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이라는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이 정의는 그의 자화상이리라. 그는 30대에 요절했으니 약한 몸을 지녔음에 틀림없고, 권좌에 앉아 본 일이 없으니 남을 명령하고 억압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끼는 폭군과는 정반대로 문약한 사람이었으리라.
갈대! 바람에 날리는 갈대!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언제나 자기를 굽히되 거의 땅바닥까지 굽히기를 계속하는 갈대! 가느다란 체구! 끝에 길게 달린 은색 술 그 자체는 지혜를 담뿌 담은 신선의 머리칼처럼 장엄하고 우아한데 줄기가 굽는 데 따라 계속 땅바닥에 태를 치고 또 쳐야 하는 가엾은 것! 그것이 바로 자기를 보고 사람을 보는 파스칼의 눈에 비친 인간의 나약함이었으리라.
그러나 사람은 갈대가 아니다. 까닭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갈대는 바람이 부는 대로 그저 굽혔다 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의식할 줄 알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대이면서 갈대는 아니다.
데카르트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니, 생각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 종일 몸이 원하는 대로, 주어진 여건에 끌려서 이렇게 타협하고, 저렇게 굽히고, 이런 것에 끌리고 저런 것에 재미를 붙이면서 하루하루를 지내다가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공허'라는 것을 느끼다가도 '사는 것은 본래 그런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그런 모습으로 시들어 가는 사람 튈 그것은 갈대이지, 생각하는 갈대는 아니다. 그는 그저 생존하는 것이지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런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생각한다. 그런고로 나는 사람이다."라고 바꾸어 말해야 할 것이다. 전에는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방으로 밥상을 들고 들어가는 짧은 시간에 열두 가지 생각을 한다는 말이 있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는 그 보다 더 심한 가슴앓이가 있었으리라. 부부관계에도 어떻게 보면 더 심한 굴곡의 연속이다. 잠자리에 같이 들고 아침에 흩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어날 때의 허전함! 커 가는 아이들에게 정신을 팔다가도 아이들이 크는 데 비례해 초라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이 언뜻 뇌리를 스쳐가 가슴에서 쓴 물이 흘러내리는 경우, 매일같이 장바구니를 들고 장거리에 나가 이것저것 사면서 돈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애를 쓰는 것이 본능처럼 되어버린 자기를 돌아보며 "너는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찾지 못한 채 또 다른 상념에로 옮겨지는 여인들에 모습, 그들의 삶에는 잔잔한 물결도, 돌풍도 불어오지 않는다. 그저 지형에 따라 모여져서 자그마한 늪이 되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썩어가는 것 같은 그런 지루함이 있을 뿐이다. 그도 지루하고 보는 사람도 지루하다.
나는 여인들을 생각하며 이 글들을 썼다. 내게 비친 여인들은 지루하다. 그러나 밉지 않다.
왜 그럴까? 지루한 것은 생각을 별로하지 않는다고 보여지기 때문이고, 밉지 않은 것은 그 자신도 모르는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일상성에 매여서 지루하다. 일상성은 만성을 낳기 때문에 지루하게 하는 것이다. 일상성은 반복을 강요한다. 반복은 지루한 것이다. 그러나 반복 없이는 삶이 없다. 또 일상이 없이는 비상이 설 자리가 없다.
'상'(常)은 상스러운 것이며, '상'은 또한 가장 고귀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올바른 길을 '상도'(常道)라고 했다. 먹고, 자고, 싸고, 먹고, 자고, 싸고, 이 반복이 얼마나 지루한 것이냐! 그러나 그 반복 이 없이는 삶이 없다. 한번 쏟아 부으면 그대로 밑구멍으로 새어 나가는 물을 다듬어 놓은 콩 위에 날마다 붓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이렇게 물을 붓는 손은 얼마나 공허하랴! 그러나 그런 반복이 콩 나물을 낳게 하는 마법이다. 조그마한 콩알이 그 자체보다 몇 배, 몇 십 배의 길이의 체구를 단 생물로 변한다. 그 일상적인 반복이 요술을 낳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한 감격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 물 붓는 것을 반복한 그 손은 그저 하나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에 불과할 것이고 자기 손이 요술하는 것을 인식하면 그는 생각하는 갈대가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물과도 같다. 물은 스스로 갖춘 모양이 없다. 그래서 담는 그릇에 따라 여려 모양이 될 수 있다. 그릇에 담지 않으면 물은 결국 땅에 잦아들고 만다. 그래서 그릇이 필요한 것이다. 물은 무한한 힘(energy)을 보유한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한 힘이 되지 못한다. 그 힘을 발휘하려면 고요히 모여 있는 상태에서 아래를 향해 내리쏟아져야 한다. 그러면 그 가능태가 실제형태로 변해서 바위도 밀어내고, 땅도 파헤치며, 사람들은 그 힘을 받아 전기를 얻기도 한다.
나는 이 작은 글들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물의 모양을 제공하는 그릇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고인 물에 도랑을 내어 아래로 쏟 아지게도 하며, 크고 작은 에너지로 변하는 것을 기대했다. 이런 내 소원이 혹시나 맞아떨어진다면 지루하던 그 앞에 나는 무릎을 꿇고 합장하리라.