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은 죄이다. 의식은 파멸이다. 의식은 죽음이다. 이런 생각이 자주 머리를 든다. 꽃이 고운 줄 의식할 때 시들고, 버리가 가시를 가진 줄 알았을 때 망한다. 로마가 스스로 큰 줄을 몰랐더라면? 시아 저나 成吉思汗이 잘난 줄 몰랐더라면?
아담이 생명을 의식했을 때 낙원을 잃었고, 카인이 아벨을 의식했을 때 방랑의 길이 있었고, 가롯 유다가 예수를 의식했을 때 죽었고, 베드로가 반석임을 의식했을 때 천길만길을 내리 굴러떨어졌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그런 비극들은 없었을 걸! 비극이란 자체도 의식할 때 있는 게지 객관적 비극이 어디 있으리요.
사람의 구원이란 의식이 없어질 때인가?
그런데 이 생각이 이상한 데까지 발전된다. 언제 나는 광천 백영흠 목사님과 함께 어떤 영아원에 갔다. 영아실로 들어서자 무엇에 굶주린 생후 1년 미만인 십여 명의 눈동자가 내게 일시에 집중한다. 그 눈동자들은 나를 초점으로 한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내게 줄 게 있어야지?! 내게는 저들에게 줄 붉은 마음도 실상 없다. 뜬 구름장 같은 곧 지나갈 감정은 있으되 그건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내 손에 닿는 어린애 얼굴은 기쁨으로 붉어진다. 내 손이 떨어지면 비쑥거리다가 그만 울어버린다.
사랑! 그것은 말이 아니다. 관념이 아니다. 붉은 핏덩이이다.
저들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했다. 엄마의 젖이란 물체가 아니다. 그게 그대로 피다. 사랑이다. 피! 그래서 주님은 피를 마시라고 했다. 피를 마시라는 것은 젖 먹으란 말이지! 젖 먹으란 말은 사랑을 먹으란 말이지! 저 어린것들도 그런 피가 필요했다. 우유가 아니고 피가!
나는 그 어느 한 생명에도 나누어 줄 것이 없는 채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메시아 의식이란 자발적인 것인가, 피동적인 것인가? 자동적이면 의심이 없지 않을까? 주위의 눈초리가(역사를 포함한) 자기에게 집중함을 느꼈을 때 그 집중에 자기가 선 것을 느꼈을 때 처음은 그 위치(사명)에 대한 감격이 있겠으나 다음은 그 위치에 세운 그 의지가 자기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가를 느끼게 되고 초조하여 Entweder Oder의 기로에서 싸우다가 자기에게 진 자는 그대로 흘러가 버리고 자기에게 집중되는 동공을 다른 시대 또는 인물에게 전가시키므로 자기를 뺄 때 세상은 그를 예언자라고 하고,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자가 메시아가 된다.
결국 예수는 메시아임을 의식했을 때는 죽을 수밖에 없어 예루살렘으로 한사코 오른 것이 아닐까?
(『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