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어느 구석에서 오르내리는 모양이어서 내 귀에 들려온다. 하기는 누가 날더러 "당신은 부활을 믿소?" 하고 묻는다면 때로는 "안 믿소!"라고 할 수도 있다. 까닭은 묻는 이가 벌써 부활에 대한 일정한 표상을 갖고 바로 그런 부활을 믿느냐고 묻는 것이 들다 보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좋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남의 신앙을 심판하려는 태도가 옳지 않으며 또 직접 글로 공시한 것도 없는데 그런 것을 물어 오는 것은 필경 좋지 않은 동기가 있기 때문이다. 종교 재판시대는 지나갔고 또 학문의 자유, 낡은 관념, 조직에서의 탈출 등 심지어는 신은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 판에 하필이면 부활을 믿느냐고 묻는 것은 순수하게 들리지 않는다.
신약성서는 전체가 부활사건을 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서를 전공하는 사람에게 부활을 믿느냐라는 질문이나, 심지어 부활을 안 믿는다라는 단언에 내가 무슨 대답을 하랴! 나는 부활론을 학문적으로 발표한 일은 없으나 부활설교는 수없이 했고, 『현존』에도 몇 차례 부활을 말했다. 그러나 "어떤 부활을?" 하는 데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부활신앙의 형식은 신약성서 자체에서도 결코 통일돼 있지 않다. 부활을 논하려면 아주 복잡하며 학문영역에서 아직도 많은 이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러니 "부활을 믿느냐?" 하면 자연 "어떤 부활 말이오?"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결국 신학논쟁이 벌어져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부활신앙 없이는 그리스도 신앙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활을 믿느냐는 질문은 그리스도를 믿느냐와 같은 말이 된다. 그러므로 그같은 질문은 종교재판소에서나 할 말이다.
남에게 부활을 믿느냐고 묻고 싶은 이는 먼저 스스로 부활을 믿고 있는지 자문했으면 한다. 그리고 믿는다는 대답이 나오면 부활을 어떻게 표상하고 있는지 자문했으면 한다. 가령 겨울에 죽었던 초목 이 봄에 모두 되살아납니다. 이것은 부활의 확증입니다? 역사상에는 퇴각됐던 정의가 결국 다시 살아나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이러한 부활이라면 믿을 게 못 된다. 보면 된다 또는 예수가 부활하여 갈릴래아에 나타난 기사를 보고 믿는다? 그러나 맨 처음의 복음인 마르코복음에는 갈릴래아 부활 현현을 전제했으나 보도는 없으며, 루가는 예루살렘에서의 부활 현현만 보도할 뿐 갈릴래아 부활 현현을 묵살하며 마태오는 갈릴래아 현현만 보도한다. 그러면 빈 무덤의 보도로서 부활을 믿는다? 공관복음서를 자세히 비교해 보는 성의를 가지는 이는 그 빈 무덤 보도가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곧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부활신앙을 전제로 하는 바울로를 위시한 모든 편지의 저자들에게는 <빈 무덤> 이야기는 단 한번도 언급돼 있지 않다. 그렇다고 저들의 부활 신앙을 의심할 수는 없다. 십자가는 패배요, 부활은 승리라는 의식에 부활을 믿는다? 십자가는 정말 패배인가? 오히려 하느님의 승리 아닌가? 그러면 부활과 그렇게 유리된 사건인가? 왜 부활이 이기고 진다는 차원에서 이해돼야 하나? 부활은 오히려 강자의 기준에서 볼 때 패배, 실패, 무능 오히려 약자의 입장에서는 승리, 성공, 전능이라는 사실을 계시한 사건 아닐까? 어떻게 한 부활 말인가?
지난 여름 동안 공관복음서의 부활보도를 분석하고 신약성서의 부활관을 논문화하려고 계획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학원에서는 두 차례나 부활과 관계된 문헌과 텍스트를 학생들과 함께 분석하는 세미나를 했으며, 이번 석사논문으로서 한신대 조교인 진연섭 군을 지도하면서 이제는 자료분석이나 방향은 좀더 밝혀진 셈이다. 부활문제는 성서의 중심일 뿐 아니라 나의 존재이해에 있어서나 이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나의 신앙 걱정 보다 각자가 자기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줄로 안다.
(197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