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중반 독일에 가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저들의 근검절약의 생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놀란 것은 저들의 먹는 자세였다. 자기 몫은 절대로 남기지 않고 다 먹는데 빵조각을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다가 그것으로 그릇에 남은 국물 따위를 핥듯이 깨끗하게 닦아 먹는다. 그리고 후식으로 사과가 한 개 나오면 그릇에 남기는 것은 둘 셋의 까만 것, 그것은 씨이다. 그러니 씨만 남기고는 깡그리 먹는 셈이다. 이런 풍경이 GNP가 1,300불이 넘었던 196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970년대에 갔을 때는 그런 습성은 깡그리 없어졌다. 식당에 가면 절반도 안 먹고 내놓은 그릇이 수두룩하다. 그보다 더 놀란 것은 들에 탐스럽게 익은 실과들이 사람의 손을 기다리다가 저절로 나무 아래 시체처럼 떨어져 썩고, 그것들을 중심으로 각종 벌레의 잔치가 벌어져도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또 이미 추수한 감자밭에서는 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메추리알 만한 감자들이 그대로 깔려 있었다. 그래도 어느 누구 하나 그것에 손대는 이가 없다. 이유를 물었더니 감자 추수 기계가 그렇게 적은 것은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저들이 그렇게 내버리나? 한마디로 거두어들일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거두는 시간에 공장에서 일하면 몇 곱절의 수입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실과는 유럽공동체제 때문에 훨씬 좋고 싼 것이 수입되어 공급되기 때문에 자기들 것은 무시하게 되고, 이미 풍요의 도를 넘어 비대증을 고민하는 정도가 되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있다. 그것은 산업구조가 소비는 미덕이라는 풍조를 계속 선전해서 저들도 세뇌된 것이다. 여기서 크게 문제 되는 것은 주어진 물건에 대한 경시 풍조이다.
특히 농산물은 창조주와 사람을 연결하는가장 직접적인 것이다. 대지 위에 주어진 곡식알을 정성스럽게 심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고는 하늘의 처분만 기다리는, 이 자세가 인간 본래의 모습이다. 그것으로 땅과 하늘과 사람이 함께 생명을 창조하는 기쁨이 있다. 그렇게 해서 생산된 것이 곡식이다. 그 쌀 한 톨이, 실과 하나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구체적인 결정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쌀 한 톨을 아끼라고 야단하던 우리 조상 들은 반드시 가난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피땀의 결과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종교적 의미를 포함한 물질에 대한 경외심이다. 물질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그것이 적고 많고가 문제가 아니며, 돈으로 계산해서 멸시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풍조는 상업주의를 등에 업은 악마의 소리이다. 그 결과는 지구를 온통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풍요하면 소비해 버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세상에 준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 외의 것은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검절약의 줄을 늦출 수는 없다. 세계 3분의 2 이상 인구가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시달리는데, 풍요함 때문에 물질을 멸시하는 국민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