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의 청년)는 패기가 없고 위선적인 면이 많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우리는 '죄'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행동에 너무 많은 제한을 받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갑니다. 사실 교회는 수없는 죄의 종목을 나열함으로써 인간을 죄에 묶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되는 행위만 제외하고선 무슨 일이나 마음껏 거리낌 없이 행해도 좋지 않겠습니까? 자꾸 죄의식을 강조해서 젖 먹던 시절까지 돌이켜 보게 하고 억지로라도 성냈고 교만했고 시기하고 미워했던 일들을 반성케 하는데, 이렇게 해서 결국 어떤 인간을 만들겠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교는 죄를 규탄하기 위한 종교는 아닙니다. 정말 당신이 교회를 통해서 죄의식만 높아졌다면 교회가 잘못 가르쳤거나 당신이 오해했을 것입니다. 아니!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당신을 죄와 죄의식에서 해방시키자는 것이 그 중심입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그런 것을 죄라고 규탄함으로써 당신이 위축감을 느껴야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 말이 옳기는 하지만, 그것을 되들 추어서 나를 괴롭히냐는 것입니까? 아니면 당신에게는 죄로 생각되지 않는데 그렇게 생각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옳기는 하다만!" 한다면 교회가 그런 것을 규탄하기 전에 당신 자신이 당신을 규탄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사실상 당신이 열거한 '죄들'은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은 교회가 말하기 전에, 사회윤리가 말하기 전에 당신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죄들'을 새삼 들추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들추어낸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성서는 원칙적으로 '죄들'(복수)을 말하지 않고 '죄'(단수)를 말합니다. 즉 하나하나의 행위를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자체를 문제로 하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뜻에서 인간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죄인'이라는 성서적 표현은 결국 너는 너를 상실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죄들'을 지적하고 규탄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기느냐 하면 그것은 당신이 당신을 상실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바울로는 이방인들의 죄의 항목을 구체적으로 들면서 규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까닭은 저들이 지금의 자기 삶이 자명하고 당연한 것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너는 네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죄들을 규탄하자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라, 그래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현존의 자기 충족적인 삶, 그렇기 때문에 폐쇄적인 삶을 개방해서 새것을 받아들이게 하자입니다. 바울로는 '죄'를 엄숙히 내세웁니다. 그런데 그 죄는 윤리의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믿음의 상반 개념, 즉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래, 새 것에 대해서 폐쇄적인 상태를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로는 죄를 규탄함과 동시에 믿음을 강조합니다. 이 믿음은 바로 죄 또는 죄의식에서의 자유한 현실을 말합니다. 믿는 자는 이미 죄 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참 죄란 어떤 것인가를 가장 뚜렷이 나타낸 것은 예수의 태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죄들을 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윤리 또는 종교가 규탄한 소위 '죄인'들을 무조건 품어 주었고 오히려 저들의 편에 섰습니다. 그 반면에 당시에 죄를 규탄하는 재판장의 자리에 앉은 종교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참 죄인은 창기나 세리가 아니라 바로 저들을 규탄하고 있는 저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은 '의인', '죄인'에 '소위'라는 말을 붙여서 이해해야 합니다. 왜 소위 죄인의 편에 서서 소위 의인의 죄를 규탄했을까요?
소위 의인은 윤리적으로는 죄인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은 자기들의 윤리나 종교적으로 쌓아 올린 공적(과거적인 것)에 정좌하여 자족함으로써 미래(새 것)와의 관계에서 폐쇄적이 된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자기 삶을 보장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가 참죄입니다.
이에 대해서 소위 죄인은 윤리적으로 죄인임에 틀림없으나 스스로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결코 현재에서 자기충족적이 아닙니다. 즉, 마음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새로운 가능성(미래)을 향해서 개방적입니다. 가진 것에 의해서 살려고 하지 않고 오고 있는 것에 의해서 살려는 사람들입니다. 즉,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죄 아래 있으면서 그것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저들은 죄인이면서 죄인이 아닙니다. 이런 뜻에서 복음서 기자는 창기나 세리가 유다 종교 지도자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참 죄란 밖에서 규정 못합니다. 자기만이 압니다. 그런데 행동 하나하나의 잘잘못이나 가려내는 데서는 참 죄의식을 못합니다. 정말 새로운 사실을 경험한 자(새것을 만난 자, 참 믿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과거의 자기를 뒤돌아보고 비로소 '나는 죄인이었구나!' 해지는 것입니다. 딴말로 하면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았을 때 자기 상실 과거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가령 성서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만났을 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합니다. 예수를 만났을 때 자기의 초라함을 동시에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초라한 상태에서 이미 나은 것입니다. 이제는 죄 아래 있지 않고 이미 예수와 새 삶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이미 죄에서 자유합니다. 따라서 당신의 죄를 규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969. 7.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