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재판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계명이다. 살인자는 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인은 인간 세계 안에 만연될 것이다. 랍비 유대교는 이 계명을 법조문화하여 살인을 죄 없는 자의 목숨을 빼앗거나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으로 규정했다. 십계명에서 어떤 전제도 없이 무조건 살인하지 말라고 한 것보다 법 집행을 위해 구체화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데 필요한 조치임과 동시에 그 목적에 모순된다. 따라서 인간은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고민한다. 가령 살인자를 벌하기 위해 살인을 해도 되는가하는 문제다. 사형을 하는 것도 살인인 것을 안다. 그러나 사형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 묵과한다. 또 전쟁에서 군인은 살인을 정당화한다. 군인 훈련은 인간의 모습을 만들고 적의에 차서 그것을 찌르는 훈련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로 수용하고 있다. 구약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살인 불가라는 절대 명제와 불가피한 살인 현실 사이에서 아무런 결론을 못 갖고 갈팡질팡한다. 이런 일은 그냥 계속될 것이다. <땅>이라는 제한된 데 살려면 민족 간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인간이 개성을 가진 존재이고, 또 자기 확장을 전제로 할 때 살 수 있는 존재라면, 인간이 사는 한 살인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이 살인은 소극적으로 불가피한 것만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죽는 것이 있어야 새것을 살릴 수 있는 것이 자연의 원칙이니, 적자생존의 원칙을 뒤집으면 부적합한 것은 죽어서 새 삶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인구 증가로 인류 전체가 위협받는 마당에서는 전쟁에 의한 집단 살인은 정당화돼야하고, 이런 경지에서 의학의 발전은 지구의 위협이 된다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는다.
우리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죽여야하는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는다. 만일 내가 전쟁에서처럼 죽느냐 죽이느냐의 선택을 해야 할 때, 후자를 선택하면서도 여러 가지 자세가 있게 된다. 그 가까운 사람의 가슴에 칼이나 총을 겨눌 때, 다음 두 가지 경우만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피동적인 입장에서 자기 판단을 유보한 채 적을 죽이고 불안 속에 빠져든다. 어떤 이들은 그것은 살인 행위가 아니고 단지 명령에 복종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상대방을 짐승이나 어떤 무생과 구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또는 정의를 위해서, 보다 많은 것을 살리기 위해서, 또는 민족이나 평화를 위해서라고 그 정당성을 내세운다.
이런 다양한 변명처럼 이 계명에 대한 해석도 자기변명과 결국 연관된다. "이 계명은 비상시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정상적인 관계 안에서만 적용된다" 또는 "살인의 원인이 내게 있지 않고 저 쪽에 있는 한 살인 금지법은 무효하다", "이것은 개인에게는 적용되지만 집단에게는 무효하다" 등등의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어떤 단서도 허용하지 않고 이 계명을 오히려 철저히한다. 어떤 단서도 없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무조건적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대교에서는 살인이란 그 행위, 그 결과에만 국한하는 데 대해 예수는 그 살인 행위에 머물지 않고 그 원인까지 살인의 범주에 집어넣었다. 형제를 향해서 성내는 자는 재판을 받게 된다. 즉, 형제에게 향해 성내는 것 자체도 살인이다. 일반 법정에서는 증오와 살인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비록 증오해도 사람의 교양 정도나 성격에 따라서 둘로 갈라질 수 있다. 하나는 화를 이기지 못해 피를 흘리게할 수 있으며, 또 하나는 오직 모욕적인 멸시 등으로 그의 자존심을 짓밟아 치명상을 줄 수 있다. 법정에서는 이 둘은 전혀 다른 것으로 취급된다. 결국 인간은 외적 결과에 국한하는 재간밖에 없다. 그러나 하느님은 행위 그 이전에 그 마음을 본다.
창세기에 나오는 살인자의 시조 가인에게 살인 이전에 살기가 있었다고 한다. "네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창세 4, 6). 일반 인간들이 크게 구분하는 이 두 가지가 예수에게서는 같은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것을 행위로 옮기기 전에 이미 살인한 것과 같다.
그러면 분노는 전혀 없어져야 하나? 미워하는 것, 욕하는 행위, 분노하는 것을 살인이라고 단정하고 그것은 죽음에 해당된다고 하는 그는 누군가?
그는 분명히 분노했다. 죄인이나 약자를 억누르는 자에게 분노했으며 위선자들에게 분노했다. 그는 신의 이름을 도용해서 민중에게 군림하며 착취의 본산이 된 성전에서의 불의에 대해 분노의 채찍을 들었다. 그 분노는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나?
성서의 신은 사랑의 신이며 동시에 분노의 신이다. 이 분노는 결국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것이며 심판으로 종국을 가져올 것이라고 한다. 야훼 신은 분노의 신이다. 이 분노를 막을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억눌려 사는 사람들은 오랜 불의의 역사에서 신의 분노를 기다려 왔다. 그렇다면 예수의 분노는 바로 이 신의 분노인 것이다. 칼라일은 마호메트를 분노할 줄 아는 자라고 성격화했다.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분노를 한 존재다. 그런데 그도 분노의 대가를 치렀다. 그의 분노는 그의 죽음을 초래했다. 그 까닭은 그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내건 분노! 그러므로 그것은 바로 신의 분노를 입증하는 것이다.
니체는 신을 죽여버리는 인간을 상상한다. 신은 인간의 비밀을 끝까지 추적하니까 자신의 범죄를 숨기려는 인간으로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상상한다. 예수는, 누구도 모르는 마음의 비밀을 꿰뚫어 보니까 그를 죽여야 한다는 경우와 같다.
히틀러가 날로 포악해지고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추상적 사랑의 설교나 반복하다가는 독일 민족, 나아가서는 세계인 집단학살의 참극이 오고야 말 것을 내다본 젊은 신학자 본회퍼는 그 분노가 극에 이르러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 히틀러의 범죄가 워낙 크고, 그 책임이 독일 민족 전체에게 뒤집어씌워지고, 또 그때 독일의 교회가 그렇게 무력했음을 부끄럽게 여겨서, 사형당한 본회퍼를 무조건 떠받들고 내세우지만 그들의 전통적 사고에서는 본훼퍼의 행위는 소화해 낼 수 없는 것이다. 신학자가 살인계획에 가담하다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정교분리를 내세워 정치야 어찌 되든 속세의 일이니 오불관한다는 것이 체질화된, 루터파의 본고장, 독일에서는 그의 행위는 수용될 수 없는 것이다.
본회퍼는 미친놈이 자동차 핸들을 잡고 마구 사람들을 깔아뭉개며 질주하는데 그저 피하거나 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고 그의 입장을 분명히했다. 그는 자기에게 미치는 불이익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 민족, 나아가서는 인류의 생명을 위해 분노한 것이다. 그런데 한 인간으로서 인간 전체를 위해 분노를 할 수 있는가? 불가능한 일이며 일면 방자한 발상이다. 그럼에도 그의 분노를 정당화하려면 그가 하느님의 분노를 실현했다는 뜻에서만 가능하다.
예수가 그의 수제자 베드로를 사탄이라고까지 극언한 이유는, 그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제자에게 신의 분노를 터뜨렸다. 본훼퍼도 사람의 분노로 그런 행동을 했다면 용인되지 않았겠으나 그가 하느님의 분노를 대신했기에 예수 분노의 대열에 참여한 것이다.
우리는 학생들의 분노로 이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권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분노의 결과를 총칼로 가로챈 군사정권의 장기적 횡포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분노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교회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겁함을 예수의 말을 우산으로 삼아 가리는 죄마저 저지르고 있다. 하여간 분노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인가 큰 오해로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징조다.
해방 후 좌우대결로 많은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반공이라는 구실 아래 제주도, 거창 등에서 무자비한 집단학살 사건이 연발되고, 6ᆞ25로 전민족적인 도륙 사건이 일어났으나 그리스도교회는 식물화된 듯이 분노할 줄을 몰랐다.
저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모른다. 베드로(그는 교회의 대표로 상징되는데)에게 분노한 예수의 분노를 모른다. 그렇다면 그게 무엇인가! 저들은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집단이다. 그럼에도 예수니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나팔을 불고 있으니 저들은 도둑놈들이다. 그러기에 저들은 마피아 집단들이 패로 갈라지고 또 갈라지듯이 계속 더러운 분파 현상만 일으킨다. 그러므로 결국 구조적 살인 행위를 묵인하므로 결과적으로 살인에 가담하고 있다.
살인하지 말라, 분노해도 살인죄다.
분노해야 한다, 하느님의 분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