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을 위해서 요한 1서를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멍청해지곤 한다. 비록 독자에게 세계적으로 알려진 대가 세 사람의 연구서—불트만(독일), 슈낙켄부르그(가톨릭), 닷드(영국)를 참고하기로 약속했으나—되도록 그들에게 구애받지 않고 원문을 자세히 보고 주체성 있게 읽어나가려고 한 것인데 그 일이 무척 어렵다. 처음에는 남의 것들을 보지 않고 제 나름대로 연구해 보고 그리고 위의 참고서 들을 보는데 두 가지 면에서 새삼 놀라곤 한다. 하나는 많은 점에서 보는 눈이 같다는 생각 때문이요, 또 하나는 역시 대가는 대가이구나 하는 점 때문이다. 슈낙켄부르그는 자세히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한 데 대해서 불트만은 아주 간결하게 정통만을 찌르는 데 반해 닷드는 평이하게 썼다. 불트만식으로 서술하면 아주 전문가만이 알 수 있을 것이며, 슈낙켄부르그처럼 쓰기에는 우리에게는 불필요한 배려가 많고, 닷드처럼 쓰기에는 약간 맥 빠질 것 같다. 저들은 저들의 신학적 수준을 안중에 두고 그들의 문제를 전제하면서 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불필요한 것이 많을 뿐 아니라 그대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러므로 나는 나대로 우리의 신학 수준과 독자층을 생각하면서도 신학의 수준을 지키려니까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때로는 글자 하나에 대해서 오래 생각하고 남의 해석을 보다가도 이런 바쁜 세상에 글자 하나에 대한 풀이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를 느끼곤 한다.
이제는 독서풍이 아주 달라진 세계가 됐다는 말을 듣고 있다. 주간지 같은 것이 잘 팔리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서를 그렇게 보려는 이는 없을 것이다. 까닭은 성서에 기대하는 것은 주간지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판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간지 같이 볼 수 없기에 아예 성서를 손에 들려고도 하지 않은 현대인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성서 연구를 주간지에서 어떤 사물 다루듯 할 수도,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성서야 2000년을 풀고 또 풀고 한 게 아닌가! 그만하면 됐나 하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러기에 아직도 성서 연구는 계속된다.
어떻게 보면 성서 연구가들은 2000년 묵은 미이라를 이렇게 분해해 보고 저렇게 들여다보고, 때로는 가까이 현미경으로 보고 또 보는 구경꾼 같기도 하고, 그 안에서 나서 그것을 파먹고 사는 구더기 같이도 보인다. 사실상 성서학자란 그것을 유일한 구경거리처럼 일생을 들여다보며 그것에서만 살 수 있기에 그것에서 영 떠나지 못한다. 그런데 2000년을 '우려먹어도' 다하지 않는 이 책은 하나의 미이라는 아닌 모양이다.
사실 성서는 미이라는 아니다. 까닭은 읽으면 읽을수록 연구하면 할수록 점점 살아나고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의 책이다. 그것은 묻지 않으면 영원히 침묵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참 나의 생을 걸고 물으면 그것은 2000년의 겉옷을 벗고 생동한다.
우리나라에는 성서 독자들이 많다. 틈만 나면 손에 성서를 들고 외우고 또 외우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확실히 장한 일이다. 그런데 그 귀중한 책을 들고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라면 왜 성서 해석을 위해 대대로 그 생을 바친 연구가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이유를 모를 것도 없다. 까닭은 저들은 결론을 이미 지니고 성서를 읽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다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기는 이 구절의 뜻이 뭐요?라고 묻는 일은 있고 또 남의 성서 풀이를 듣고 감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묻는 것은 그가 이미 결론짓고 있는 것과 어떻게 맞아떨어지느냐를 알려는 것이며, 남의 풀이를 감탄하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결론에 맞아떨어지기 때문인 경우가 일쑤이다. 그러니 저들은 성서를 알려고 읽는 것이 아니라 복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도 아니다. 저들은 그저 읽는 것이다. 주문 외우듯! 이른바 독경이란 전통이 있지 않은가! 나무아미타불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하루에 1,000번만 외라. 그러면 복을 받는다더라. 이와 비슷한 생각이 성서 읽기 버릇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주문이 아니다. 그것은 읽어서 그 내용을 깨달아야 산 것이 된다.
우리는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하느님아 산 분이시라면 성서를 통해서 새롭게 늘 말씀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기대하면서 성서를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밤낮 똑같은 결론에 귀착될 수 있을까? 그러니 그것은 불변의 진리라고 자부한 것인가? 천만에 불변은 바로 당신의 아집이지! 아니 성서는 변한다! 변해야 산 말씀이다. 싸움을 하고 나서 성서를 읽어보라! 낮 잠 자고 읽은 성서와는 다르다. 남을 위해 몸에 또는 마음에 상처를 안고 그것을 읽어보라! 싸움하고 읽은 때의 그것과는 또 달라진다. 즉 내가 어느 자리에서 읽느냐에 따라서, 내가 어떤 물음을 갖고 성서에 묻느냐에 따라서 성서의 대답은 달라진다.
성서를 정말 바로 읽는 이는 거듭 거듭 '나는 하나도 몰랐었구나' 해질 것이다. 바로 읽기는 우리의 자명적인 것을 다 부숴버린다.
(1973. 7.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