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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 |
한국 민족 운동과 통일
(한국신학연구소)
분단 극복과 평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중심으로(요 4:21-23)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유명한 이야기는 예술가들이 낭만적인 주제로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핵심이 39절의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라는 말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것을 목적했다고 보기에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너무 길고 자세하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그것보다는 더 중요한 그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편집되었을 것이다. 이런 가정을 전제로 대화의 과정과 내용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사마리아와 유다

여기서 가장 먼저 밝혀야 할 것은 이 대화의 무대인 사마리아의 성격이다. 구약에는 오므리 왕이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았다는 첫 기록이 있다(왕상 16:24). 그러면 사마리아가 수도로 된 것은 기원전 800년 후반으로까지 소급된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이 남북 왕조로 갈라졌을 때에도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에스겔은 사마리아를 북 이스라엘의 대명사로 사용한다(겔 16:46). 그런데 사마리아는 외세의 침략으로 계속하여 수난을 당해왔다. 그러다가 아시리아가 침략하여 이스라엘 전역을 점령했을 당시 사마리아 지역사람들은 두 차례 이상 끈질기게 항거하다가 끝내 항복하였고, 이로써 북 이스라엘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주전 721년). 그런데 아시리아는 자신들에게 끈질기게 항거하였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보복하고자 그 지역 지도층을 모두 납치해 갔을 뿐만 아니라 바빌론, 북 시리아 등지에서 이방인들을 이주시켜 그 전통을 끊으려고 했다.

아시리아를 이어 강대국으로 등장한 페르시아는 사마리아를 재건하여 지방 수도로 삼고 주전 6-4세기 동안 사마리아 전 지역을 지배했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의 알렉산더가 침공하여 많은 사마리아인을 세겜으로 추방하고(주전 322년), 또다시 시리아와 마케도니아인들을 이주시켜 헬레니즘을 가지고 다스렸다. 그 후 유다계의 하스몬가 히르카누스(Hirkanus)가 사마리아를 침공, 파괴하면서(주전 107년) 사마리아인들에게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 뒤 로마가 다시 침공하여 이 도시를 재건하였다.

그 뒤를 이어 헤롯 1세가 사마리아에 새 성을 쌓고 로마의 황제를 위한 신전까지 짓고는 그 이름을 바꾸어 버렸다. 이렇게 이유 없는 고난을 당했으면서도, 피가 더러워졌으며 종교도 혼합되었다는 명목으로 동족에게서도 계속 천대를 받아왔다. 열왕기하 17장 24-41절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혼합주의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정죄이다. 물론 이는 남 유다의 입장에서 서술된 탓이거도 하지만, 사마리아 지배자들의 정책과 그 안에 살았던 이스라엘 민(民)의 삶은 구별해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그 같은 불우한 상황에서도 성전을 짓고 모세오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했으며, 바빌론 포로들이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할 때 거기에도 적극 참여하여 많은 피를 흘린 사실 등으로 보아 저들은 자기 정체를 지켜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마리아와 유다가 철저한 적대 관계에 서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 중요한 동기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남 유다의 상류층 사람들이 페르시아의 후원으로 귀국하여 성전을 재건하려할 때 사마리아인들이 거기에 동참하려고 하자 이를 거부한 데서 비롯된다. 남 유다인들이 거부한 이유는 사마리아인들의 피가 이방인들의 피와 섞여 더러워졌으며 야훼 종교마저 오염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하나는 사마리아가 본래 북 이스라엘의 본거지라는 점이다. 즉 남북 왕조의 분열이 빚어낸 적대 관계의 노출이라는 시각에서 이 문제를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이 갈등의 배후에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성전 재건의 주역들과 사마리아에 남아 있던 사람들 사이의 사회 계급적 차이가 작용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후로 계속하여 이 양자 사이는 단절되었으며 급기야 사마리아계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알렉산더가 침공해올 무렵에는 그리심 산에 따로 성전을 세우게까지 되더니 주전 107년 히르카누스의 침공 때에는 그 갈등과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남북의 관계가 얼마나 악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로마와 헤롯 시대에, 같은 통치 구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지역에 대한 정책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 같은 분단 관계가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누가복음에는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려 하자 이를 환영하지 않았으며, 이에 격분한 예수의 제자들이 하늘의 저주를 내릴 것을 간청한 기사가 실려 있으며(9:15 이하), 사마리아를 예수의 선교 영역에서 제외하라는 보도도 기록되어 있다(마 10:5).

한 민족의 분단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는 우리가 현실로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오랜 단일 민족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한국은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사마리아의 분단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분단 상태를 그대로 두고 평화란 절대로 올 수 없다. 특히 그 분단이 불의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면 그 불의의 결과를 정리할 때에만 참 평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그런데 지배층은 그들의 집권을 위해 분단을 기정 사실로 전제하거나 영구 분단을 꾀하기까지한다. 한국의 정권들도 한국민의 열망 앞에서 통일을 운위하고 있으나, 우리 분단의 책임을 지고 있는 미국의 정책도 남북 분단의 고착화를 지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미국이 남한의 정권을 완전 장악하고 나면 한국의 양블록을 전선으로 삼고 이 한국 땅을 대 소련 원자 무기의 기지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분단을 뒷받침하는 것이 반공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은 유다계 지배층이 반 사마리아주의를 극대화한 것과 본질상 다르지 않다. 게다가 미국은 힘의 균형으로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이론 위에 한국을 전쟁 무기 시장으로 삼고 있다. 한국은 원자 무기의 기지화가 되었을 뿐 아니라, 1970년 이래로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원자력 수입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란 있을 수 없다. 힘의 논리에 의한 평화는 불화를 감추는 위장 이외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단 상태의 해결 없는 일체의 평화를 배격한다. 그것은 반평화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반도 분단의 원인이나 분단의 현실, 그리고 분단이 빚어내는 결과 모두가 불의한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통일 없는 평화를 생각할 수조차 없다.

예수 운동

예수가 활동했던 중심지는 갈릴리였다. 그런데 당시 일반 운동의 시각에서 볼 때에 갈릴리를 활동의 중심지로 삼은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다. 특히 운동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당시의 중심지인 유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그 효과를 전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올바른 길이었다. 이러한 견해가 예수의 형제가 한 주장으로 전해진다(요 7:3-4). 예루살렘은 권력의 중심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했다면 강한 편에서 약한 편을 흡수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혁명이었다면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갈릴리에서, 그것도 민중과 더불어 그의 운동을 전개한 것은 그가 아래로부터 위를 향한 운동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당시에는 갈릴리, 사마리아, 그리고 예루살렘을 중심한 유다 지방 모두가 뚜렷이 나뉘어 있었고, 또한 극단적인 상호 증오의 관계에 있었다. 어쩌면 역대의 외세들이 '분할과 통치(divide and rule)'의 방법으로 그 분열 상태를 견지조장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민(民)은 이러한 조작된 분단 상황을 뚫기 위해 연합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갈릴리인과 사마리아인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먼저 연대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관계이다. 이 두 지역은 모두 유다 지배층에 의해 멸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렇게까지 적대 관계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의 공동의 적은 유다였다.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의 전승은 간접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누가복음 9장 51절 이하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로 사마리아를 정해놓고 미리 가서 예수를 영접할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이 간단한 말에서 예수의 일행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 단순한 일이 아니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먼저 선발대가 가서 환영 준비를 할 까닭이 없다. 우리는 예수의 행로를, 제자들이 앞서 가 미리 준비했다는 기록을 이 본문 이외에 어디서도 볼 수 없다. 이는 예수의 일행이 사마리아를 지나는 것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가 그곳으로 오는 일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고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이었기 때문에 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53절). 이는 사마리아인들이 갈릴리인들과의 관계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갈릴리의 대 유다 관계를 문제삼았던 것이라는 뜻이다. 이에 반해서 예수의 일행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해가는 과정에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거쳐가겠다는 뜻을 분명히하고 있다. 즉 예수 일행의 계획이 이 노정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예수는 갈릴리에서 민중을 규합하고, 그리고 사마리아와 연대하면서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그 지배층을 제거함으로써 마침내 분단의 담을 헐고 통일된 평화에로 접근하려 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뜻을 모르고 자신들을 거부한 데 대해 분개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오히려 책망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마태복음에는 전혀 다른 방향을 지시하는 듯한 명령처럼 보이는 보도가 있다.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이방사람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10:5)고 한 명령이 그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같은 내용의 보도 중 마가나 누가에는 제자 파견에 이러한 조건이 첨부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마태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고 단정하곤한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의 참 말이라고 단정하는 사람 역시 많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의 출처가 어디든 간에 이 말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배척하는 말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방인들의 길"이라는 말과 대비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polis)"라는 말을 사용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로 가지 말라는 말과 사마리아 도시로 가지 말라는 말은 전혀 다른 뜻이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도시는 외세가 헬레니즘을 확산시키려는 중심지로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헤롯은 로마의 황제의 이름을 따서 세바스터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를 위한 신전까지 지어놓았기 때문이다. 즉 사마리아의 도시를 헬레니즘 문화의 본산으로 삼았기 때문에 반도시적인 예수가 사마리아의 도시로 가지 말라고 명령한 것은 당연하며, 이것을 반사마리아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와 함께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내용아 있다. 그것은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는 분명히 사마리아 사람들을 재평가하려는 노력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사마리아 사람을, 예루살렘의 상징이며 그 성전의 상징인 레위 사람 및 제사장과 대조시킴으로써 사마리아 사람을 높인 것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관복음서에는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관계가 진전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면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의 이야기를 주목해보자.

예수와 사마리아 사람

요한복음에서는 누가복음의 경우와는 반대로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도중에 사마리아를 들른 것으로 되어있다. 또한 꼭 사마리아를 거쳐야 할 시급한 조건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저 사마리아를 들러야만 했다고 말한다. 우리 번역에 사마리아로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번역한 희랍어(δεἲ)는 꼭 그래야만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어쨌든 예수는 사마리아의 한 동네에 이르렀다. 그 곳은 바로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과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이라고 기록된다. 여기는 세겜 가까이 있는 곳으로 야곱, 요셉 등 이스라엘의 근원이 바로 사마리아에서 시작되었음을 부각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그것은 유다와 상반되는 이스라엘의 본 고향이다. 적어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으며 이는 이야기 속의 여인이 야곱의 우물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예수는 피로한 나그네의 모습으로 우물가에 앉았다. 이때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나타난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건넴으로 대화의 문을 연다. 피곤에 지쳐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예수상은 결코 메시아상이 아니다. 예수의 이런 모습에서 출신상의 우월성을 내세우거나 신분상의 특수성을 나타내려는 의도를 볼 수는 없다. 사실 그 여인에게는 그저 단순한 한 남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여인은 "당신은 유다 사람이면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대응한다. 그 여인이 왜 예수를 유다인으로 보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가 예루살렘에서 내려 오는 길이라는 말로 이유를 대신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말에 반영되어 있는 분단의 관계이다. 즉 여인은 목마른 나그네에게 그가 유다인이기 때문에 물 한 모금도 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이 대화에는 남자와 여자라는 성(性)의 장벽도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이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 대화에는 성의 문제도 계속 비쳐지고 있으나 주요한 주제는 지역적 분열이다.

또 한 가지, 이 여인은 그 누구도 야곱보다 클 수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유다인을 야곱과 대립시키고 있다(12절). 또 예루살렘의 성전과 그리심 산의 성전을 대립시키고 있다(20절). 이것은 또 하나의 장벽, 어쩌면 가장 결정적인 장벽이다. 그것은 종교에 의한 장벽이며, 이러한 종교는 분단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평화에의 길

이 현실에 대해 예수가 어떻게 대처하는가 주목해보자. 예수는 어디까지나 그 여인을 같은 수준의 인간으로 대한다. 그는 인간이 생존함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문제에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은 인간 생존의 기본적인 권리요, 또 그런 사람에게 물을 주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다. 이러한 교류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용인될 수 없다. 아무리 사마리아인의 대 유다 감정이 정당한 근거를 갖는다 해도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는 일을 거부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단순히 물을 한 모금 달라는데 그 요청에 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부되어야 한다.

이러한 여인을 향하여 예수는 반대로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줄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입장을 역전시키고 있다.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사마리아 여인과 유다인 남자라는 담에 구애되지 않고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참 평화의 현실인 것이다. 이 현실을 내 것으로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야곱의 우물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선물"을 아는 것이요, 또 하나는 물을 달라는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것을 몰랐다. 그러므로 여인은 여전히 같은 지평에 그대로 서서 상대방은 두레박을 갖지 않았다는 것, 이 우물은 깊다는 것, 이 우물은 야곱이 준 특별한 우물이라는 것, 그리고 야곱보다 더 위대한 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 등을 내세워 자기 입장을 고수한다. 그 여인은 아직도 내 것, 네 것이라는 지평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야곱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은 그녀의 눈을 그렇게 어둡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자부심은 상대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야곱이 준 우물의 물을 마셔도 곧 목마를 것이라고 말한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람들 사이를 분열시킨다. 그리하여 예수는 궁극적인 것,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내세워 야곱의 우물을 상대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마음을 고갈시킨 것은 바로 분단이요 인간 관계를 차단하는 감정이었다. 그 여인이라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모금 주지 못할 만큼 악할 까닭이 없다. 단지 유다인과는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는 관념이 그에게 인간됨의 자유를 박탈했던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원히 솟아나리라!" 무엇이 우리 속에 있어 영원히 샘솟게 하는가? 그 영원한 샘솟음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쪽에서는 그것은 어떤 현실을 가리키는가?

이 여인은 그런 물을 달라고 한다. 즉 한 번 마시면 목마르지 않아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아도 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 여인은 여전히 우물의 물과 같은 물을 생각하고 있다. 그 여인은 '속에서 솟는 물'을 모르고 있다. 이에 예수는 갑자기 화제를 바꾼다. 그러나 갑자기 바뀐 화제는 속에서 솟는 샘물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한다. 그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는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네가 같이 살고 있는 이도 네 남편이 아니니 바른 대로 말했다"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만약 이것이 그 여인의 삶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 여인을 불륜한 여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으로 대화가 끝났을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이 여인이 사마리아 지방을 상징한다고 전제하고서 요세푸스가 밝힌 대로 다섯 신, 즉 사마리아를 점유하고 있는 다섯 부족의 신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면 "지금 네가 같이 살고 있는 이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이어서 말한 대목이 풀리지 않는다. 어느 쪽 이든 간에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여인의 인간 관계가 파탄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는 그와의 대화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는가? 그 여인의 불륜을 책망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사마리아를 유다와 비교하여 도덕적으로 저급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려고 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대화가 거기서 끊어져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 부분을 앞의 해석과 관련시켜 본다면 네 속에서 영원히 솟는 샘을 찾으려면 인간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한다는 뜻의 말이 될 것이다. 즉 물을 달라는 사람에 대해 그렇게 냉담한 것은 네 마음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바른 인간 관계를 갖게 되면 네 속에서 생수가 솟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여기서부터 그 여인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절대적 관념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여인의 관념은 종교의 이름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리심 산의 성전이 참 성전이고 예루살렘 성전은 본래 것이 아니라는 그런 관념이다. 바로 그 관념이 흔들린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 여인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 가운데 어느 산에 있는 성전이 참 예배의 장소냐고 질문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충격적인 대답을 한다. "내 말을 믿으라. 이 산 위에서도 아니요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올 것이다.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21-23, 22절은 전체 문맥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21절과 23절 사이를 끊는다. 아마도 이것은 유다 그리스도교에 의해 삽입된 구절일 것이다). 바로 이 말이 이 대화의 절정이며 사실상의 끝이 된다. 사마리아와 유다의 관계가 악화되어 분열 상태로 굳어진 것은 종교적인 형태를 띤 측면이 있다. 둘의 적대 관계는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심 성전의 대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성전은 평화의 상징이 아니라 분단과 분열의 상징인 것이다. 상징일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적으로 분단의 고착화를 합리화시켜 주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상호가 증오하고 싸워도 좋다는 종교적 구실을 제공한 것이다.

사마리아와 유다의 분단, 그 적대관계가 해소되어 하나의 평화로운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 두 성전을 헐어 버리는 일이다. 그 둘은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성전은 거부되어야 한다. 그것들이 평화 공존의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성전은 아름다운 이름으로 치장된 불의의 아성이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 왕조에 의해 세워졌는데 신에 대한 경외심보다는 다윗 왕조의 이데올로기 형성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즉 야훼를 다윗 왕조의 수호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솔로몬이 그 성전을 세울 때 그 성격이나 규모로 보아 왕실 채플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솔로몬은 이 성전을 세워 백성들의 종교심을 일면 이용하고 일면 무마하면서 자신의 불륜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보호막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유다계와 이스라엘계를 갈라놓는 분파 정치를 펴서 영구 분단의 발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계 사제를 완전히 제거하고 유다계로 대치함으로써 영구 분단의 계기를 만들었다.

사마리아의 성전도 질투와 경쟁심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성전을 세울 때 저들은 불의한 이방의 지원을 받았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참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성전들을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통일로 나아가는 길에 첫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참 평화는 네 것 내 것으로 인하여 싸우는 일이 끝나는 때 이루어진다. 그것이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것이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네 것 내 것이라는 주장과 권리 의식이 폐기되는 것이다. 영도 진리도 어느 것도 개인 또는 집단에서 사유화할 수 없다. 모든 이를 위해 있는 것, 그리고 모든 이의 것이 바로 영과 진리이다.

예수는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라고 선언한다. '온다'는 미래적이고 '그 때이다'는 현재적이다. 그런데 '올 때', '이미 온 때'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12장 23절, 13장 32절, 17장 1절 등에 나타나는데 한결같은 공통점은 그 때를 예수의 수난의 때로 지칭한다는 점이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하고서 뒤이어 밀알 한 알이 땅에서 썩어야 한다는 얘기가 연속되며(12:23 이하) 또한 "아버지께 갈 때"라는 말로 수난을 말한 것(13:1)처럼 다른 표현들도 모두 예수의 수난의 때를 말하고 있다.

요한은 "올 것이다", "이미 그 때이다"라는 미래형과 현재형의 용법을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그 사건은 아직 종국적으로 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미래적인 것만은 아니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16:32)임을 시사한다. 즉 "그 때가 올 것이다."라는 말로써 십자가 수난의 때를 말하지만 그 수난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는 십자가의 수난과 더불어 올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난이 진행되고 있듯이 그때도 현재적인 것이다.

이로써 요한은 궁극적인 예배의 때, 즉 참 평화의 때는 모든 불의가 바로 불의한 사건에 의해 제거되는 그 때, 곧 십자가의 때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바로 성전과 더불어 생긴 불의가 제거되는 때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불의의 종말이며, 동시에 정의의 밀알이다. 따라서 부활은 바로 궁극적인 샬롬을 의미하게 된다.

새로 통합된 공동체

이러한 대화를 계기로 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인과 대척하여 세웠던 내적인 담이 헐린다. 저들은 예수를 영접하여 여러 날을 함께 지냈으며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한다. 이것은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이후 초대 교회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유다와 사마리아의 담은 유다교 안에서는 허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는 쉽게 헐렸다. 일찍이 사마리아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사마리아인과 함께 새 공동체 생활을 꾸리는 데 아무런 장벽도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반증해준다. 비록 마태복음에는 사마리아와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발언이 전해지고 있으나, 그것은 예수의 처형과 부활 이전까지에서만 제시된 한계이다. 마태에게서도 부활과 더불어 이러한 제한은 없어지고,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모든 민족을 향해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린다(28:16 이하). 예수의 "들리움"이 새 공동체의 터전이 된 것이다.

(『살림』 199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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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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