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서 죄의 항목을 예거하는 중에 '거짓증거'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십계명에서도 이웃과의 관계를 가르치는 계명에서 특히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따로 취급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그것이 왜 그렇게 중대한 죄인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것이 죄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죄도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거짓 증거'만큼 심각한 죄는 없다는 것을 점점 실감하게 된다. 사람이 약해서 짓는 죄는 얼마든지 있다. 또 적대자나 경쟁 자를 누르기 위한 본능에서 하는 싸움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경우 그 과정에 일어나는 과오들은 대체로 피동적일 수 있다. 그러나 거짓 증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절망적인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남을 해치려고 '나는 이런 것을 보았다. 이런 것을 들었다'고 거짓 증거를 하는 경우, 그 양심이 완전히 마비된 데 그치지 않고 양심 대신에 어떤 독주머니가 채워져 있지 않나 의심스럽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무엇으로 그를 상대할 수 있을까! 더욱이 그것이 남을 해치려는 동기에서 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살인자도 될 수 있는 소양을 가진 셈이다. 더욱이 하느님 운운하며 성직자의 간판을 걸고 있는 사람이 태연하게 그럴 수 있다는 것은 타락의 마지막 골짜기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자기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서 '내 마음을 하느님이 알고 계신다'라는 말을 태연히하는 사람을 제일 무서워한다. 성서에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는 어려운 구절이 있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그런데 요새는 그게 바로 이웃을 해하기 위해서 거짓증거하는 따위의 죄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자기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하느님은 나를 안다고 할 때 그는 하느님을 거짓 증거자로 전락시키면서 자기만 살겠다는 자가 되었다. 하느님마저도 자기 적을 위해 마음대로 부려 먹는 사람이라면 무슨 짓인들 못 하랴!
나는 이 말이 너무 무서워서 비록 거짓이 아니라고 해도 그런 말로 자기 마음을 입증하려는 사람은 애당초 소름이 끼쳐 마주 보기도 싫어진다. 도대체 돼먹지 않은 개수작이다. 제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이 그 마음을 안다는 말인가? 제가 무엇이기에 쩍하면 하느님을 증인으로 재판석에 호출한단 말인가!
나는—누구나 당하는 일이지만—근래에 이상한 상황에서, 루머 속에서 헤엄쳐야 할 경우를 겪는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변질 된다는 것이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루머에 그리 놀 라지 않는다. 그러나 루머는 자연발생적으로 떠도는 것만이 아니다. 루머의 전문가가 퍽이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더욱이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러한 전문가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치 세계에서는 루머를 하나의 정략으로 사용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종교계에서 그러한 루머 전문가는 사람의 힘으로는 더 이상 구 제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독사의 종류'이다.
이러한 독사들이 판을 치지 못하게 하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애당초 남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일이다. 거짓 증거가 오죽 무서우면 십계명 중의 하나로 독립시켰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