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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 |
한국 민족 운동과 통일
(한국신학연구소)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마태복음 10:34-39
들어가는 말

신약은 구약과 맥(脈)을 같이하고 있다. 그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내용에 관해서는 이렇게 저렇게 말할 수 있다. 성서적인 용어를 빌어 가장 핵심적으로 표현하자면 그 내용은 '샬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샬롬'의 희랍어 번역으로 보이는 단어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신약성서에서 91회나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담지하고, 지향했던 내용이 '샬롬'이라고 말해도 틀리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정반대로 들리는 듯한 예수의 말씀을 알고 있다. "내가 평화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검(劍)을 가지고 왔다"(10:34)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서도 전하는 말로서 Q자료에 속한다. 성서의 기조(基調)인 '평화'와 관련하여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하여 예수의 본뜻에 접근해 보려고 한다.

마태복음 10장 34-39절은 한 문단으로 묶여 있는데, 그 내용은 본래 셋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그 구분은 다음과 같다.

  마태 루가 마가
1)
2)
3)
10:34-36
10:37-38
10:39
12:51-53
14:26-27
17:33

8:35
8:34

잘 살펴보면 이상과 같은 마태복음의 이 문단이 셋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에는 병행하는 그 부분이 전혀 다른 컨텍스트 안에 들어 있고, 누가복음에도 세 부분이 모두 들어 있는 각기 다른 컨텍스트와 연결되어 있다.

이렇듯 본래 다른 컨텍스트를 가지고 있는 말들을 1)에 연결시킨 마태의 편집 동기를 묻게 되면 우리의 관심의 초점인 34절을 마태가 어떻게 해석했는지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내용을 예수 사건 전체에 조명하고, 끝으로 그 결과를 오늘 우리의 컨텍스트에 조명해 보기로 한다.

마태 10장 34절의 뜻을 편집 의도라는 측면에서 읽어 본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예수가 세상에 온 것은 평화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칼을 주려고 온 것이다. 칼을 준다는 것은 가장 가까운 관계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누가는 '칼'이라는 말 대신에 '분열'이라고 고쳐 사용했다고 본다. 그런데 그 분열이 예수 사건의 결과로서 피동적으로만 일어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니,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관계를 단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려는 자는 각각 자기의 생명마저 희생할 각오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요약하면 이 칼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를 포함한 기존의 모든 것을 단절하기 위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반제(反題)로 쓰여진 이 말, 즉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말에서 '평화'와 '칼'은 상반된 내용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이와 같은 반제용법(反題用法)을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5:16)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완성한다'는 말과 '폐한다'는 말이 상반된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율법 파괴와 완성은 한 사건의 양면을 뜻한다. 그러나 이 결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와 유사한 구약의 예언자들의 경우를 고찰해 보자.

구약의 거짓 평화론자에 대한 비판

구약에서 우리는 이른바 불구원(不救援, Unheilsprophet)의 예언자들을 볼 수 있다. 그 반열에 속하는 두 사람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들은 에스겔과 예레미야이다. 예레미야가 활동한 때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앗시리아 제국에 예속되어 자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던 때였는데, 이스라엘은 신제국 바벨론이 등장하는 덕에 힘의 균형을 이용하여 앗시리아의 손에서 서서히 벗어나 자주적으로 왕을 세우게 되는 이른바 궁중 혁명을 일으켜 큰 업적을 쌓았다. 그렇게 선정된 왕의 한 사람이 '요시아 왕'이다. 요시아 왕은 저 유명한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켜 큰 업적을 쌓았다. 그와 동시대에 등장한 예레미야는 요시아 왕의 종교 개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요시아는 앗시리아의 동맹 세력인 이집트의 손에 의해서 요절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민족 중홍의 꿈이 깨진 것이다. 그 때의 예레미야의 슬픔은 대단했다(렘 20:10 이하). 그 뒤를 이은 것이 '여호야김'이다(주전 609-598년). 그는 물론 이집트의 지원으로 왕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요시아 왕에 반해서 전형적인 타락 한 폭군이었으며 불의를 자행하고 죄 없는 사람들의 인권을 사정없이 유린했었다. 그의 학정은 예레미야의 신랄한 고발을 통해 잘 드러난다(22:12-17). 그러면서도 여호야김은 계속 태평 성대가 왔다고 하면서 평화를 반복하여 선전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제 다가올 큰 재난을 보고 있었다. 그는 북방으로부터 끓는 가마의 물이 이스라엘을 향해 쏟아 지는 환상을 통해 그 재난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평화, 평화를 말하면서도 뒤로는 국민의 인권을 사정없이 유린하고 그것을 통해 특권을 누리는 부자, 예언자, 사제들이 판을 치는 현실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남을 뜯어 먹고 사기치는 일을 다반사로하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분노는 특히 6장에 잘 나타나 있다.

예레미야는 이 '거짓 평화'에 대한 예언을 거부하면서 예루살렘을 중심한 이스라엘에게 내릴 저주, 나아가서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선언하는데, 그 심판의 내용으로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다음의 구절이다. "아비와 어미, 할미와 할아비, 모조리 붙잡아 가리라. 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밭과 아내들도 함께 넘어가리라"(6:11). 즉 가장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가족들을 열거하고 있으며 그 가족들과의 이별(분리)이 가장 큰 비극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레미야서는 거짓 평화를 예언하는 것에 대하여 '칼'에 의한 재난을 예고하는데, 그 재난의 특징을 가족의 분리에 두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거짓 평화의 선전을 고발하고 심판을 예고했던 대로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의 지배층 대다수는 포로로 잡혀갔다.

그 중에 사제계급인 예언자 '에스겔'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포로 생활에서 예레미야의 정신을 계승하여 예레미야가 이제 올 재난을 예고한 데 대하여 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그런 재난을 당했는지 그 이유를 해명한다. 그 중에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참 평화(平和)를 계속 선전하는 거짓, 예언자에 대한 분노와 공격이다(13:12, 16). 이에 대해서 에스겔은 예레미야처럼 심판받을 죄상을 폭로 하는데 우리의 본문과 관련해 주목할 것은 21장에 계속되는 이른바 '하나님의 칼'에 대한 선언이다. 하나님이 죄 많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날카로운 칼을 '사람'에게 쥐어주리라는 것이다.

이상의 34절의 말은 이른바 불구원(不救援)의 예언자들의 말들에서 그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으므로 그것은 결코 이례적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 예언자들은 궁극적인 평화를 거부한 사람들인가! 아니다. 저들은 그 누구보다 더 진정한 평화를 희구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려면 그에 앞서서 칼, 정의(正義)를 위한 심판이 앞서야만한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민족의 반역자'라는 누명을 쓰면서까지 평화, 평화하는 마당에 칼, 심판, 정의를 부르짖고 있다. 그러면 초대교회의 상황은 어떠했나?

초대 그리스도교회의 상황

먼저 이 말이 형성될 때의 시대적 정황을 살펴보자. 예수 시대나 초대교회의 시대에서 한 가지 공통되는 조건은 로마제국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마당에서 어떤 계층이 평화를 주장했음에 틀림없으며,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평화를 설명하는 집단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이 같은 반제 형식(反題形式), 즉 평화를 주려고 온 줄 알지 말라고 했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 이 말이 예수 시대를 소급한 것이라면 어느 집단이 평화를 설교했을까? 그것은 틀림없이 예루살렘의 지배 세력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사두개파를 위시한 사제계층은 로마에 의해서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로마와의 충돌이 아니라 타협으로 그들의 위치를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헬레니즘에 도취된 사람들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의 기치 아래 그리스도교도 평화의 종교임을 내세워 일면 로마에 동조하면서 그리스도교 선교를 시도했다. 이에 반해서 젤롯당은 로마와의 어떤 타협이나 평화도 거부했다. 저들은 칼로 로마와 싸워 하나님의 주권을 이스라엘에 수립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았다. 이에 대해서 에세네 파나 바리새파도 한두 사람의 예외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칼을 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예수의 시대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극히 불안한 때이며, 로마의 괴뢰인 헤롯가의 이중정책에 의해 종교계마저 크게 혼탁한 상태에 있었다. 이런 때에 평화를 설교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그것은 로마나 불의한 세력과 타협하라는 어용적인 설교가 되거나 아니면 평화를 피안적인 것으로 풀이하면서 염세적으로 난국을 살아가기 위한 위로의 말 이상이 될 수 없다. 예수가 이러한 평화의 설교자일 수 있는가? 그의 급진주의는 이러한 상상을 완전히 배제한다. 예수에게는 오히려 칼, 누가의 말을 빌리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이 타당하다. 따라서 예수에게 있어서 이 말의 원 뜻은 예루살렘권(圈)이 아니라 젤롯당과 맥(脈)이 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비해서 이 말을 마태의 현장에서 해석한다면 어떻게 될까?

70년에 예루살렘 함락과 더불어 사실상 반(反)로마운동이 끝났을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의 주권도 완전히 잃어버렸을 때이다. 반로마 투쟁을 주도했던 젤롯당은 사실상 참패했다. 로마제국의 승인 밑에 바리새파가 주도하는 유대교만이 있었을 뿐이다. 에세네파마저도 대 로마 투쟁 마지막 즈음에 이에 가담했다가 근절되었던 것이다. 유대교는 로마제국의 승인 밑에 얌니아 학파를 만들어 유대교 건설에 전념하고 있어서 로마와의 타협이 불가피했다. 이렇게 보면 로마에 대해서 칼을 들 것을 주장할 만한 집단은 전혀 없다. 이 때에 만일 그리스도교가 이 말을 전승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했다면 그것은 대 로마 투쟁을 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럴 가능성이 있었는가? 묵시록을 생산한 강렬한 묵시문학 그룹 운동은 여전히 지하에서 그런 운동을 계속했을 수 있다. 묵시록의 내용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전투적이었나 알 수 있다. 그러나 마가에서 볼 수 있는 임박한 종말관과 그것에 근거한 급진주의는 마태나 누가에서 현저하게 후퇴하고 있다. 바울이 주도하는 이방교회는 선교를 지상의 목표로 하므로 로마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로마제국 아래서 선교의 장을 구한 초대교회의 주류에서 묵시문학을 수용할 만한 가능성은 없다. 그러면 이 말의 뜻은 정치적 폭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칼을 주려고 왔다는 뜻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누가복음에는 이에 상응하는 말이 이중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하나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12:49)와 또 하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12:51)이다. '칼' 또는 '불'이라는 말이 묵시록 6장 4절에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불 같은 것이 나왔는데 그 위에 탄 자에게는 사람들이 서로 죽이도록 땅 위에서 평화를 걷어들이는 권한이 허락되었고, 또 큰 검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불' 또는 '칼'이 바로 땅 위의 평화를 파괴하는 상징으로 나란히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묵시문학적인 구속사관을 드러내는 것이다. '궁극적인 나라', '메시아 왕국' 또는 '샬롬'이 도래하려면 그 이전에 큰 심판이 반드시 앞서야 하는데, 그것은 재난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묵시문학에는 그 재난의 현실을 초자연적인 이변으로 묘사하는데 그런 재난의 결과로서 오는 비극으로서 '가정 내의 분열'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서술된다. 반드시 묵시문학만이 아니라 예언자들도 인간에게 오는가장 큰 비극을 가정의 분열에 두고 있다. 가부장제도 아래서 볼 때,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적 단위로서의 '가정'은 그렇게 중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정이 분열, 파괴된다'는 것은 '세상이 끝장났다'는 절실한 표현일 수 있었다. 마가는 다가올 재난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고,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집안 사람이더라"(7:6). 이것은 마태의 것 그대로이다. 그러면 예수가 '칼을 주려고 왔다'는 말은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뜻이 된다. 예수가 '칼을 주려고 왔다'는 것은 그가 직접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 얘기 중에 묵시문학적인 이변을 연상케 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신학적인 표상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누가의 표현대로 예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이 말은 현실적으로 심판을 가르는 사건을 말한다. 양과 염소를 가르듯, 곡식과 가라지를 가르듯, 선한 것과 악한 것, 의와 불의를 철저히 가르는 사건인 것이다. 예수는 분명히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하지 않았으나 '마지막 때의 하나님 말씀의 담지자'라는 신념에 차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결단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실을 위해서 또는 정의를 위해서 결단해야 할 때 무엇이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가? 가부장제도 하의 예수 당시에 있어서는 혈연 관계가 그 대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가정, 가족을 단 위로 한 소유, 이것이 진실을 위하고 정의를 위한 결단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예수의 이야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가 나를 따르라고 할 때, 거의 예외 없이 가족관계를 들고 있으며, 그를 따르기를 앞서 가족에게 인사를 한다거나 죽은 부모를 장례하려는 것도 사정없이 거부했다. 그의 비유에 있어서도 가족 관계가 그러한 역할을 한다. 결혼 잔치의 초대의 비유에서 먼저 초대받은 자들이 내세우는 핑계인 나는 결혼했다, 나는 소를 샀다, 나는 밭을 샀다 등은 모두 가족 제도에 연관된 것들이다. 바울은 이 종말 의식에서 자기처럼 결혼하지 말기를 권했는데, 그 까닭은 바로 그것이 결단하는 데 큰 장애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가 가정을 안 가진 사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탈가 족, 무소유를 요구한 것은 모두 이런 종말적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막 3:31-35).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反)가족주의 자체가 아니라 옳은 결단을 위한 것이다. 옳은 결단은 '참'을 '참'으로 수호하는 일이다. 정의를 철저히 수호하려고 하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 사이에도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상과 같이 이해하는 경우, '평화'와 '칼'은 결코 상반된 것이 아니다. 예언자들이나 묵시문학에 있어서도 재난, 즉 심판이 있은 다음에야 평화의 왕국이 올 것이라고 보았던 것처럼 칼이 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주저없이 '칼'이(을) 바로 '정의'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의를 뺀 평화는 있을 수 없거니와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가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이른바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란 말로도 이해할 수가 있다.

마태에 있어서의 평화

그런데 마태는 37절 이하를 이에 결부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37-38절은 누가에는 그(예수)를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주는 말이다. 28절에 해당하는 마가의 말(8:34)도 마찬가지인데, 거기에는 예수의 수난의 때라는 것이 크게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컨텍스트 속에 있는 내용을 칼을 주러 왔다는 말에 결부시킴으로 '나(我)'가 크게 부각되어 중심에 서게 되었다. 검을 주려고 왔다는 사실, 구체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에 분열을 오게 한다는 사실이 후퇴되고, 그것을 말하는 '나'가 중심에 서게 됨으로써 그리스도론으로 둔갑하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 신뢰, 절대 복종이 지상의 과제가 된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는 38절의 말은 이미 언급한 대로 젤롯당의 구호와 같은 것으로 강력한 투지를 나타내는 말인데, 그리스도 고백적인 컨텍스트 속에 예속시킴으로써 칼이라는 말과 더불어 '내 십자가를 지고'라는 현실을 묵과해 버릴 수 있도록 해 버렸다. 마침내 지혜문학적인 표현의 39절을 포함시킴으로써 각기 그 현장에 살아있는 말들이 그리스도 고백적인 종교 언어로 후퇴하여 애매하게 되었다. 그것은 로마제국 아래 완전히 몰락된 상황에서 존재하려는 마태 공동체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맺는 말

이상에서 이 말의 본래의 뜻이 상황에 따라 변하거나 모호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이 시간 홀로 할 수 있는 과제라고 보지 않지만 한 두 가지 제안과 입장을 밝히려고 한다.

우리에게는 평화보다 칼이 중요하다. 칼과 더불어 잘못된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잘못된 질서의 파괴 없이 평화를 말하면 그것은 거짓 평화밖에 되지 않는다. 예수가 바리새파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는데, 이미 예언자 미가도 거짓 예언자들의 역할을 '회칠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이것은 진실을 은폐하는 행위를 말한다. 오늘의 불공평한 기득권을 인정한 위에 이루어지는 평화는 평화일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제1세계인들과 더불어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참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려면 그 전에 투쟁을 통해서 모든 불의한 기득권의 질서가 붕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분열, 시비를 가리는 심판이 앞서야 한다. 그것은 바로 평화의 실현에 앞서야하는 것이 정의 실현이라는 말이다.

예수가 세상에 검을 주려고 왔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고백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예수가 주는 검을 들고 오늘의 불의와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결단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가 가져다 준 가치 기준이다. '보다 더'라는 욕심 위에 세워진 사회 질서는 과거 가부장 시대의 혈연 관계보다 더 무서운 장애가 된다. 그런 현실에서 해방되는 칼이 필요하다.

37절 이하에 반복되는 '나'를 정의의 칼로서 해석하여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보다 더 중요시되는 어떤 것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정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거부되어야 한다. 또 38절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정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합당치 않다'로 읽어야 한다. 그럴 때, "네 십자가를 지고"는 그리스도 고백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각기 선 자리에서 정의(正義)를 구현하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라는 말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끝으로, 그러면 오늘에 있어서 정의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 대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역사의 예수에게 돌아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예수는 하나님 나라(schalom의 나라)와 민중(가난한 자)을 직결시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죄와 의는 민중의 시각에서 결정된다. 민중이 해방되는 것이 바로 정의 실현이며 거기에 '샬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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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족 운동과 통일
(한국신학연구소)
List of Articles
표지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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