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서 십자가를 택한 것은 기적이라고 하고 싶다. 중세기의 기고만장해진 그리스도교 천년 역사 속에서 '치욕'과 나약의 상징 같은 십자가를 그대로 그 상징으로 두어둔 것은 인의(人意)에 반한다. 한 때 무덤을 박차고 손에 승리의 기폭을 들고 영광과 승리자의 모습으로 나오는 부활의 예수를 상징으로 삼으려고 안간힘을 다 쓴 때가 있기도 했었는데….
그러나 중세기의 십자가는 극도로 화려해졌다. 재료로나 모양으로나 색깔로 보아 그건 이미 심미의 대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 전통이 오늘 가톨릭에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신교는 모든 상의 파괴와 더불어 십자가를 소박성에로 환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점점 다듬어지고 화려해져 모양 외에는 별 차이를 볼 수 없게 됐다. 오히려 처형된 예수상마저도 제거하므로 이제는 한 장식품 꼴이 돼 간다.
예수가 달린 십자가는 통나무 그대로였을 텐데! 비록 대패질 정도는 했을지 몰라도 곱게할 목적은 물론 아니었으리라. 사람의 무게를 지탱할 만큼 튼튼하면 됐을 거고, 강도처럼 취급했으니 투박할수록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런데 오늘의 교회에 걸린 십자가는 화려하다. 그것을 전면에 보면서 무얼 느낄까? 어떤 곳에는 화려한 십자가 위에 가시관까지 씌워 놓았다. 그 현장을 좀 실감나도록 재생하자는 목적인지는 몰라도 그 역시 심미적 조화에 치중한 인상이다. 어떤 곳에는 거기에 여러 색깔로 조명까지 해서 '환상적'인 십자가로, 곧 지상의 십자가가 아니라 천상적 십자가로 보이게 한다. 왜들 그러고 싶어질까? 결국 '십자가 앞에 십자가 없이' 있고 싶은 욕구 아닌가!
그대로의 십자가를 정면으로 보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 그런 것 아닐까? 십자가가 단란한 분위기를 해친다고 생각되거든 치위 버려라. 그래도 달아 두려거든 되도록 통나무의 원형대로 하라!
(1977. 9.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