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는 자다가 깰 때니"
자는 것이 나쁘고 깨는 것이 좋다는 말이 아니다. 이 시기를 너희가 이미 아는 대로 깰 수밖에 없는 때가 벌써 됐으니 깨라는 것이다. 곤히 잠든 것을 잡아 흔드는 소리가 아니다. 번연히 쨌으면서도 잠에 미련을 가지는 자에게 하는 말이다.
사실은 좋은 때란 잠든 때이다. 안식이 좋은 것이라면 잠든 때는 좋은 때다. 단순함이 좋다면 잠은 단순하다. 무의식이 좋다면 잠든 때는 의식이 잘 때이다. 거기는 의식이 없으니 나니 너니가 없다. 나니 너가 없으니 내 분열은 더욱 없다. 내 분열 없으니 싸움이니 갈 등이니 회의니 또 변증이니도 없어 그대로 안식이다. 그게 다름 아닌 낙원이다.
어린아이 때는 확실히 좋은 때이다. 그것은 환경이 유달리 좋아서가 아니라 그는 어머니 품에 안겨 자아란 깨지 않고 그냥 자 있으므로 좋은 것이다. 거기는 의무니 권리니는 필요 없다. 말이나 행위에 의미를 함축시키지 않아도 좋다. 그저 잘 먹고 잘 놀면 된다. 이 어머니 품이란 다름 아닌 어린애의 낙원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을 아는 때는 그 잠에서 깬 때이다. 자던 그 자아가 눈 뜬 것이다. 그때는 이미 어머니 품이 낙원일 수는 없다. 이제는 더 재울 수도 없으니 안 깬 척 해 봐도 소용이 없다. 이미 쨌으니 깰 때는 깨야 한다. 그것이 불안이고 문제이고 고통이고 반역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일어나서 그다음 할 일을 해야 한다.
"아담"에게 "에덴"이란 다름 아닌 어머니 품이다. "에덴"이란 결국 "아담"의 자아가 잠든 때이다. 그래서 벌거벗어도, 땀 흘려 땅을 파지 않아도 생명을 걸고 아이를 낳지 않아도 좋았다. 오직 열리는 실과 먹고 피는 꽃을 즐기고 짝지어 준 이와 즐기면 됐다.
그러나 그가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그 황홀한 잠에서 쨌다. 선악 과에 손대는 그 순간이 벌써 깰 때이다. 모른척해 봐야 소용없다. 벗었다는 의식이 앞서고 하느님께 대한 공포가 뒤섰다. 눈뜬 자아는 벌써 제 할 일을 알아 드러난 아랫도리를 가리우고 자기 방위에서 나무 아래로 기어들었다. 그것이 바로 아담에게는 자다가 깰 때, 아니 자다가 깬 때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잠 깬 아담을 부르는 하느님의 소리이다. 이것은 깬 잠을 모두 재우려는 자장가는 아니고 깬 잠이니 어서 일어나라는 재촉이다. "네가 이때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도다." 안 깼다면 몰라도 깨난 이상 더 잠의 미련을 가져도 소용없고, 안 깬 척하는 것은 더욱 못마땅한 것이니 핑계할 것도 피할 것도 없이 깸으로 이제 모여 그 길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하느님의 재촉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 왜 거기 아직도 주춤거리고 있느냐? 이제는 쨌으니 깬 너를 앞세워 제구실 해야지 … "
혹은 이것을 일러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사람 되는 거대하고 엄숙한 처음 내디딤이라고 찬미하지만 그 거보(巨步)가 땀 흘려 땅 파고 생명 걸어 자식 낳고 그리움이 곧 괴로움인 인생의 수난(受難)의 개막인 것은 잊고하는 소리면 어리석다. 그러나 이미 깬 것을 도루 재우려는 하느님은 아니다. 이미 깬(깨진) 길이니 제 발로 걷게 그 분깃을 주어 보냄이 그의 뜻이다.
확실히 우리는 한때 낙원에 있었다. 그때 목사의 말씀이면 그저 진리이고, 교회면 무조건 신성했고, 성서면 그저 문제없었다. 그때는 신앙엔 고민이란 없었고, 회의니 문제니는 우리와 상관없는 악마의 일이었다. 그때 나란 그대로 자고 남의 세계에서 안심하고 몸 맡 길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젠지 모르게 벌써 선악과를 따먹었다. 이제는 뚜껑 열어 보기 전에는, 내 혀끝에 대보기 전에는 아무런 권위도 인정할 수 없다. 그 거룩한 행동은 오히려 웃어주든지 침 뱉고 싶은 생각이 앞선다.
신앙이라는 단순한 말로 모든 문제를 싸서 홀짝 삼켜버릴 수는 없다. "너희가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도다." 제가 먼저 알면서도, 그대로 있지 않은 저를 번연히 알면서도 잠든 척 내맡긴 척 함은 오히려 징그러운 일이다. 벌써 제 몸 제가 가리면서, 순진성은 다 쨌으면서 아직도 엉거주춤해서 예배당에나 나오고 식사 기도나 하면 되는 척하나 번연히 안될 줄 알면서 더 그러고 있을 필요는 없다.
성을 알기 시작한 사춘기는 어머니 품을 떠나면서 동정에 대한 강한 신념이 뒤따라 인다. 애인이 생기면 영원한 "비너스"로 믿고, 친구가 생기면 그 우정도 영원에 속한 것으로 꽉 믿어 인간을 중심으로 하고 휴머니스틱한 로맨티시즘의 꽃을 아름답게 피운다. 그러나 실연을 당하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므로 깊이 빠진 또 하나의 아름다운 꿈에서 깨야하는 것이다. 제게서 내민 칼끝이거나 상대방이 내민 칼끝에 놀랐거나 여하간 그것은 바로 깰 때 아직 깨어지지 않은 이때다.
하느님의 품을 떠나 깬 나를 들고나와 맺은 첫 열매가 카인과 아벨이다. 이것은 그다음이다. 너와 나만은, 한 피 받은 너와 나만은 영원히 한 몸이리! 그런데 너와 나는 구별이 없어야 할 둘인 한 몸인데 하나가 아닌 것을 발견했을 때 카인은 아벨에게 배신당한 것으로 분노했다. 나보다 앞서려는 아벨을 참아넘길 수 없는 카인은 아벨을 죽이므로 그 꿈도 깨졌다. 영원한 꿈으로 알던 꿈이 제 손으로 아우를 때려눕히므로 깨진 것이다. "벌써 깰 때가 됐다" 아니 깨어졌다. 그런데 안 그런 척 아우의 시체를 묻고 흘린 피를 흙으로 가리고 잠을 계속 자는 척해야 벌써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엉거주춤한 카인을 향한 하느님의 추궁이다. 그것은 공간적인 아우의 위치를 물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위치를 묻는 것인데 그것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진 잠을 모른 척하는 카인에게 이제는 싫더라도 이미 내디딘 길이니 혈육이니 아버지의 권하(權下)이니도 떠나 어딘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그 길은 가도 가도 끝없고 그 머리 위에 주검이 위협하는 길이라고 해도 홀로 가야 한다는 하느님의 재촉이다. 모른 척하려고 해도 대지가 입 벌려 삼킨 아벨의 피가 소리를 질러 호소하는데 …
우리도 확실히 이런 잠든 때도 있었다. 형제니 친구니 동지니 하면 절대불변의 영원한 것이라 믿어 필요하면 혈서로라도 쉽게 맹세할 수 있었다. 그때 엄마 떠난 소년같이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도 믿을 수 없어도 우리 그룹만은 반드시…… 하는 생각과 더불어 황홀한 꿈이 전개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꿈도 벌써 깨졌다. 동지니 친구니 해도 벌써 어쩔 수 없는 금 그어진 것을 보았고 우정이니 결사적이니 해도 경우와 이해가 맞아야 맞는 말이고 가정이요 지위요 생기면 우정이오 동지 사이엔 떨어진 상아래 부스러기도 차려지지 않는 초라한 신세인 것을 벌써 알아버렸다. "너희가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도다." 그러한 이제 형제니 동지니 사랑이니 꿈이니 해서 적당한 말로 비끄러매보려고 해야 썩은 새끼토막이다. 깨진 꿈은 도로 찾을 수는 없다. 이제는 제가 배신했거나 당했거나 한 몸인 꿈 깨어 두 몸인 것을 분명히 알았으면 외롭더라도, 그립더라도, 불안해도 홀로 제 길 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고독해짐이 좋아서가 아니다. 고독할 수밖에 없으니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숙명이니 가다 죽어도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이 말을 받으면 숙명주의가 되거나 허무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그 내 밟은 발 뿌리에 구원이 있어서도 아니다. 꽁트는 이성이 제길 들어서는 과정을 신학 시대, 형이상학 시대, 실증적 시대로 보아 그것이 완전히 제길 가면 새 세계가 올 것을 믿었고, 공산주의나 유토피아적 낙관주의가 다 이러한 산물들이나 그건 다 잘못 된 생각이다. 그 꿈도 실상 깨졌다. 역사는 깨고 깨서 이제는 그 이성 자체의 잠자리를 들추기 시작했다. 하여간 깨난 이성은 종당에는 스스로 자폭하고 말더라도 갈 데까지 가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을 밝히는 것은 낮인 까닭이 이성을 밝힘은 오히려 밤임을 의미한다. 어두울수록 횃불을 높아 둘 듯이 이성을 밝힘은 오히려 밤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밤 밝히기 위해 든 횃불은 오히려 밤을 더 캄캄하게 하듯이 이성이 살상 밝히는 것보다 어둡게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에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을 더 갖다 주고 있기므로 세계는 몸부림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비관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역설적인 낙관이 있다. 그것은 밤이 깊었다는 것은 낮이 가까웠다는 증거라는 믿음에서이다. "밤아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라는 이 말씀은 변증법적인 신앙에 대해서 어두운 밤을 뚫고 나오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깊은 이 밤을 낮의 자유임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현실이다. 확실히 거짓 것은 참것의 그림자이다. 그런고로 제아무리 별별 추잡한 것이 광란해도 그것만 들여다보고 비관할 것이 아니고 그걸 꿰뚫어 참것이 오는 발소리를 듣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밤 끝에 낮이 있다거나 밤이 낮을 낳는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낮이 나타나서 밤을, 빛이 나타나 어두움을, 참이 나타나 거짓을 삼켜버린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 인의 믿음이다. 즉 이것은 합리적인 연속이 아니다. 그것은 비연속(非連續)이다. 그것은 딴 질서이다. 정말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래서 솟아 오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단장한 신부처럼 내려움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그런고로 그것은 일반적인 낙관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밤이다. 우리 앞에 낮은 어두움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그러나 낮은 마침내 이 장벽을 뚫고 어두움을 삼켜버리리라는 이 믿음이 이 어두움에 있으면서 어두움을 없는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을!
(1956. 1. 『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