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에게 솔직하게 공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다른 표현을 빌려 전달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불의를 공모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지만 의로운 싸움 또는 자기 보존을 위해서도 사용된다. '아나로기아'라는 것은 서로 아는 내용을 아는 사람끼리 다른 상징으로 전달하는 어술인데 '은어'라는 것도 그런 것이다.
로마에 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물고기를 그려서 서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냈다. 그땐 아마 십자가의 표시도 이미 일반에게 알려져서 사용 못 하게끔 됐던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로마 정권의 박해가 심했음을 입증한다. 물고기를 희랍어로 'ichthus'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Jesus), 그리스도(Christos), 하느님의(theou) 아들(fios), 구원자(Soter)의 첫 글자들을 따면 바로 '이크튀스'가 된다. 이래서 물고기는 박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숨은 표지가 됐다. 아무리 억눌려도 사람은 '더불어의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의사를 전달하고 받아야 살며, 서로 알고 알려야 산다. 그게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숨 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통과하여 무시아 지경 가까이 비두아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아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에 이르렀습니다… "는 서술이 있다. 바울의 일행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 계획한 아시아, 비두니아로 가려던 길이 막혔다. 그래서 어디로 갈지 결정짓지 못할 때 한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서 도와 달라고 손짓하는 환상을 보고 그리로 갔다는 것이다. 성령, 예수의 영이 저들의 길을 막았단다. 왜 그랬을까? 난 이게 은어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됐다. 까닭은 나도 최근 광주에서 전주로, 그리고 다음은 목포로 말씀을 전하려고 떠날 약속과 계획이 다 됐었는데 그 길이 막힌 쓰디쓴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려는 길을 성령 또는 예수의 영이 막을 리가 없으며, 또 막았다면 어떻게 막았을까? 결국 주변 사정이 막힌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박해 때문이었으리라. 이것도 내 경험에서 하는 짐작이다. 그렇다면 '성령', '예수의 영' 하는 것은 한 은어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기자는 은어로 쓴 것은 아니다. 비록 그 정황이 어떻게 돼서 계획대로 못하게 됐든 그것은 결국 성령 또는 예수의 영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것은 구체적으로 누가 또는 어떤 집단이 방해했다는 사실과 그것을 그대로 공개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보아 생략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결국 저지를 받아 못 가게 됐다. 내 흥분은 여러 날 계속됐다. 그러나 결국 주의 뜻이 아니어서, 성령이 막아서 가지 못했다는 신앙의 차원에서 소화하려고 노력했다. 하여간 광주, 전주 그리고 목포의 교우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1977. 5.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