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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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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 |
한국 민족 운동과 통일
(한국신학연구소)
625 전쟁은 언제 끝나나!

625!

이 이름만 불러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한데, 그러나 그것은 이미 아득한 이야기로 사라져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도 많이 반복했고, 6월만 오면 으레 모든 언론매체들이 형식적으로나마 다루는 제목이 되곤 하는 625! 곁에 있는 제자에게 625 경험을 물었더니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라고 한다. 그는 대학원생인데도 10년하고도 여러 해 후에 이 역사 속에 태어났단다! 그렇게 생각하면 625는 확실히 오랜 과거의 일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때의 경험이 너무도 생생하다.

625가 일어날 무렵 이미 민심은 심상치 않았다. 먹구름이 감돌고 있었다. 이런 위기 위식을 같이 느낀 일부 그리스도교계의 청년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모인 모임이 있었는데 나도 거기에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또 한편 대학 동창으로, 일생의 동지로 약속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 모임의 구성원들 역시 위기의식에 몰려 있었다. 우리는 한 기도원에서 밤을 새며 이 난국에서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길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북한군이 남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다음날 서울로 돌아 왔을 때 서울은 글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트럭을 타고 고개를 숙인 채 후퇴하는 국군의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이에 덩달아 피난을 준비하는 시민들은 동분서주했다. 그때 나는 한 교회의 목회에 열중하고 있을 때라 교인들을 위해서는 순교도 감수할 각오로 서울에 잔류하기를 결심했다. 나와 같이 결심한 적은 무리들과 땅굴에서 밤샘을 한 다음날 새벽에는 굉장한 소음이 온 서울을 뒤덮었는데, 혹시나 그것이 국군의 반격 행렬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기대에 학생 몇 명과 더불어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근처에 와 보았다. 그런데 온 거리는 붉은 기를 휘두르는 표변한 군중들의 환호성으로 가득했고 인민군 탱크 부대가 진주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백화점 앞길에 쓰러진 20세 전후의 국군의 시체를 잊을 수가 없다. 엎어져서 가슴과 얼굴을 대지에 대고 군모를 쓴 채 쓰러져 있었는데, 아무도 그에게 관심하지 않았다. 짐승 한 마리가 그렇게 쓰러져도 못 그럴 사람들이! 저들은 들어오자마자 곳곳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공고문을 붙였으나 교회에서 예배를 볼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어떤 도배들인지 교회의 피아노를 위시한 온갖 기구들을 쓸어갔다. 그로부터 지하에 숨었다. 태양이 완전히 그 빛을 잃었고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보이던 첫 경험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B19 전폭기의 폭격을 메시아의 내림처럼 기다렸다. '쌕쌕이'라고 흔히 불렀던 전투기의 내습은 나를 구해주려고 온 천사들의 내림같이 보였다. 인민군, 그것은 곧 나의 구천의 적으로 생각되던 탓이다. 그런데 그때 조그마한 사건이 일어났다. 인민군이 내가 있는 바로 그 남산에 고사포를 설치했는데 어느 날 미 공군이 그것을 폭격했다. 그때 우리는 바로 남산 기슭에 기거하고 있었다. 지척에서 터지는 폭음은 지축을 흔들고 고막을 찢는데, 마치 묵시록적 이변처럼 느껴졌다. 그때 '따발총'을 등에 맨 인민군복의 한 젊은이가 대문을 열고 뛰어들더니 내 다리를 끌어 안으면서 억센 평안도 사투리로 자신은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끌려 왔을 뿐 공산당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며 제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그 포대에 있던 졸병이었던 모양인데 세상이 완전히 뒤집힌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를 지나 정신을 차리자, 그 젊은이는 갑자기 머리를 들고 두리번거리더니 그 비열하던 모습을 일시에 바꾸고 도도한 눈초리로 한번 힐끔 쳐다보다가 잽싸게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에게서 순박한 농민의 아들 이상의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강제로 따발총을 들었을 뿐 어떤 사상적인 무장 따위를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하나의 사건으로 나는 '인민군, 나아가서는 이북에 사는 자들은 모두 적이다'라는 감정에서 풀려났다.

또 어느 날 평소에 나를 지극히 존중한다는 어떤 부인이 찾아와서 우리 어머니에게 나를 구해줄 방도가 있으니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무래도 불안해서 직접 나를 대면시키지 않고 따로 만나기 위한 날을 정했다. 나는 그날에 그 부인을 만났다. 그 부인은 내 손을 잡고 우는 듯 애절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부인 뒤에는 어떤 낯설고 건장한 청년이 서 있었다. 그가 나를 구해주려고 온 사람이라는데, 난 그의 표정에서 선의를 읽을 수 없었다. 그 청년 뒤에는 또 건장한 두 청년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저들은 나를 안전 지대로 안내하겠다고 했다. 거리에서는 젊은 청년들을 만나는 대로 의용군으로 끌고 가던 때였다. 나는 을지로에 있는 텅빈 빌딩의 한 방에 안내되었다. 그는 나에게 안전만이 아니라 화려한 미래까지 약속하는, 알맹이 없는 말들을 남긴 채 어딘가를 다녀온다면서 나가버렸다. 그러나 문마다 젊은 청년들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납치된 것이었다. 저들이 나를 무엇에 이용하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오후에 많은 생각들로 보내고 있는데 공습 경보가 울렸고 곧 이어 여기저기서 폭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이 난리통에 문을 지키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지 숨어버렸다. 이 기회에 나는 줄행랑을 쳐서 집으로 돌아와 다시 지하로 숨었다. 지하란 바로 마루 아래의 넓직한 공간이다. 그 날 밤 총을 가진 두 사람의 인민군과 나를 구해주겠다던 바로 그 사람이 찾아와서 우리 어머니를 협박하며 나를 내놓으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때 '약한 것은 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을 새로 터득한 진리처럼 가슴에 담았다. 그렇게 선량해 보이던 그 여인은 어떤 유혹에 넘어간 것임에 틀림없다. 이일은 나로 하여금 사람을 믿을 수 없게 했고 전쟁 처세술을 배워준 것이다.

나는 숨어 있던 그 터전에서 떠나야만 했다. 까닭은 그 집에 수용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문 밖에 어느 날까지 이 집에서 철수하라는 포고문이 붙고 거기에 서울 인민위원장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몇몇 학생들과 함께 있었는데 눈앞이 깜깜했다. 옮기긴 해야겠는데 숨어 살았기 때문에 동회를 통해서 여러 사람의 이름을 박은 소개령장(疏開令狀)도 받을 수 없었던 터였다. 그러다가, 한 청년의 엉뚱한 제안으로 사기 행각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포고문을 곱게 뜯어 갖고 서울 역전 길목에 앉아 도장을 파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위엄을 보이면서 다짜고짜로 이와 똑같은 도장을 한 시간 내에 만들라고 했다. 도장 만드는 이가 공포 때문이었는지, 사리 판단을 할 겨를이 없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속아 주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교회에 있는 등사기로 소개령장 양식을 만들고 거기에 동행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넣고 이 가짜 도장을 시뻘겋게 찍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또 하나의 비밀지령서를 만든 것이다. 우리는 특수 임무를 지니고 남하하는 사람들이니 모든 인민군들은 협조해 달라는 그런 내용의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써먹을 셈으로 비수처럼 품 속 깊이 간직했다. 우리들은 질 수 있는 만큼의 짐들을 짊어지고 한강을 건넜다. 목표는 친척 여동생이 시집간, 평생 가본 일 없는 충청남도의 어느 시골이었다. 되도록 큰 길을 피해 강행군을 했는데 놀란 것은 자그마한 어귀마다 농민들로 구성된 자위대(?)가 조직되어 검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들이 왜 그렇게도 무섭던지! 그 조직에 들어가지 않은 농민들은 피난 행렬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멀거니 바라만 보았는데, 그 멀건한 눈길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들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순박한 마음으로 떠주었는데 검문하는 이들은 같은 농민이면서도 그들과는 전혀 다른 족속 같아 보았다. 짐을 뒤지고 따지고, 그 눈초리는 독이 오른 뱀눈 같아 보였다. 몽둥이를 하나 들고 완장을 찬 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는데 그 짧은 순간 이들이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을까? 조직이다. 저들은 조직에 의해서 급변한 것이다. 구조적 조작이다. 일단 그 구조 속에 들어가면 변질될 뿐 아니라 꼼작 못하고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옷 가지를 주고 양식을 사먹으며 가는 곳마다 긴긴 검문! 되도록 대로를 피해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 행진하였기에 무려 16일이라는 날을 소모했는데 그 도중에 이런 농부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던지! 그와 더불어 얼마나 많은 거짓말과 배우 노릇을 했던가! 저 순박한 농민들이 모두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원수요 우리는 처음부터 저들 앞에 사기꾼으로 나섰던 것이다. 민족이니, 신뢰니, 양심이니 따위는 모두 똥같이 내버리게 하는 이 전쟁! 누구의 말대로 '사느냐 죽느냐' 그것만이 문제이고 다른 것은 모두 사치품으로 여기게 하는 이 전쟁! 왜 내가 내 민족을 이렇게 무서워해야 하며, 이렇게 증오해야 하며 이렇게 속여야만 하는가! 이 따위 질문도 피난자의 소리지 전쟁 참여자들에게는 너무도 한가한 방관자의 질문이다.

독자여! 나를 용서하라. 나는 잠깐 동안 625의 악몽에서 헤매었다. 그러나 민족 상잔의 전쟁에서 이 민족이 어떻게 갈기갈기 찢어졌는지를 체험을 통해 겪은 그대로 표현해 보았다.

그런데 서울 수복의 소식을 듣고 돌아오는 길은 거의 비슷한 길이었는데 마을 어귀마다 있던 그 검문하던 매서운 눈을 가진 농부들은 단 한 사람도 볼 수 없고 피곤하고 겁에 질린 힘 없는 농부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신기루를 보았는가? 내가 꿈을 꾼 건가? 우리는 오직 서울 시민이라는 그 하나의 이유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에게 대접을 받으니 이것은 무슨 마법이 걸린 세상인가?

오는 길에서 자주, 엮어 놓은 굴비처럼 경찰에 끌려가는 많은 농민들을 보았다. 경찰서에서 고문하는 소리와 비명 소리를 들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그 고문 현장에서 얼마나 진실이 밝혀지랴! 그 후 세상은 또 한 번 뒤집혔으니 그 때 고문하고 지배자로 도도하던 저들이 또 똑같은 봉변을 당했겠지? 그래서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고, 세계 전쟁의 소모품이 된 것은 결국 우리 민족이지!

나는 냉정하기 위해 그때의 통계 자료를 뒤졌다.

[군인 인명 피해]
사망자: 10만 9백명 이상
행방 불명자: 20만명 이상
부상자: 25만명 이상

[일반인 인명 피해]
사망자: 15만
행방 불명자: 20만
부상자: 25만

그러나 이것은 이북에 사는 우리 민족의 피해는 제외된 숫자이다. 이에 더해서 그때 이북으로 납치된 이가 10만이 넘고 고아도 10만을 상회하며, 이로 인한 전재민은 수백 만이라고 하고 300만 이상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이 따위 기록은 사실상 허황된 것이다. 민족 전체가 전재민이었던 것이다. 불과 몇 날 내에 그같이 갑작스런 민족의 대이동이 네 번씩이나 반복된 경우가 역사에 어디 있는가? 자료들은 그때의 재산 피해를 어림잡아 기록하고 있으나 그것도 부질없는 노릇이다. 황폐해진 채 분단된 땅밖에 사실상 남은 것이 무엇인가? 분단된 땅! 순식간에 수십 만의 피를 받아낸 땅! 그들의 공동묘지가 된 땅! 초토화된 땅! 기록은 미망인 유족 등을 열거하기도 하나 한국민 전체가 유족이 되었지! 그리고 한국민 모두 치명상을 입은 이산가족이 되었지! 누가 이 전쟁의 책임자인가? 이것은 도대체 누가 일으킨 비극인가? 그것은 38선을 만든 자들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누구보다도 미국에게 준엄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북군의 탱크가 삽시간에 서울을 휩쓰는 것을 목격했기에 625 전쟁은 남침에 의해서 야기되었다는 주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휴전 협정 3, 4년 후에 625 전쟁은 미국이 일으켰다는 영국의 신념에 찬 주장을 듣고 아연해했다. 그 논리는 정연했다. 미국이 아무런 대치 세력을 대비하지도 않고 어떻게 일거에 모두 철수해 버렸는가? 당시 한국은 사실상 완전히 힘의 공백 상태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으로도 극도로 불안정했으며 국민의 소속 의식도 불투명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군대란 것은 단 한 대의 탱크도 보유하지 못하고 전투기 한 대도 못가진 글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다. 또 미국은 이북의 군사 동태를 몰랐나? 이미 2차 전쟁에 의해 고도로 발달된 정보장치를 갖춘 미국이 이북의 무장화를 몰랐다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힘의 공백화를 자행한 미국이 자신들의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켰다고 선언한 것은 무엇을 노린 것인가? 결국 그 논자의 말처럼 이북을 전쟁에로 유인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북 정권은 이 전쟁에 말려든 셈이 된다.

625 전쟁이 일어난 다음 미군이 주축이 된 이른바 유엔군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우리 한국민을 수없이 죽이고 이 땅을 초토화시킨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 많은 희생을 치르게 하고 정착한 것은 처음에 그었던 38선 그것이었다. 그러려고 그 수선을 떨었는데 무엇 때문에! 2차 대전 때 쓰고 남은 무진장한 무기를 써버릴 장소를 찾아 서? 아니면 패망한 일본을 다시 길러내기 위해서? 아니면 이 땅을 동서 대립의 전초선으로 하고 미군의 장기적 기지로 삼을 구실을 찾기 위해서? 625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전쟁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40년 전에 일어났던 전쟁이 아니라 40년 전에 시작되어서 오늘까지도 지속되는 전쟁이다. 아직도 평화 협정은 고사하고 불가침 조약도 체결하지 못했으며 휴전 협정 아래서, 양쪽을 합해 180만이 넘는 젊은이들이 국민들의 피땀흘린 결과인 세금으로 사들인 정예 무기로, 글자 그대로 일촉즉발의 긴장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이른바 휴전선은 민족 분단선만이 아니라 민족 대결선이 된 것이다. 우리가 어떤 민족과 이렇게 원수되도록 교육받은 적이 있었던가? 우리나라를 강점했던 일본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남북의 지배 세력의 열전은 길이 막히니까 각기 갇혀 있는 상태에서 민족 살생을 계속했다. 반쪽의 상대를 서로 적으로 내세워 독재 체제를 합리화하고 온 국민의 의식을 민족 상잔의 길로 몰아갔고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탄압했다. 전쟁의 양상이 달라진 것뿐이다. 양진영만이 적이 아니라 정권과 민(民)이 적이 되었다. 비판 세력은 대부분, 반국가범으로 몰렸다. 남한에서는 공산당만이 아니라 반정부 세력도 꼭같은 적이었다. 419, 516, 517…… 얼마나 많은 선혈이 뿌려졌으며 무고한 인권이 유린되었던가! 광주의 학살을 통해 그 같은 비극이 치안 차원의 악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625 전쟁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이 그대로 폭로됐다. 적들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저항할 만한 세력을 사전에 제압하는 정략 기지로 광주에 상륙한 것이다. 그것은 적진 상륙이며 적진 소탕전이었다. 그렇지 않고야 군대를 투입하되 공수부대를 투입했을까! 저들은 이 전쟁에 빨갱이 소탕전이라는 명분을 달았다. 아마 단순한 군인들이 그렇게 잔악했던 것도 이러한 세뇌 때문이었으리라. 그렇다, 역대의 독재자들은 국민을 적으로 삼고 총부리를 들이대었다. 625는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이 만행, 이 억울함을 소화할 길이 없어 예민하고 순수한 여러 학생들이 자기 몸을 불사른 것이다.

625는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군사 체제가 지속되고 군인들이 위 아래로 다 장악하고 계엄령과 같은 상태에서 군수사 기관이 시민을 수사 고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정권이 629 민주선언이니 77 선언이니 하고도 '공안 합수부'라는 것으로 국민의 숨통을 조여오지 않나! 625 전쟁은 계속된다. 지금 정부는 보수/혁신이란 흑백 가설을 내세워 민족 안의 적을 소탕하고 있다. 속속 체포해 잡아들인다. 그물을 전국에 치고 지명 수배자를 색출한다. 법의 근거는 국가 보안법이다. 이철규 군의 사인이야 어느 쪽이든 그는 바로 그런 전쟁 와중에서 희생된 것 아닌가!

이 전쟁은 이제 끝나야 한다.

이 40년 전쟁은 언제 끝나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 전쟁은 민족 통일로써만 끝난다. 인위적인 분계선이 제거되고 180만의 우리 젊은이들의 대치 상태가 해소되고 외국군이 제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야 이 나라에 평화가 올 까닭이 없다. 이 분단선을 그대로 두고 보안법 등 국민을 억압하는 악법을 없앤다고 해도 어떤 형태로나 다시 생길 것이다. 군인이 시민을 다스리는 일이 제도적으로 없어진다고 해도 어떤 형태로나 군정은 종식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통일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사고는 전쟁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말과 같으며, 통일 논의를 경계하는 것은 민족 평화의 길을 경계하는 것이며, 통일 논의를 반대하는 자는 민족 상잔을 지지하고 그 상황 밑에서야 비로소 생존하고 얻어먹을 것이 생기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통일에 대한 능력이 있는지, 통일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는 없어져야 한다. 그것은, 전쟁이 무조건적으로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통일 염원과 그것을 위한 노력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통일을 해야 하며 통일을 할 수 있다. 통일을 전략적인 차원에서나 정치적인 차원에서 고려하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통일을 향한 민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문제는 통일을 이룰 힘이 없는 것이 아니고 통일을 향한 의지가 정권에 의해서 저지되고 제거되고 좌절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통일을 이룰 수 있다.

분단은 지배 세력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이 나라의 주인인 민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통일의 길은 일차적으로는, 인위적으로 설정된 분단선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통일이 정부에 의해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정부는 통일을 이룩할 주체일 수 없다. 까닭은 통일은 바로 저들의 기반을 뿌리로부터 흔들어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에서 민은 통일을 해야 살 수 있다. 그것은 지상 명령이며 그러한 힘도 갖추어져 있다. 민이 가는 길을 막지만 말아라. 그러면 통일의 길은 스스로 열린다. 비록 민이 가는 길을 막으려고 해도 결국은 민은 이 저지선을 뚫고 넘어설 것이다.

우리 민은 성장할 대로 성장했다. 어떤 소집단에 의해서 통제 받거나 조정 받을 나이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은 우리 민이 40년간의 전쟁 가운데서 당한 고난을 통해 축적한 저력이다. 우리가 받은 40년의 고난이 의미 없는 것으로 사라져 버릴 수는 없다. 이 고난은 순전히 분단에 의한 고난이다. 40년 간의 전쟁에서 흘린 민의 피가 대지를 적시고 있다. 통일만이 이 억울한 박해와 죽음의 진정한 진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민이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애환의 역사에 밀려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 민이다. 이 억울한 한은 풀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한을 푸는 길은 통일밖에 없다. 성서에는 죄 없이 죽은 아벨의 피가 대지에서 소리친다고 하고, 예수를 환호하는 군중의 입을 틀어막으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사람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도 반드시 그것은 성취되고야 만다는 신념이다. 하늘 나는, 한두 푼에 팔리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 뜻이 없이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데 그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죽음이 헛되게 돌아갈 수는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신념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구체화되었다. 에베소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나 전에 멀리 있던 여러분이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는 유다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서로 원수된 것을 자기 몸으로 해소시킨 분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기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화평을 이루시고 서로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없게 하시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엡 2:13-16).

이 본문에는 전과 지금이 구분되어 있다. 전에는 서로 멀리 있던 사이, 담으로 막혀 있던 사이, 원수된 사이인데 대해 지금은 가까워지고 담이 헐리고 둘이 하나 되고 둘은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의 평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무엇이 이런 대전환을 가져왔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라고 한다.

우리는 이 역사상에서 고난의 절정을 상징하는 이 '피', 이 '십자가'가 분단, 모순, 원수 관계를 해소하는 절대적인 위력을 가졌다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엄숙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라고 하는 한정사를 오해하여 일회적인 사건으로 국한하고 과거의 것으로 돌려버리는 과오에 그대로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이 '피', 이 '십자가' 사건이 2천년 전에 흘리고 일어난 바로 그것에 한정된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 그리스도의 고난은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고난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만 그것은 살아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파악된다. 외세에 의해서 일어난 40년 전쟁에서 피살된 이 민족의 피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와 무관할 까닭이 없다. 팔레스틴 구석에서 일어난 한 청년의 수난의 역사가 세계사의 지평에서 원수된 자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헐었듯이 한국이라는 세계의 한 구석에서 당한 이 수난이, 그 성격 자체가 이미 세계사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세계사의 모순이 폭발하는 전초선에 서서 당한 이 수난이 이 민족의 통일을 가져오는 추진력이 될 뿐 아니라 세계 평화에의 길을 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살림』 1989. 6)


| 평론 |
한국 민족 운동과 통일
(한국신학연구소)
List of Articles
표지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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