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붓을 드니 공교롭게도 밖에서 무서운 비명이 들려옵니다. 그것은 한 경찰관이 어떤 사람을 추격하여 바로 나 있는 집 앞에서 잡은 모양인데, 그는 사정 없이 고함을 치면서 무수히 난타하여 상대방은 비명을 내면서 애걸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경찰은 그를 체포한 채 지금은 멀리 밤거리에 택시 엔진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내 기억에는 한 꿈을 본 것같이 그 사정이 몽롱할 따름입니다.
나는 이 사실에서 아래와 같은 생각이 연상되었습니다. 하나는 그 비명과 함께 내 머리에 수난자들의 처참하고도 창백한 모습, 절망 속에서 신음하는 얼굴들이 떠올라왔고, 다음은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라는 시간에 대한 생각이 그것입니다.
수난자들의 고통! 터져 나오는 폭성! 끝없는 무저항으로 펄펄 뛰어드는 자살자의 모습! 아 나는 어떻게 저들을 도울 수 없을까. 나는 내 몸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서 나눠 주는 것을 환상합니다. 그런데 이 환상은 수난에 대한 분노에 발악하여 피 묻은 칼을 들고 지금 평안히 앉아 글을 쓰는 나를 질투하여 문 앞에 노도와 같이 몰려오는 것으로 변합니다. 나는 이런 환상을 가진 채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쇠잔해 가는 육체를 안고 신음하는 형께 이 글을 씁니다. 형이여 형을 포함한 뭇 수난자의 고통의 원인이 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나는 이번에 모든 동정의 마음을 버리고 냉정하게 그 원인의 본질을 따져 보기로 하겠습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인간에게는 양면이 있을 것입니다. 영원에 속하는 것과 시간에 속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소박하게 논하면 물질성은 시간에 속한 것이고 정신적 또는 영적인 것은 영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 고통의 농도 여하는 잠깐 불문에 두고 우리들의 고통의 내용은 대체로 시간에 속한, 즉 물질성에 속한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간은 인간성의 기본 특징이며 자기 미현의 기본적 형식일 것입니다. 그런고로 시간 안에 있는 인간으로서 시간적인 것을 초탈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적인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아는 것은 고통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데 결정적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적인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시간성에는 "보다 낳다", "보다 괴롭다", "보다 좋다"고는 할 수 있어도 절대라는 말은 쓸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그 안의 모든 것은 조건적입니다. 선한 것은 반드시 악한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고, 지나치게 만면 쓰고 만나는 기쁨에는 이별의 슬픔아 내포되어 있으며, 가졌다는 것은 벌써 없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어느 자기의 미를 자랑하는 여인이 자기의 얼굴이 변화가 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얼굴의 변화보다도 비교의 표준에 따르는 심적 변화가 더 큰 원인일 것입니다. 땅 위에 미의 표준이 어디 있습니까. 파스칼은 만일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일 푼이라도 높든지 낮든지 했어도 서구의 문명에 변화가 있었으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시간 안에 있는 산물의 상대성을 잘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간 안에 있는 우리의 고통도 이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지난번 내가 형을 찾았을 때에 몸에 약간의 상처로 발단했으나 형의 앞에 있는 동안 조금도 그 고통을 느끼지조차 못했습니다.
시간은 제한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은 부단히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회상하면 지금 내가 어떻게 아직 살 수 있었는가를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에 어느 단상의 슬깊 사건을 생각하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그 때의 입장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시간은 나의 슬숲을 싣고 저 망각의 피안으로 흘러가 버린 탓입니다. 내 가슴에 안은 어린애가 죽어도, 나는 살리라는 냉혹한 어머니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집마다 자식 안 죽인 집이 없건만 그 어머니들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이것은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람들은 이번 전환은 우리 민족에게 무한 비참사라고 하나 그것이 통계상의 확률은 될지 몰라도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이 지금보다 덜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그 난을 겪고 현재 생존해 있는 자라도 모를 것입니다. 따라서 시간은 우리의 행복에도 그런 간섭을 합니다. 아무리 행복한 일도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점점 없어져 가고 맙니다. 천만(千萬)을 노리는 상인은 목적에 달성하자마자 억태(億台)를 향해서 초조합니다. 열병같이 미쳐서 사모하던 애인과 결혼한 다음 날부터 외도를 일삼는 것이 사람의 상정입니다.
이런 사실은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잘 말하는 것입니다. 장래는 현재의 내용으로서만 존재하며 과거는 현재에 돌아옴으로써 "무"가 되므로 있는 것은 현재뿐인데 이 현재도 곧 "무"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즉 현재인 내가 미래의 타자를 지향하고 나가다가 거기에 도달하는 순간 그것은 벌써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시간이란 한 가능성에서 다른 가능성에, 한 형상에서 다른 형상으로 언제나 자기의 환영을 좇으며 생멸이 언제나 번갈아 생기는 한없는 "무"로 달리는 비애스러운 여인(旅人)과도 같습니다.
이런 순간적인 현재라는 평면도 공간이라는 입체 면에 의해서 무한하게 축소를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즉 현재의 나를 싸고도는 희비애락을 바로 알아서 느낄 수 없습니다. 지금 한 어린애를 낳아 기뻐하는 순간, 저 마당에 놀고 있는 큰아이가 자동차에 치었는지 모릅니다. 문을 닫으면 문밖의 붉은 장미가 있는지 노한 범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이여 당신을 괴롭히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역시 이 시간 안에 제약받은 당신의 육체를 싸고도는 그것입니다. 당신의 몸이 이즈러지며, 따라서 당신의 아내가 가고 친구들은 돌보지 않는 슬픔입니다. 왜 당신은 성한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우울합니까. 당신은 그보다 못해서이지요 그러나 당신이 표준화하는 그는 무엇입니까. 그도 시간 안에 있는 없어질 것이 아닙니까.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이 나라와의 영화를 말할 때 저 나라를 말하며, 시간적 왕만을 원할 때 차라리 가시관을 선택했고, 빵을 찾는 배고픈 우리에게 하늘의 만나를 말하며 야곱의 샘만 자랑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의 설교를 하며, 땅의 보화를 찾는 무리에게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에는 도적도 구멍을 뚫지 못하고 좀도 먹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육체를 사랑하는 무리에게 차라리 그 눈과 손을 없애버리고라도 저 나라에 가는 것을 선택하라고 권했는데, 이 심정을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시간 안에서만 모든 것을 볼 줄 아는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허구한 사기한으로 보여 십자가에 처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자이었기 때문에 저들의 요청에 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영원"을 시간 안에 비끄러매려고 했으며 예수는 저들을 둘러싼 "시간의 옥문"을 깨치려 온 것입니다.
"영원" 그것은 시간이 제약 못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시간의 무한 연속같이 생각하기 쉬우나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고로 거기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영원"한 순간만이 있을 뿐입니다. 영원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기는 보다 낫거나 보다 고운 것은 없고 선이면 선 자체만이 있을 뿐입니다. 영원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재 자체이기 때문에 장소의 "무"입니다. 즉 그것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으며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지혜의 의지에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또 아무런 가림도 없는 신적 직관의 경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영원에 설 수 있다면? 우리가 좀 어리석은 자를 볼 때에 또는 어린애를 볼 때에도 그의 울음과 기쁨의 요소가 한없이 유난하거든 만일 이 영원에서 이 땅 위에 되어지는 모든 사실,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심령을 내리 본다면?
"귀신들이 너에게 강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네 육체를 죽이는 자를 두려워 말고 네 영을 지옥에 던지는 것을 무서워하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 것이며 땅 위에 있는 것에 호흡한 모든 권세 잡은 자와 명예에 안일한 자와 패물에 둘러싸인 부자를 불쌍히 보고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를 위시해서 땅에서 멸시받는 무리를 복이 있다고 하신 패러독시컬한 말씀의 참뜻이 어디 있는가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난한 현명한 철인은 철저한 시간의 노예인 것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영원의 입장에 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영원이란 자연주의에서 말하는 것같이 절대적인 힘이거나 또는 현상주의나 신비주의에서 보는 초시간성이나 무시간성같이 자기와 관계없이 순수한 객체로서 고립화한 것이라면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고 미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은 시간 안에 있는 우리와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이 시간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영원이 시간 안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영원이 시간의 제약을 받는 육체를 쓰고 우리를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팔레스틴에 나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부르심에 대답함으로써 그의 사랑을 믿음으로써 내 몸이 시간 안에 있으면서도 영원의 세계에 설 수 있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생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 안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뭇성도들이 오히려 땅 위의 고난을 자진해서 짊어진 것은 그 생명이 이 영원한 품에 깊이 안긴 분명한 이유일 것입니다.
형이여, 만일 우리가 이 영원한 그리스도의 편에 분명히 선다면 겨우 고난의 의의를 이해하므로 위로받는 데 끝일 것입니까? 우리에게 어찌 시간에서 되어지는 모든 것, 시간 안에서 자랑하는 모든 세력 그리고 시간의 마왕을 향해서 비웃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저들과 배전하고 저들에게 사로잡혀서 찰나주의 유물주의 등등으로 줄달음하는 저들을 해방해야 하겠다는 사명이 그리고 용기가 안 생길 것입니까. 나는 이 글을 마치려고 하니 시간에서 영원으로 비약한 사도 바울의 개시가(凱施歌)가 생각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었던 것에(시간) 대하여 죽었으므로 불법에서 벗어 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영원한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시간적인 것)으로 아니할지라.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골짜기(시간이 지배하는 곳)에서 누가 나를 건지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영원자)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생각건대 현재의(시간 안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영원한 나라)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야성』 195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