방에게 무방비 상태로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각오하고 감행하는 행위가 바로 화해의 행위다. 남북한 정부가 거듭 통일 의지를 표시하면서도 40여 년의 세월을 공염불로 끝 낸 것은 어떤 희생도 전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공에 투철한 그리스도교인들도 외적으로는 공산주의가 반기독교 내지 유물론이라는 것을 내세우나, 내적 주요 이유는 만일 공산 세계가 되면 받을 피해를 최대한으로 가상한 데 있지 않는가? 우리가 우리 국민은 물론이고 아시아 전역을 초토화할지도 모르는 원자무기의 화약고가 되어있고, 미군 주둔을 위시한 군사력 증강에 우리 노동자 농민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하는 상황인데도, 외인 부대의 주둔을 자원하고 군사 증강을 자랑처럼 아는 것은 결국 희생이 두려워서가 아닌가? 이것을 지방과의 관계에서 계급 사회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기득권 수호가 그 중심에서 작용하지 않나?

정말 우리에게 통일의 의지가 있는가? 그것에 의해서만 우리가 비로소 온갖 독재의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루속히 외인 부대를 돌려보내고 그와 더불어 가공할 살인무기들을 철수시키고 일방적으로라도 군축을 단행하는 것으로 평화 의지에 대한 실증을 보여야 할 것이다.

2) 희년은 화해의 제사다

그리스도교는 1995년을 희년으로 선포했다. 그것은 여러 이유에서 맺힌 관계에서 해방되려는 이 시대에 있어서의 최선의 방법을 선포한 것이다. 역사의 악순환에서 엉킨 모든 문제를 풀고 자유와 평등을 기조로 하는 창조의 본래 질서로 돌아가자는 선언이요 제도이다. 그런데 그것을 오늘의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그 방향만을 제시해보면 다음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크게는 남한이나 북한의 모든 것이 이 민족 전체의 것이지 어느 한 특권층의 것일 수 없다. 군사적 시설이나 경제적 능력은 남북 대립의 무기에서 우리 민족 전체의 것으로 환원해야 한다. 이 민족사에 참여하려는 교회도 하루 속히 교단주의나 개교회주의를 지양하며 총력을 이 민족 통일의 제단에 바칠 각오를 해야 한다.

② 모든 사람들의 하늘로부터 직접 받은 생존권리를 회복시켜야 한다. 비인간화를 정당화하는 자본의 편중적 축적이나 사람을 준노예적으로 취급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독점된 권력구조를 제거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민의 자주적 공동체 건설을 의미한다.

③ 민족 분단 또는 분열을 초래하는 온갖 부조리를 통일의 장애물로 규정하고 제거하는 데 온 민족이 매진해야 한다. 군사 대결을 배제하고 휴전협정을 재빨리 평화의 협정으로 바꾸며 가공할 전쟁무기를 계속 증강하려는 계획을 분쇄하며 팀스피리트 훈련 따위에 이 땅을 외인부대의 훈련장소로 제공하는 행위를 중지하고 그 준비에 쏟는 돈을 민족평화 통일에로 전용하는 일이 그런 일이다.

이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자본주의 체제나 권력을 독점물로 영구화하려는 세습 권력 체제 따위의 구성 의도를 분쇄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그 장본인들이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통일의 주체는 결코 정권도 기업가들일 수 없고 오직 '民' 스스로의 힘으로써만 가능하다.

민이여! 그대들이 바로 통일의 주체이며 그대들의 힘으로써만 비로소 참 해방이 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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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 |
한국 민족 운동과 통일
(한국신학연구소)
List of Articles
표지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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