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병원에 있던 수주 간 나는 침대 위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상을 싫든 좋든 계속 봐야 했다. 자다가 눈을 뜨면 그 상이 먼저 시선에 머문다. 여러 날이 지나니 눈을 감아도 그 영상이 어른거린다. 비록 한낱 상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내가 생을 건 이를 상징하는 상인데, 저렇게 달려서 피를 쏟으며 운명의 길에 들어서고 있는데, 나는 살기 위해 침대에 누워 의사와 간호원들의 세심한 배려에 몸을 맡기고 있다는 사실이 개운치 않다.
그런데 그 언제부터인지 그 십자가에 달린 그이를 보고 있는데 친첸도르프의 경험과는 다른 감상에 잠겼다. 그것은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고초를 당하는데 넌 나를 위해 무얼 하느냐?"라고 들었다는 그의 느낌과 관련 없지는 않으나, 내게는 단순히 "날 좀 내려 주려마" 하는 것이었다. 저 이는 2000년을 저렇게 십자가에 달려 있는데 누구 하나 저를 그곳에서 내려 드리려고 하는 사람이 없단 말이다. 그러나 지금 저 이를 어떻게 내려 드리나? 아리마대 요셉처럼 2000년 전에 살지 않는데! 저를 저렇게 달아 맨 것은 사람들이다. 저 이가 저렇게 달린 것은 그렇게 달려야 하는 수난자를 대신해서다. 그럼 저를 내려 드리는 길은 바로 저가 그 때문에 달렸던 그 수난자들을 해방시킬 때만 가능한 것이 된다. 저를 이제는 저기서 내려 드려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마치 "당신은 제발 거기 그렇게 오래오래 있어 주시오. 그래야 우리는 그 덕으로 좀 편히 쉴 게 아닙니까?"라고 하는 식이다. 이런 심보를 '속죄론'이 조장하는 것이라면 비록 속죄는 될지 몰라도 인간은 망해버린다.
(1977. 9.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