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해도 눌리지 않고,
당황하는 일이 있어도 아주 실망하는 일이 없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않고,
꺼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
왜?
바울로 자신이 불사조인가?
아니, 그는 자기를 포함한 인간을 하나의 질그릇이라고 했다. 그러나 깨지고야 말 질그릇임을 알면서도 패배를 모르는 데 그 비밀이 있다.
아무리 치고 때려도 부서지지 않는 그릇이 있다. 역사에 어떤 난관을 당해도 불사조처럼 패배를 모르며, 어떤 힘에도 굴하지 않은 인물들이 많았다. 그들을 사람들은 '영웅'이라고 부른다. 이 영웅들은 인간 승리의 상징처럼 되어 후세에 길이길이 추앙을 받는다. 그러나 저들도 결국은 깨졌다. 여기 진상의 은폐가 있다.
그런데 깨질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미련 없이 깨지는 그릇이 있다. 죽을 줄 알면서도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를 굴복시킬 힘은 세상에 없다. 그것은 깨져도 질그릇으로 있으며, 죽어도 사는 법칙이다. 깨지기를 자청하고 죽기를 바라는 자에게는 깨뜨리고 죽이는 일이 그의 뜻을 관철시켜 주는 결과밖에 안 되기에 그런 자에게 패배는 없다.
역사상 이런 인물들이 많았다. 저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을 깨뜨리고 죽음으로 스스로 제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자폭한 이들을 역사는 비겁하거나 무능하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길이길이 기억하면서 그들에게서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깨진 것임에는 틀림없다. 남은 것이 있다면 깨지려는 의지뿐이다.
그런데 바울로는 눌려도 눌리지 않고, 당황해도 절망하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꺼꾸러져도 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깨져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깨지려는 의지가 산다는 뜻, 아니 깨지면 깨질수록 그 안에 담긴 보물이 드러나기 때문이고 그 보물에 의해서 새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를 위해 나를 죽이는 자의 불멸성이다. "언제나 예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질그릇이다. 그러므로 깨면 부서진다. 그러나 우리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까닭은 불사조거나 불굴의 의지 때문도 아니다. 단지 우리 안에 내가 죽어도 사는 다른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보화를 담은 질그릇이다.
(1974. 2.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