篤信好學守死善道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논어).
(참을) 독실하게 믿고, 열심히 배우고, 참된 길을 죽음으로 지켜야 한다.
위태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혼란한 나라에서 살지 말아야 한다.
세상이 제대로 되면 활동하고 그렇지 않으면 숨어야 한다.
제대로 된 세상에서 가난하고 천함은 부끄러운 일이요, 정의가 없는 세상에서 부하고 지위를 갖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것은 『논어』의 공자의 말이다. 나는 언젠가 이러한 공자에게 항의하는 글을 쓴 일이 있다. 오히려 세상이 잘못되고 있을 때 참을 위해 싸워야하는 것이요, 세상이 부패했을 때 숨어버리면 누가 그것을 바로 잡으며 세상이 잘될 때 무슨 활동을 하려는 것은 결국 한자리하자는 이상의 무슨 뜻이 있겠는가 하고!
그러나 요새는 그 뜻을 다시 되씹어 보고 싶어졌다. 그는 세상이 바로 됐을 때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이것은 옳은 인간이면 반드시 등용되리라는 신념이다. 세상이 부패했는데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를 얻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까닭은 그런 것들은 부정으로 얻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확실히 옳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처세의 길을 말하는 게 아닌가? 그릇된 세상이면 바로 잡기 위해 분발해야 할 게 아닌가? 그는 혁명 따위는 생각지 않은 모양이다. 이 점에서는 현대인에게 비판받을 만하다. 그런데 그는 믿고, 배우며, 죽음으로 참된 도를 지키라고 했다. 그는 세상이 무도하다고 체념한 것은 아닌 것이다. 단지 이 구조적인 나라 또는 세상이 타락했으면 혼자라도 끝끝내 도를 사수하라는 말이다.
여기에 그의 신앙이 엿보인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전제한 듯하다. 그러니 '천명'이 있으면 반드시 옳을 때가 온다는 신념이다. 그러기에 참된 길을 죽음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된 길 또는 정의를 공동체적으로 세울 수 없으면 그것에서 빠져나와서 사수해야 한다는 것이 옳은가?
그는 정치계 일선에 나서서 세상을 바로 잡아 보려고 동분서주 하다가 결국 그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세상은 기울어지기만 하매 이 선에 물러서서 제자들을 기르는 사인으로 묻혔다. 그러나 그는 때를 기다리기를 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己矣"(참된 임금이 나타날 것을 상징하는 봉황새도, 물속의 그림도 나타나지 않으니 나는 이대로 죽어야 하는가 보다!)라고 탄식했다. 역시 참된 세상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져야 한다는 신앙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저앉거나 또 함께 더러워지지는 않고 그날을 위하는 것이 옳은 태도인가?
구미 신학계에서는 이른바 '정치신학', '혁명의 신학' 등이 열심히 논의되고 있다. 이것은 '사변의 신학'에서 '행동의 신학'으로 전환해야 할 것을 부르짖는 소리며, 사회혁명의 일선에 설 것을 촉진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그러한 주장은 큰 문제에 부딪혀서 두 갈래로 나뉘게 됐다. 그것은 행동을 철저화하면 폭력에까지 이르러야하는 데, 그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놓고 '역사의 예수'에게서 어떤 결론을 구한다. 폭력도 불사한다는 주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채찍을 든 예수를 내세우고, 그것을 반대하는 측은 아무 저항 없이 처형되는 예수를 내세운다.
복음서에 나타난 대로의 예수와 공자를 비교할 때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된 것은 둘 다 도래할 나라는 기다렸다는 점이요, 제자들을 길렀다는 점이다. 그러나 차이는 예수는 처음부터 정치기구를 통한 어떤 해결의 길을 시도하지 않은 데 반해서, 공자는 그것을 시도해 봤으며, 또 비록 제자를 길렀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공자는 내일을 위한 인물을 기른 데 반해서 예수는 오늘의 현장에 그들을 참여시켰다.
그런데 예수는 오늘의 현장을 정치적 앵글에서 보지 않았다. 아니, 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오히려 묵살함으로써 그런 것과 충돌됐다. 그는 국가나 정치기구의 일원으로서의 민중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에서 풀어 놓은 무리를 상대했다. 그러나 그는 그 무리를 정치세력의 저항 세력으로 규합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도래할 새 세계의 일원으로 영접했다.
나는 대화를 쓰는 것을 잠깐 잊고 있었다. 그저 마음에 이는 파동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내게 왜 이런 생각들이 일어났는지는 묻지 않고 그저 붓끝이 가는 대로 적은 것이다. 까닭은 무심코 써가는 데 나의 내심의 일부가 더 뚜렷하게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72. 5.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